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화
후... 한숨을 내쉬는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미국의 국회는 대소 지원에 생각 이상으로 적대적이었다. 영국에는 이미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주고 있었지만 소련에까지? 이것은 미국 국회를 설득하는데 꽤나 장애 요인이 되었다. 영국인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함께 싸운 동지들이었고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볼셰비키 당이 정권을 획득한 이후 소련은 독일과의 싸움에서 혼자 '배신' 을 하고 도망쳐 버렸다. 아무리 국내적 혼란이 있었다 해도 협상국들이 배신자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중부 유럽의 아수라장에 끼어 영국-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으려 하다가도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등,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박쥐같은 행보를 보였다. 폴란드를 갈라먹은 것 역시 폴란드 땅이 소련에 붙어 있는 한 원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것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자위적 차원의 행동이었다고 한들 남들이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 리는 없었다. 몰로토프, 그 자신이 리벤트로프와 손잡고 나치 파쇼놈들의 프랑스 침공을 방조한 만큼 이번에도 무슨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것이 뻔했다.
아니, 사실은 받고 있었다. 미 국무성의 관료들은 그에게 '미국인스러운' 직설적인 질문들을 던져 댔다.
"이 지원을 우리가 어떻게 돌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내준 지원들이 우리를 향해 총구를 돌리는데 쓰이지 않으라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몰로토프는, 그들을 설득해야 했다. 소련의 드넓은 영토에는 풍부한 자원이 잠자고 있다. 미국이 필요로 할 자원들-석유, 가스, 철과 희귀 광물들-이 끝없이 묻혀 있으며 우리는 이 어머니 조국이 아낌없이 주는 선물들을 '친구' 인 미국과 얼마든지 나눠 가질 의사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도 자원은 얼마든지 있소만, 하고 코웃음치는 고위 관료 하나를 그는 애써 무시해야만 했다. 외교관의 자질이란 그런 것이었다.
어쨌든 소련에겐 금이 있었다. 금 앞에서는 냉소적으로 비웃던 국무성의 관료들이 조금 조용해졌다.
금, 은, 백금. 소련 재무부의 금고 바닥에 있는 금괴 하나까지 박박 긁어내라는 서기장의 서슬퍼런 명령과 그렇게 확보한 액수를 몰로토프는 고위 외교관다운 꼼꼼함과 섬세함으로 일의 자리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금이 필요했다. 막대하게 팽창하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화폐가 필요했고, 화폐를 찍어내기 위해서 이들은 황금이 필요했다. 더, 더 많은 황금이
몰로토프는 버릇처럼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사실상 소련의 2인자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안경테는 흔한 구리로 되어 있었다. 아, 이제 전쟁이 터져 그닥 '흔하다' 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미국은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서... 금이 많이 필요하지요. 소련은 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온 서류에는 소련 재무성이 '일차적으로' 확보한 금의 내역이 적혀 있습니다."
그가 동반한 비서진들은 몇 가지 서류뭉치들을 미국 실무진들에게 전달했다.서류를 황급히 뒤져보는 국무성과 재무성의 관료들은 액수를 보며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했고, 그렇게 놀라움을 표현하는 동료의 옆구리를 콱 찌르며 주의를 주기도 했다.
여기는 외교의 전쟁터였고, 자기 카드를 쉬이 펼쳐 보이는 자는 물어뜯기게 마련.
"미국이 세계 대공황 시절에 겪은 어려움은 우리 소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 도와주지 못한 것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상황이 그닥 좋지 못했으니... 사실 지금도 그닥 좋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하하하하!"
몇몇은 몰로토프의 블랙 유머에 웃었다. 남의 땅에서 일어나는 정확한 전황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닥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서유럽 최강의 육군대국인 프랑스는 단 6주 만에 독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라면..?
