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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7화 (2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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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우리는 패배했다.

소머빌 제독은 전사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지휘부의 거의 모든 인원이 전사했다.

대공포대에서 적기의 공습을 당한 이후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실려왔기에 지휘부의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를 살려두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통로가 무너졌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하벙커의 지휘관들이 살아서 나올 수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이제 일개 소령인 그가 생존자들을 지휘해야 했다. 윌리엄 크릭 소령은 허벅지의 통증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파편에 스친 허벅지보다 책임감에 눌려오는 머리가 더 아팠다.

"거대한 폭탄 몇 개가 떨어진 듯 합니다. 전함들은 좌초되었고... 함내의 생존자 수색은 계속되고 있으나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요새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수색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 상황은 어떤가? 통로 중 어디 어디가 막힌 것이지?"

그에게 보고하는 중사의 눈빛이 떨렸다.

"..소령님, 어디가 막히지 않았냐고 물어보시는게 빠를 듯 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요새의 지도에는 붉은 X표시가 죽죽 그어져 있었다. 여기가 막힌 통로들인가. 크릭 소령은 슥슥 지도들을 훓어보았다.

지하 깊은 곳의 보급창들로 가는 통로는 예상할 수 있다시피 막혀 있었다. 가장 얕은 곳 1층의 보급창만이 접근 가능했고, 그곳에는 소화기용 탄약 같은 것은 없었다. 머리가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 개인화기 탄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없나? 밑으로 파고 내려갈 방법은? 병력 현황은 어느 정도인가, 사지 멀쩡한 이들 기준으로 말일세. 저들의 지상부대가 접근하면 방어할 방법은 있나?"

"소령님, 저희는 지금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저는 일개 중사이고, 생존자들의 일부만-제발 그들이 '일부' 이기를 바랍니다만-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사는 다시 뜸을 들였다. 크릭 소령은 한숨을 푹 쉬었다.

"대부분에 질문에 아니오, 라고 대답해도 될 것 같습니다. 탄약은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전함에서 탄약을 사용할 일이나 있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래도 탄약의 재고가 얼마 없어서 대부분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상태였다는 것이겠군요."

"그게 일인당 몇 발쯤 되나?"

"아, 드디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십니다. 인당 60발입니다. 60발."

그냥 항복할까? 소령은 잊고 있다가 허벅지에서 올라오는 격렬한 통증에 간호사에게 모르핀을 요구했다. 모르핀을 맞으면 머리도 좀 덜 아플까?

확인한 생존자가 대략 2개 중대, 400명. 인당 60발의 총알이면 2만 4천 발. 제리들이 2만 5천 명을 데려온다면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 저들의 병사 수가 많다. 와우.

지중해 함대는 도착할 수는 있을까? 1천 마일 넘게 떨어진 몰타에서 여기까지? 그전에 우린 제리 놈들한테 죽거나 스페인 놈들에게 유린당하겠지.

포로수용소의 대우는 어떠려나? 제발 저 폴란드 같은데로 끌고가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 동네는 춥다고. 따뜻한 스페인에서 지중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용소 생활을 한다면 그런 게 좋을텐데···

"그래서 우리는 어느 포로수용소... 아니네. 그냥 잊게."

"예? 아무튼 알겠습니다."

내가 저들보고 싸우다 죽으라고 명령할 수는 있을까? 아니, 당장 오늘 저녁 먹을 식량은 있을까? 그 맛대가리 없는 국산 전투식량을 먹으면서 반드시 죽을 싸움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행위가 아닐까? 병사들이 내 지휘를 따르기는 할까?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전투와 후송 때문에 아침도, 점심도 거르다시피 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간호사를 불러 먹을 것을 가져다달라고 하기엔 먹을 것이 있는지부터 의심스러웠다.

아, 파에야가 먹고 싶다. 지브롤터에 배치되고 나서 외박 휴가를 나갔을 때, 무어인 노점상이 파는 삶은 새우 한 바가지와 솥째로 먹는 파에야가 생각났다. 같이 휴가를 나갔던 동료 장교들은 이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고 난 이 꼬라지가 됐군. 꼬르륵....

"간호사, 혹시 먹을 것 좀 있나?"

뚱뚱한 아주머니 간호사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야, 내가 이래뵈도 지금 기지 최선임자인데...

빌어먹을. 이런 건 진짜 안 먹느니만 못하군.

멀건 오트밀 죽을 뜨면서 크릭 소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지의 식량 창고는 대부분 폭발과 함께 암반 속으로 사라졌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더 적었기에 식량 자체는 넉넉하게 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이런 음식이 배식되었다. '회복' 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이런 걸 먹고 회복을 하라는건 대체 무슨 심보지?"

단백질, 단백질을 달라. 상처로부터 회복하는데에는 이런 멀건 오트밀 따위가 아니라 고기가 필요하단 말이야!

