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화
"아, 조지. 자네가 올린 보고서는 잘 읽어 보았네."
"각하. '마셜 장군' 이라고 불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루즈벨트는 허허 웃으며 마셜의 간곡한 요청을 흘려 넘겼다.
자꾸 친한척이야... 마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통령이 자신을 호출했을 만한 이유를 속에서 몇 가지 짚어 보았다. 그리고 금방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몰로토프 외상이 한 말에 대해서 말인데.."
몰로토프는 여러 가지 말을 하고 갔다. 전후 미국-영국의 대립 가능성, 소련의 미국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과 나치가 가지고 있는 황금에 대해서 등.
그러나 루즈벨트가 이렇게 심각하게 자신을 불러야 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그는 단 한가지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소련의 역정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하."
"그래, 조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듯 나도 비슷한 심정이네만... 정치인은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하지. 그리고 일본 전력에 대한 정보는 너무 자세해."
"'마셜 장군' 입니다. 각하."
루즈벨트는 끌끌 웃더니 다시 정색을 했다.
"만약 소련이 우리에게 역정보를 흘렸다고 하지. 그렇다면 소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마셜은 대답을 한참이나 고민해야 했다.
"만약 일본에게 이득을 주려는 목적이라면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우리에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또, 일본이 이 정보대로 행동하지 않아 소련이 우리의 신뢰를 잃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득을 역정보를 흘린 것으로 취할 수 있겠나?"
"동부전선에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이 일본을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그와 별개로 소련이 단독으로 일본의 눈을 반대편으로 돌리거나, 혹은 일본과의 밀약 하에서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자기네 함대에 대한 최고 기밀 정보까지 팔아넘기며 말인가? 조지, 자네는 너무 소련을 싫어해."
"'마셜 장군' 입니다 각하. 그리고 저는 소련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각하."
마셜은 정보의 진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무에서 캐내는 것은 어렵지만, 들어온 정보를 검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렇게 거대한 계획은 숨기려고 해도 분명히 어딘가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실마리를 놓치고 지나가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찾는 데 온통 신경을 쓰게 되어 있지만 이렇게나 자세한 정보들이 주어진다면야... 검증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소련이 이렇게 행동하는 목적에 대해서는 마셜은 끊임없이 의심했다.
끊임없이 세력 확장과 세계 적화를 꿈꾸는 저들이 대체 왜 이렇게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할까?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임을 제창하고 영국의 대독전 수행에 협력하기는 했어도 그것은 루즈벨트의 성향이 다대하게 개입된 결과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언제까지 대통령일지는 모르나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유럽의 전쟁' 에 개입하고 싶지 않아 했다. 아니, 차라리 유럽이면 낫지,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끔찍한 스키타이들, 볼셰비키 빨갱이들이라면 더더욱.
"미국은 섬이네 조지. 먼로 독트린 이래로 우리는 이 대륙이자 섬이나 다름 없는 아메리카를 미국의 앞마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지. 성공하기는 했네. 영국은 이제 고물딱지 구축함 50척에 카리브해에서 손을 뗄 것을 약속했어. 그러나 우리 미국에겐 명백한 운명이 주어져 있지."
마셜은 이젠 아예 '마셜 장군' 이라고 지적하기를 포기했다.
루즈벨트는 ‘명백한 운명’ 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미국은 그저 열강 중 하나라 생각했지만, 이미 국력 면에서 미국은 초강대국이라는 영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이 세계 질서에서 힘에 걸맞는 자리를 얻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식민제국을 건설해야한다는 말은 아니네. 식민지는 끔찍하게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지."
"그렇습니까 각하?"
"당장 늙은 처칠이 식민지를 지키느라 허우적대는 것을 보게. 식민지는 가져올 수 있는 것에 비해 지키고 경영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 원료를 제 값을 주고 사오는 것에 비해 빼앗아 오는 게 더 나아보일 수도 있겠지만"
루즈벨트는 시가를 물고 꺼드럭거리는 처칠을 따라하며 낄낄 웃었다. 비단 처칠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가들은 항상 더 많은 식민지를 개척할 것을 원했다. 국가가 식민지를 지키느라 머리를 싸매고 젊은이들의 피를 때려박는 동안, 그들은 식민지에서 부를 찾았다. 국가의 재정적자 따위, 기업가들이 알 바인가?