"전쟁이 끝나고, 공황이 왔을 때-지금은 여러분의 대통령의 놀라운 지도력으로 극복해 냈지만-여러분들에게는 금이 부족했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시장에는 돈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굶어야 했습니다. 지금 전쟁 이후에도 그럴지도 모르지요. 소련은 미국인 여러분들과의 공정한 거래를 위해 황금을 아낌없이 쓸 의향이 있습니다."
몇몇은 그가 제시하는 주장에 끄덕이기도 했다. 황금, 황금은 항상 옳았다. 지난 대전에도 미국은 전쟁에 끼어 막대한 이득을 보고, 또 패권국의 일원으로 성장한 바 있었다. 공황에 혹독하게 시달린 이후로도 그때의 단맛이 기억날 정도로.
"우리는 그리고.. 땅에 그다지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 많은 늙은 처칠 씨와는 달리 말이지요?"
진짜 욕심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몰로토프는 아무튼 그렇게 주장했다. 폴란드를 갈라 먹지 않았습니까? 라고 눈치 없이 물을 사람은 없었다. 폴란드의 자주독립이 미국인들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었을 리 있겠는가?
"처칠 씨는 지중해를 자기 손 안에 쥐고 있기를 원합니다. 아프리카 식민지도, 영국 왕실의 진주라는 인도 역시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독일 파시스트들의 도전을 이겨낸 후에도 그는 막대한 돈을 써야 할 것입니다! 파시스트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인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그의 연설을 점점 더 집중해 듣기 시작했다. 다른 채무자가 빚을 갚을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빚을 더 지려 할지 예측하는 것은 빚쟁이의 중요한 자질이나 다름 없었다.
"영국인들이 여러분들에게 돈을 갚을 수 있을 지, 없을 지에 대해서는 제가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소련 외무성은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군함들이 침몰했고, 비행기들은 영국 해협 아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식민지의 민중들은 패배한 종주국에 결코 호락호락 굴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호락호락 굴복한다면, 소련이 그렇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겠지. 몰로토프는 그 뒤의 말까지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분명 세계 혁명과 군사적 승리를 통한 혁명의 수출을 외치는 트로츠키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스탈린을 훨씬 선호했지.
레닌이 반전 구호를 이끌어 볼셰비키를 러시아의 집권당으로 만든 것처럼, 스탈린은 전쟁 대신 외교와 협상-항상 '고운말' 이 오가지는 않았지만-을 병행하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외교 전문가로서 그는 스탈린 쪽이 더 체질에 맞았다.
물론 피억압 민족의 해방은 또 다른 문제였다. 붉은 군대를 세계 만방에 보내어 혁.명. 이 두 글자를 압제자들의 뒤통수에 박아 주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피억압 민족들이 스스로 압제자들을 이기고자 떨쳐 일어나는 것은 얼마든지 도와야 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처칠 씨는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는 대로 식민지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도 미국은 뚱뚱보 제국주의자 처칠 씨가 벌리는 포동포동한 손에 구축함들을 가득 채워 줄 것입니까? 미국은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최소한 그들이 되돌려줄 황금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쪽에 제 콧수염을 걸어보겠습니다. 하하"
"그게 우리가 소련을 도와야 할 이유는 아니오, 외무장관. 개인적으로 당신의 콧수염은 탐나지만."
그동안 조용히 회담장을 바라보던 꺽다리 하나가 까마귀같이 까악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몰로토프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소련 정보부는 미국과의 회담에서 어떻게든 이득을 더 보기 위해 미국 고위직들에 대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넘겨주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 사람이었다.
"아, 참모총장. 그렇다면 우리 소련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다뤄보지요."
이 자는 분명 관료였다. 정보부의 보고서는 그가 어떻게 미국군을 무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감탄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20만 명도 안 되는 군대에서 최종적으로 열 배는 더 거대한 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훈련 받아본 적도 없는 이들을 숙련된 병사로 만들기 위해선 엄청난 품이 들어간다. 800만 개의 충치를 빼고 50만 대의 차량을 생산하는 작업은 그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회담장은 외교 무대였고, 몰로토프 그는 외교관이었다. 성마르게 생긴 것과는 달리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줄 줄 아는 상대라면? 외교관이 춤추기에는 최적의 무대.