이 지경이 되고서도 기지 최선임자가 된 김에 장군들이 먹던 식사를 먹어보고 싶은 간사한 인간의 심리가 참 신기했다.

지금 스페인이 선전포고한것만 아니었어도 병사들을 보내 인근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시키거나 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최소한 돈을 주고 사람들을 데려와서 요리를 시키던가.

고국이지만, 영국인들은 진지하게 요리를 더럽게 못 한다. 우리 엄마도.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이 지독하게도 맛이 없었다는 것은 스페인에 와서 알게 되었다. 병영의 짬밥보다는 집밥이 맛있었으니까.

현지에 사귄 아가씨에게, 어머니가 알려주신 비법이라고 비프 웰링턴을 한번 해 줬다가 뺨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

프리다, 그 여자는 진짜 예뻤는데... 그가 만들어준 요리를 당혹스런 눈으로 보다가 한 입 먹어보고, 퉤 뱉어낸 이후 그의 뺨에 싸대기를 확 날리고 휭 하니 나가버렸다.

사슴같은 녹색 눈망울에 취해 오늘 저녁에는 어떤 와인이 어울릴 지를 고민하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다 그런걸 먹었으니 오죽했겠냐만은... 사실 우리는 이미 음식부터 독일에게 패배해있던게 아닐까?!

"소령님..?"

그가 있던 병실의 문을 열고 아까 보고하던 중사가 들어왔다. 저녁을 못 먹었나?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아니 무슨 일인..."

그리고 그를 따라 총을 겨누는 일단의 병사 무리들이 들어왔다. 반란인가? 크릭 소령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길 방법이 없는데 누군지 알면 뭐 할 것인가? 그는 더럽게 맛 없는 오트밀을 떠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양 손을 높게 들었다.

"항복! 항복! 살려만 주시오!"

무장친위대 대위 오토 슈코르체니는 의기양양하게 무전을 통해 사령부를 호출했다. 요새는 완전히 제압되었다.

사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혹시나 모를 소탕전을 대비해 요새 내부의 구조를 확인하고 결과를 보고하면서 가져온 폭약으로 창고로 가는 통로까지 폭파시켰지만 항공폭탄 몇 발에 완전히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폭탄에 쑥대밭이 된 지브롤터 요새로 다시 잠입하는 것은 처음 잠입보다 훨씬 쉬웠고, 병실에서 골골대던 소령 나부랭이 하나를 사로잡은 것 뿐이지만 일단 현재 요새 최선임자까지 잡았다.

"아, 아 사령부? 여기는 잠입조. 요새는 무너져 내렸고 저항하는 세력은 지휘체계가 엉망인 극소수일 뿐이다. 아군의 사상자는 전무하다. 이상."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갇히게 되는 건가? 독일인가? 스페인인가? 나는 가급적 스페인이면 좋겠는데. 아, 그리고 자네들 뭐 식량 좀 없는가?

나도 영국인이지만 영국 음식은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네. 솔직히 독일 음식도 소시지-독일어로는 부어스트라지?-빼고는 그닥 맛있진 않은 것 같은데. 자네들도 감자 부어스트 자우어크라우트에 맥주. 이 정도가 끝 아닌가?

스페인 음식이 훨씬 나은 것 같아. 프랑스도 괜찮은데 그놈들은 개구리나 처먹는 놈들이니 제외하세. 아무튼 나는 자네 독일인들이 우리를 스페인에 수용해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병사들은 그래도 용감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형편없는 대우를..."

"사령부에게 묻는다. 여기 병사들은 어디에 수용할 것인가?"

슈코르체니는 크릭 소령의 수다를 견디지 못하고 그가 바라는 대답을 들려주기 위해 사령부에게 다시 무전을 쳤다.

이때만큼은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크릭 소령은 망할 영국 음식을 안 먹기 위해, 그리고 오토 슈코르체니는 저 아가리쟁이 놈이 좀 그만 떠들었으면 했기에. 사령부에서는 일단 취조를 위해 세비야로 보내질 것이라고 답신을 보냈다.

그 이후는? 어찌 알겠는가.

"아,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소령은 정말 안심이 된 듯 싶었다. 슈코르체니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무튼. 요새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대부분은 자포자기 상태였거나, 아예 무장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파묻혀버린 동료나 좌초된 전함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한 병사들을 구조하다가 기진맥진해 중화기와 수류탄으로 무장한 슈코르체니와 프리덴탈 특공대를 상대로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구에 얼굴에 흉터까지 있는 슈코르체니의 외모 때문일 것 같다고, 대원들은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정도로 배짱이 좋은 사람은...

"이거 설마 대위님 얼굴을 보고 항복하는거 아닙니ㄲ.."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추축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귄터 뤼첸스 제독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이끌고 북해로 나갈 때만 해도, 그는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지 알지 못했다.

다만 총통이 내려준 비밀 지령문만을 읽고 있었을 뿐. 지령서에는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공격할 영국 함대의 행동방침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지령서는 거의 예언처럼 맞아 떨어졌다.

