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회
히틀러는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어 앉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중해를 석권한다면 지중해 안에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는 터키는 참전시킬 수 있다. 이들은 이제 소련의 부드러운 아랫배인 카프카스를 찔러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대서양에서 흑해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독일의 함대가 남부집단군의 사령부가 있는 오데사, 그리고 흑해 함대의 모항인 세바스토폴을 공격할 수 있다.
리비아의 유정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수에즈를 추축국의 손아귀에 넣어 인도를 참전시키고. 세계를 두고 싸우는 장기판에서 지중해를 차지하는 것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위해 꼭 필요했다.
단 한번의 결전으로 영국을 결정적으로 몰락시키고 난다면 북해와 대서양의 제해권이 들어오는 바, 소련의 협박에 쫄아 간을 보는 만네르하임의 핀란드 역시 전쟁으로 끌고 올 수 있을 것이다.
중립을 표방하며 간사하게 협력하는 척 마는 척 하는 스웨덴도 참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참전한다면 아직 북부집단군이 가까이 가지도 못한 레닌그라드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영국을 정복하고, 이제 레닌그라드마저 함락시킬 롬멜의 전차군단! 핀란드 방면에서 내려와 후방 이라고 생각한 곳들이 유린당하면 과연 '스탈린'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히죽히죽,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이제 곧 라스푸티차가 오고, 겨울이 온다.
라스푸티차는 독일의 진격이 멈추고, 소련이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어찌 보면 소련 역시 독일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힐 수 없다. 즉, 독일이 전선 저쪽에서 무슨 난리를 피우고 다니던지 소련이 전선에서 쓸 수 있는 카드가 하나도 없어진다는 것.
너무 늦게 생산하기 시작한 월동장비 약간을 가지고는 수백만에 이르는 독일군을 모두 입힐 수는 없었다. 만약 소련의 동계공세 앞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이 필연이라면 그동안 소련을 뒤흔들 수 있는 수를 몇 가지는 준비해야 했다.
작전술 규모에서 소련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저쪽의... 미래인, 꼭 스탈린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스탈린으로 추측되는 미래인은 전략적 측면에서의 기습은 당했다.
그러나 작전술 규모에서는 빠르게 재정비해 독일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축조한 방어선 앞에 군대를 들이 박는 것은 좋지 못했다.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왜 적의 가장 강력한 방어선에 우리 병사들을 들이미는가? 저들의 대지에 거름을 한 줌 더해주기 위해서? 카프카스와 레닌그라드, 소련의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곳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길 치기 위해 수백만의 군대를 땅에 묻어야 한다면 전혀 수지가 맞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히틀러는 그렇게 하다가 몰락했고, 그의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역사는.. 반복되어서는 안돼"
그의 조국, 영혼의 조국 일본은 미국의 핵폭탄 두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수많은 전략-전술적 실수들을 저질렀고, 핵폭탄을 충분히 일찍 개발하지 못했다. 자랑거리인 세계 최고의 전함 야마토는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비겁한 귀축영미의 항공기에 의해 침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기회가 주어졌다. 조국의 불운을 막아낼 기회가.
영국을 정벌하고, 소련을 굴복시키고, 미국과 일전을 치를 일본을 지원하여 이 갈라진 세계의 패권을 손 안에 쥔다..!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오다 노부나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굉장히 좋아했다.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간절히 동경하고 바랬던 것처럼. 혼란한 시대를 끝장낼 강력한 지도자..! 오다를 따라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리고 꽤 잘 먹히는 듯 했다.
원래도 히틀러를 광적으로 숭배하던 이들이었지만, 차갑고 냉정하게 ‘바뀐’ 그를 부하들은 더욱 두려워했다.
할더 같이 심약한 이들은 그 앞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도 못했다. 좀 더 대담한-카나리스 같은-이들은 의연했지만 순간순간 내비치는 떨림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두려움은 경외가 되고, 경외는 존경이 되었다.
지금의 총통은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도착했습니다 총통 각하."
"들라 하게."
카나리스는 할더만큼 소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당당했고 히틀러 앞에서 굽신거리는 일도 없었다. 총통은 충신 카나리스를 총애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반역 음모를 꾸몄다지만, 그것은 미치광이처럼 폭주하는 히틀러를 멈춰 세우려 한 것일 뿐. 사람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각기 이권과 권력에 취한 것이 아니라.
나치의 고관대작 중 그만한 이는 없었다. 대개 총통의 환심을 사겠다고 알랑거리거나, 권위에 주눅들어 벌벌 떠는 소인배들. 혹은 둘 다.
가끔 괴링같이 대놓고 자기 몫을 주장하는 눈치 없는 자도 있었지만 그것은 약에 취해 만용을 부리는 것일 뿐. 카나리스처럼 배짱과 소신을 갖춘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명을 받고 왔습니다. 총통 각하."
"앉게."
그에게는 절도가 있었다. 제독의 위까지 오른 군인임에도 그는 각 잡힌 경례를 붙이고 척 하고 자리에 앉았다. 총통은 그를 내심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역정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예 각하. 명령하신 대로 진행하였습니다. MI-6에서는 저희 쪽에서 흘린 시신을 진짜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기 위해 돌린 본국함대를 다시 본토방위로 끌어오고 있음을 초계중이던 유보트에서 알려왔습니다."
"다음주까지 카디스에는 얼마만큼의 함대를 대기시킬 수 있지?"
카나리스는 품에서 보고서 한 뭉치를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크릭스마리네에서 올라온 보고서에는 함대의 기동과 기만전술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비스마르크와 호위함대-수상과 수중의-는 브리튼 섬 북부의 스캐파 플로 쪽으로 기동하며 영국의 본국함대를 유인한다. 그 사이, 나머지 대부분의 추축군 수상함대는 지브롤터에 집결한다.