"그들에게 총질을 하고 식민지 치안군을 유지하고, 무지막지한 규모의 행정기구와 함대를 유지하는 건... 그거야 말로 막대한 예산을 잡아먹지. 자네도 지금 머리가 꽤 아플텐데, 상시적으로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해 자네처럼 일해야 한다고 하면 어떤가? 하하하하하"
마셜은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이 그를 신뢰하는 만큼 대통령을 존경했다. 그리고 식견을 믿었다.
이 시대의 백인들에게 식민지란...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꽤 많은 배운 사람들은 식민지란 것을 혐오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혐오했고 더위와 풍토병과 미개한 풍습들을 혐오했다. 그래서 백인의 의무를 지고 그들을 교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예컨대 루즈벨트와 같은-은 그런 위선을 더욱 혐오했다. 백인의 의무, 그리스도교인의 의무를 운운하는 이들은 예수가 말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무시하곤 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정당한 임금조차 주지 않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에서 난 소출을 착취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할 일인가?
미국 역시 같은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미국에게도 필리핀이나 쿠바 같은 해외 식민지들이 있었고, 또 중남미에서 식민제국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일을 해 왔다.
"인도를 포함하면 대영 제국의 인구는 5억이 넘지. 프랑스 역시 서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포함하면 1억이 넘고. 그러나 단 8천만 인구를 가진 나치 놈들에게 왜 그렇게 얻어 터졌겠나? 근본적으로 식민지는 국가의 제대로 된 힘이 될 수 없네. 유지하는 비용에 비해 너무나 비효율적이지."
루즈벨트는 계속 본인의 지론을 풀어 나갔다. 그의 식민지 해방에 대한 의견은 윌슨 같은 이상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피식민 민족의 해방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패전국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투르크 같은 다민족 제국을 찢어버리기 위한 수단.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의 식민지들은 단 한 치도 건드리지 못했고, 오히려 승전국들은 자기네들끼리 새로 영토를 나눠 먹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의사는 묵살되었고.
하지만 루즈벨트는 그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훨씬 현실정치에 가까운. 그는 ‘도덕’ 이나 ‘백인의 의무’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개새끼라도 우리 개새끼라면 그는 용납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의 짝불알 히틀러 씨는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어. 잘 조직되고 공업화된 땅에 애국심으로 불타는 노동자들을 꽉꽉 채워 넣는 것으로 공황을 극복하고 강력한 군대를 건설해서 군살덩어리로 비대해진 식민 제국들을 박살내놓고는!"
쾅! 박살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그는 책상을 내리쳤다. 하필 그가 내리친 것이 영국과 관련된 외교 문서였다는 것이 우연일까?
"자기 나라에 그 군살들을 덕지덕지 붙이려 하고 있지 않나? 소위 그... 뭐더라? 조지? 자네는 기억나나?"
"레벤스라움 말입니까? 각하?"
"아 그렇지. 레-벤-스-라-움. 발음하기도 힘들군. 아무튼 그것이 있으면 뭘 하나? 공장에서 근면하게 일해야 할 젊은 청년들이 슬라브 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농장주가 되고 광산 감독관이 되기를 바라는 건가? 자기 스스로 그런 나라들을 몰락시켜 놓고는?"
마셜은 뭔가 알 것 같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산업 구조 문제나 다름없었다.
비효율적인 산업과 효율적인 산업의 충돌. 식민지라는 거대한 군살덩어리와 집약적 공업이라는 잘 빠진 산업의 대결.
"마치.. 내전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각하."