탁월한 관료이자 관료집단의 통솔자인 서기장이 엄선하여 가져다 준 정보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없었고.
몰로토프가 제시하는 카드는 심히 다양하고, 또 매력적이었다. 루즈벨트는 해외에 미국의 영향력과 가치를 투사하고자 했다. 마셜은 루즈벨트의 최측근으로서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처칠은 그런 루즈벨트의 세계안 속에서 구시대의 유산이었다. 어쩌면 적일 지도 모르고.
지금은 최대의 적인 독일을 상대하는데 지원해주고는 있지만 다음 전쟁의 상대는 그들이 될 수도 있었다. 불과 15년 전의 미국은 영국과 그 식민지들을 상대로 치르는 전쟁을 기획하기도 하였고.
아무튼 소련은 지금 충분히 매력적인 카드를 제시하고 있었다. 숫자를 사랑하는 마셜 같은 관료가 제일 좋아하는 방식으로. 중동과 극동의 석유, 시베리아 동토의 광산 매장량 같은 자료들은 그가 접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독일이라는 거대한 적을 물리치고 무주공산이 된 프랑스부터 발트까지의 유럽을 미/영/소의 영향력권 안에서 분할하는 방식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마셜에게 백일몽을 꾸게 할 정도였다.
미국은 대륙이었다. 그러나 섬이기도 했다. 저기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건너 구대륙에 영향력을 투사하려면 분명히 파트너가 필요했다.
제 손에 모든 걸 쥐고 내려놓지 않으려는 욕심쟁이 제국주의자 처칠은 아주 좋은 파트너는 아니었다. 또 다시 공황이 불어닥친다면 그는 인도와 이집트, 그리고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뼛속까지 쥐어짜고 미국에게도 배를 째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랬다시피, ‘빨갱이들’ 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대화 파트너로 올라온 소련은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제시하는 그림 속에서, 소련은 동유럽과 극동에 완충지대를 원할 뿐이었다. 그것도 민족주의라는 정당성을 가진.
슬라브인들이 사는 폴란드와 발트, 발칸은 소련이 완충지대로 요구할 만 했다. 독일의 분할과 비무장화도 충분히 납득할 만 했다.
중국? 극동은 어차피 거대한 태평양이 있고 일본과 중화민국이 다투고 있었다. 그 둘, 혹은 하나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완충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바로 앞에서 국경선을 두고 싸워야 할 소련보다는 바다 건너, 타협 가능한 미국이 중화민국이든 일본이든 더 좋은 파트너일테니.
몰로토프의 제안을 들은 국무성과 재무성, 국방성의 관료들은 어느 정도 납득한 듯 했다.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다 다들 결국 마셜에게 눈이 돌아갔다.
"외무장관께서 제시하는 안에 대해서는 아주 잘 들었소이다.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기도 했소이다."
"감사합니다. 과찬이시로군요. 저는 참모총장의 관료적 역량에 대해서 감탄할 뿐입니다."
"나는 이 회담 내용을 대통령 각하께 보고하러 이만 퇴장해야 할 듯 하오. 다음 기회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하오."
마셜은 휙 일어서 오른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몰로토프는 영어를 그다지 잘 하지 못했고, 통역사의 입을 빌려 마셜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마셜의 눈이 반짝이고, 입가는 단단히 맞물린 채로 호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몰로토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영광입니다. 고맙습니다."
외교관의 직감으로 그는 알 수 있었다. 성공이다.
루즈벨트는 미국인들 중에서 소련을 아주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이제 대통령의 결단이 남았는데 그가 부정적이라면 모를까 충분히 좋은 결과를 거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서기장이 비밀스레 전해 준, 최중요 목표도 쉽게 달성했다. 실무진들은 마치 그 중요성을 모르는 것처럼 그가 한 제안에 선선히 납득했다. 사실 그 스스로도, 왜 중요한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서기장이 요구한 것이니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