총통의 명령에 따라 그는 후드를 격침시켰고, 킹 조지 5세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북대서양에 장사지내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최신예 전함 두 척을 그에게 상실했고,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2계급 특진해 추축 연합함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로부터 들어온 전문은 없나?"

"그렇습니다 각하. 비스마르크가 교전에 들어갔다는 전신은 아직 없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홀로-구축함 몇 척과 유보트 떼의 호위를 받기는 했어도-북대서양으로 나아가 이 작전을 위한 미끼가 되어 주고 있었다.

분명 영국 본국함대는 제대로 달아올라 비스마르크를 노리고 대규모 출격을 벌였을 것이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그는 비스마르크 위에서 지금의 자리를 거머쥐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비스마르크 없이도 지금 그가 지휘하는 함대는 실로 위풍당당했다. 전함만 해도 기함 티르피츠,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이탈리아 해군의 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카이오 두일리오, 콘테 디 카보우르,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 덩케르크, 스트라스부르, 브르타뉴와 프로방스까지.

전함만 12척인 이 대함대를 호위하는 순양함들과 구축함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사실상, 추축 3국의 주력함 거의 모두가 이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합류한 것이다.

이들이 상대해야 할 영국함대의 전함은 모두 8척. H전단에서 올라온 전함 1척의 대파 보고를 신뢰한다면 7척이었다. 당장 눈 앞의 지중해 함대는 끽해야 지난 대전 시절의 전함 두 척-버램과 말라야-에 순양함 6척밖에 없었다.

항공모함 전력을 제외한다면, 추축 연합함대는 최소한 숫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지브롤터의 함락 소식을 듣고 달려올 수 있는 영국의 전함들-넬슨, 라미레즈, 리벤지, 로얄 소브린, 발리안트-까지 합쳐도 수적으로는 2:1. 추축 해군의 낮은 숙련도를 고려해도 우세했다.

"몰타는... 몰타에 있는 허리케인이 전부 해서 100대도 안된다고 했었지? 어쨌거나 몰타 근처를 지날 때에는 반드시 대공방어진을 짜고 지나도록 명령을 전달하게. 공군이 엄호를 해준다 하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건 해야지."

"예 각하!"

유일한 변수는 몰타의 항공세력이었다. 루프트바페와 레지오 에어로노티카의 다구리를 쳐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있는 악바리들. 일제 공습을 통해 함대가 타격을 입는다면 지브롤터를 공략하며 애써 만든 변수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함대방공진을 짜고 집중적으로 대공포화를 날리면 워낙 압도적인 숫자로 인해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상 수상전력의 전부나 다름없는 이상 이후의 결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력은 아껴야 한다. 다음에 올... 영국 상륙을 위해서도.

벌써 계급은 상급대장에 이르렀다. 더 이상 올라가려면 에리히 레더 제독이 은퇴하고 나서 원수 직위를 받고, 해군 총사령관이 되어야 했다.

지금처럼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작전-비록 그 가치가 크다 해도-에서 이기는 것은 그다지 승진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영국 상륙작전에서 해군을 이끌고 상륙을 성공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 다음은··· 런던과 스캐파 플로. 빌어먹을 해적떼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지. 안 그런가?"

"아, 역시 제독님이십니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셨군요!"

지난 전쟁에서 독일제국의 위대한 함대는 영국에게 탈취당해 눈물을 흘리며 자침해야만 했다. 대양함대의 굴욕이 바다속에 잠든 스캐파 플로···

해군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지난 전쟁 시절부터 복무를 시작한 이들이었다. 제국의 자랑인 위풍당당한 함대를 이끌고 대양을 질주하는 꿈을 꾸다 그 꿈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이들이 느낀 절망은 어떠했는가.

그 역사를, 그 굴욕의 역사를 저들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런던을 불태우고 영국 놈들의 ‘왕립 함대’를 스캐파 플로의 해저에 처박아 버린다! 그것이 뤼첸스의 목표였다.

물론, 구식 전함들은 자침시킬지라도 소중한 신형 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은 빼앗아오고 싶었다. 지금 열두 척 전함만으로도 이렇게 위풍당당한데 영국인들의 앞선 기술로 만든 전함들까지 옆에 있다면? 그 얼마나 든든할 것인가.

총통은 미국과의 결전을 계속 의중에 두고 있었고, 그의 동기이자 친구인 되니츠 역시 잠수함대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미국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물론, 뤼첸스 그 자신도 결전이 싫지는 않았다. 추축국의 전함 함대를 이끌고 미국과 함대결전을 벌일 사령관은 자신이었으니까!

뤼첸스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동안 티르피츠를 위시한 함대는 비취색 지중해 바다로 향해 항진하기 시작했다.

저편에 보이는, 아직도 희미하게 연기가 솟아오르는 지브롤터 암벽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저 암벽 위에 크릭스마리네의 깃발을 세우리라. 그는 다짐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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