"바로 그걸세!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한 그들은 결코 열심히 일하지 않지.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일을 할 뿐이야. 의욕도 없고, 전혀 정력적이지도 않았지. 그러나 급여를 주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자 그들은 이 위대한 나라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어! 지금 우리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수많은 흑인 청년들의 그 애국심과 의욕을 과연 그들이 노예였을 때에는 보여 주었겠나?"
귀중한 인력을 왜 그렇게 쓰느냐 이거지. 루즈벨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가능성 있고 잠재력 있는 인간을 노예 상태에 처박아 두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기도 했지만 비효율적이었다. 흑인 노예나, 식민지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나 좋았다. 그들의 척수에 빨대를 꽂고 쪽쪽 골수를 빨아먹는 게으른 식민 제국주의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기업가들만 빼면. 아, 대제국 쇼비니즘에 젖은 인간들도 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네. 히틀러 씨가 영국과 프랑스 같은 식민 제국들을 깨부수어 놓고, 또 다시 식민제국을 건설하려 하겠지만 그것은 스탈린 서기장과 우리가 합심해서 막아 낼 수 있을걸세."
그래서 루즈벨트는 소련을 싫어하지 않았다. 짜르가 농노로 만든 이들을, 볼셰비키들은 국가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무섭게 성장하는 소련을 식민 제국들은 경계했으나, 루즈벨트만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경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 상품들을 많이 사 주는 ‘고객’을?
아마 기업가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몰로토프가 들고 온 주문서와 황금을 보면.
"그리고 유럽의 전쟁이 끝난다면... 식민지들을 자유로운 나라로, 주민들이 사랑하고, 자기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을 기꺼워 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할 것일세. 그들이 폐허에서 자기 나라를 재건하는 동안, 우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두뇌를 가르치고, 필요로 하는 공장과 시설을 만들어 팔고, 또 온갖 것들을 팔 수 있을 것일세."
사실 이것이 요점이었다. 식민지인들이 더 잘 살게 된다면, 더 좋은 시장이 된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사람들이 일하려는 의욕조차 없는 나라는 전혀 쓸모가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 한다면? 좋은 시장이 된다.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 같은 식민 제국들은 이 시장을 독점하고, 쓸모 없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자기네들의 국력을 이용해 이런 짓을 정당화해 왔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이걸 더 이상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을 경멸해 왔을 지언정, 그들의 기업가 정신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기업가 정신은 미국을 건설한 기본 사상이었고, 상품을 파는 것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좋았다.
파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 미국은 늙은 처칠처럼 총칼이나 함포로 파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사랑하게 만들어 팔고자 했다.
의회의 뚱보들은 이런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총칼을 만들어 팔고, 식민지를 쥐어짜 약탈하는 '간단한' 방식을 너무나 사랑했다. 일부 자본가들이나 은행가들은 막대한 빚을 지워 여러 이권을 뜯어내는 것 역시 좋아했지만 아무튼.
아메리카 대륙 내부-중남미의 일부 지역-를 아직 완전하게 손아귀 안에 쥐지 못했기에 대서양 저편의 간섭을 배제하는 먼로 독트린을 내세웠을 뿐 기회만 된다면 세계 만방에 손을 뻗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들 다를 것이 없었다.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군. 소련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가급적 다 보내 주도록 하게. 의회의 멍청한 뚱땡이들, 특히 그 태프트 놈을 설득하는 것은 내가 맡아서 하도록 하지. 조지, 자네는... 아니 그나저나 그 콧수염은 뭔가?"
마셜이 멋쩍게 웃었다. 항상 깔끔하게 면도를 하다가 며칠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콧수염을 대통령이 이렇게 지적할 줄이야.
"아... 이 콧수염은.. 크흠.. 제 '친구' 가 콧수염을 기르길래 말입니다."
"그런가? 허허, 자네한테도 친구가 있었구만 그래. 보기 좋구만. 아무튼 자네에게 내 의중은 이야기 했으니.. 고생하게."
"예 각하!"
까끌까끌하게 수염이 자라기 시작하는 코 밑을 그는 한번 문질러 보았다. 언제쯤 다시 만나볼 수 있으려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