비밀리에 추축국에 합류할 의사를 표한 프랑코는 지브롤터 근처의 스페인 항구, 카디스에 추축 함대를 숨겨주는 것에 동의했다. 여차하면 바로 지브롤터로 달려가 영국 해군 기지를 박살낼 수 있도록.
아프베어는 이 지점에서 두 가지 기만전술을 기획하고 집행했다.
먼저, 영국 해군이 이를 박박 갈며 격침을 노리는 비스마르크를 미끼로 던졌다. 이미 저들에게 새어나가고 있는 암호로는 비스마르크가 어디로 향하는지, 얼마나 호위 함대를 붙이고 있는지를 낱낱이 알려 주고 있었다.
물론 호위로는 훨씬 더 많은 유보트가 붙어있었지만.
그리고 다른 경로로는 영국 상륙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영국의 대외 정보기관인 M16의 확인된 스파이들은 역시 확인된 정보원들에게 독일이 대규모 상륙 작전을 위한 물자들을 비축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전해받았다.
누군가는 부교, 누군가는 수륙양용전차의 궤도, 또 누군가는 공수부대를 위한 낙하산. 이 단편적인 정보들은 M16으로 흘러들어가 독일이 어딘가에 최소 수십만 명 규모의 상륙작전을 준비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이와 동시에 아프베어는 한 명의 시신을 준비했다. 바이에른 출신의 유보트 장교 '이그나츠 돌만' 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시신은 독일의 '비밀' 작전계획서를 가진 채 영국의 해안에 표류했다.
비밀 작전계획서에는 브리튼 섬의 중요 도시들인 포츠머스, 도버, 그리고 벡스힐에 대한 대대적 공수작전과 비스마르크를 제외한 크릭스마리네의 수상함 거의 전부를 동원하는 2개 야전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프랑스 북부의 칼레와 르 아브르, 셰르부르에서 출발하여 영국 남부 해안지역에 상륙, 런던을 포위하고 옥스포드를 거쳐 노윅까지 진군할 독일 기갑사단'들' 은 이미 최고의 훈련을 받으며 대기중이었다.
이 시신과 계획서를 입수한 영국 참모부는 부랴부랴 예비역인 홈가드를 소집하고 이들에게 중화기, 대공포 사용법 등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륙지점으로 밝혀진 해안들에는 토치카와 참호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영국의 방어계획은 훌륭했다. 다만, 이 계획서 역시 기만전술의 일부였다는 것만 제외하면.
독일은 비스마르크를 미끼로 던져 영국 본국함대의 주의를 끌며 남부 해안에 상륙하는 듯 허풍을 쳤지만 실제로는 지브롤터와 몰타를 노리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를 미끼로 던지는 것을 의심한다 쳐도, 상륙작전이라는 거대한 떡밥은 영국 참모부의 모두를 경악시켜 다른 곳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정보들이 영국에 줄줄 새어나가는 구형 에니그마를 통해 돌아가는 동안, 진짜 공격방향인 지브롤터 작전에 대한 것은 저들이 듣도 보도 못했을 최신형 8단 에니그마-코드명 트리톤-를 통해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상륙 물자는 충분히 비축하고 잘 관리하도록 하게. 결국 영국을 정벌하려면 상륙작전이 한 번은 필요할테니."
"예 총통 각하! 그 점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중해의 영국군을 몰락시킨 이후에는 진짜 상륙작전이 대기하고 있었다. 설령 암호체계가 또 뚫려 상륙작전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간다 한들, 한번 기만전술에 당한 영국의 반응이 지금처럼 히스테릭할 정도로 철저할 리는 없었다.
또, 영국령 인도 제국을 뒤흔들 일제 봉기가 지중해를 상실한 영국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찬드라 보스···"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반영 무장투쟁을 주장한 찬드라 보스는 이미 인도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발칸을 지나고 ‘중립국’ 인 터키와 이란을 거쳐 인도로 향할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킬-그리고 추축국에 합류시킬-무장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가 이끄는 자유 인도 임시정부 휘하에는 수십 명의 독일인 군사고문단이 동행하고 있었다. 아직 독일이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할 수 없었기에 기껏해야 민병대 수준의 무장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동쪽에서는 일본이, 서쪽에서는 독일이 진격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내부의 반란과 외부의 적군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게 끼어버린 영국인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최종적으로는 인도까지 추축국에 합류시켜 거대한 유라시아 공영권을 이룩하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라시아 공영권의 두 축이자 인류를 이끌어갈··· 일본 제국과 독일 제국. 슬슬 돌기 시작한 페르비틴의 약기로 총통은 흐흐 웃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오다보다도 뛰어난 전략가가 아닌가?"
"예? 총통 각하?"
그의 비서가 되물었지만 총통은 그저 손을 내저었다. 비서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실실 웃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주치의 모렐 박사가 처방하는 약물들은 점점 가짓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페르비틴을 하고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기괴한 낙서 같은 악필을 종이에 죽죽 써내려가며 혼자 화를 내거나 울고 웃었다.
그런 총통의 기행을 비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총통은 도이치 민족의 영도자이자 ‘예언자’ 라고 괴벨스 박사와 수석비서 보어만은 이야기했다. 그분의 기행을 하나하나 다 이해하려 하지 말라. 보고 들은 내용은 침묵하라.
총통은 광기들린 웃음을 터트렸다.
"하일 히틀러!"
비서는 경례를 붙이고 퇴장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