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감히... 저희가 어떻게 서기장 동지의 의중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따를 뿐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있었다.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지 손가락이 몇 개 부족한 손을 덜덜 떨며 한쪽 눈을 찡그리듯 감은 그는 비굴해보일 정도로 '내' 게 굽실대었다.
로코솝스키, 소련군의 최고 명장 중 하나이자 육신의 조국과 신념의 조국이 둘 다 버린 비운의 인물. 폴란드계로 태어나 러시아와 소련 체제에 끝없는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를 수용소에 쳐박고 확인되지도 않은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조국에 위난이 닥친 이후 풀어주고 중용하기는 했으나 그 후엔 그가 폴란드계라며 폴란드의 군정장관으로 보냈고, 폴란드인들이 그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번도 스스로를 폴란드계라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모두가 그를 폴란드계라고 생각했다. 로코솝스키를 증오했던 폴란드인들마저도.
이미 저지른 짓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저 그를 최대한 빨리 수용소에서 빼오는 수 밖에.
로코솝스키는 최소 야전군 사령관 급이었다. 적백내전이나 소-폴 전쟁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면 빈약한 소련군 고위 지도부를 대체해 전선군 사령관이나 아예 총참모장으로까지 기용할 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그의 충성심이 의심이 갔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문을 당하던 사람이 과연 체제에 대해서 일말의 증오나 복수심마저 품지 않고 있을까?
'스탈린'이 자꾸 혀를 쯧쯧 차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제대로 한번 뒤통수를 맞을 것이라며.
아무튼 스타브카는 그를 다시 군부에 복귀시키는 데 찬성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군단장, 모스크바 방어전에서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기용했지만 일단 지휘관 보직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로코솝스키에게는 정확히 규정된 것은 아니나 부부참모장 정도의 지위를 주고 북부전구의 두 전선군-코네프의 북부(=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바투틴의 북서전선군-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기고자 했다.
그렇기에 로코솝스키는 내 집무실에 와서 두 전선군에서 올라온 보고들을 요약하고, 내 지시를 받아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앉아서 보고해도 좋네. 필요하다면 특별한 의자를 만들어 주지."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특별한 의자' 라고 하면 어쩐지 고문도구같이 들리기도 하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휠체어를 의도한 것이었다. 발가락이 뭉개져서 특수 제작된 장화까지 신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면 휠체어가 더 편할 수도 있겠지.
실제 역사에서, 이 시점 이후 소련군의 전선군들은 몇 개가 더해진다.
북부전구에는 레닌그라드/북서전선군에 더하여 핀란드 방면을 책임지는 카렐리야 전선군, 그리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해방하는 임무를 맡은 볼호프 전선군. 중부와 남부에는 계속 이름이 바뀌기는 하지만 칼리닌 전선군, 크림 전선군 등등...
주코프와 코네프 두 라이벌의 앙숙 관계를 활용하여 경쟁시키기 위해서는 둘을 비슷한 급으로 올려야 하는 만큼, 코네프에게는 북부전구 사령관을 맡길 생각이고 전선군 사령관 자리는 늘어나는 만큼 몇 명을 더 승진시켜서 보임시켜야 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당연히 명장 로코솝스키다. 얼른 북부전구의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해야지.
이런 행정적인 보고들은 끔찍하게 노잼인데 비해, 내가 찍어둔 몇몇 지휘관들의 전투 보고서는 그야말로 일대 활극 같았다.
내가 알고 있던 소련군의 명장들, 특히 훗날 소련 원수나 그에 준하는 최고위급까지 진급하는 지휘관들은 경력에 따라 콕 찝어서 격전지가 될 곳의 전투부대 지휘관, 사단장부터 야전군 사령관에 보냈다. 로코솝스키만은 아직 후유증이 덜 치료되었을테니-그리고 아직 완벽하게 믿지 못할 것 같아-참모부로 불러둔 것이지만...
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활약할-여기에선 남부전구가 그렇게 밀릴 것 같지 않으니 오히려 키예프 전투가 될 것 같은데-말리놉스키, 톨부힌 같은 장군들은 주코프의 지휘 하에 반격 작전의 창끝 역할을 수행하도록 언질을 주었다. 새로 편성될 충격군의 사령관은 이들 두 장군이 될 것이다.
이반 바그랴만, 바실리 추이코프, 이반 체르냐홉스키같이 아직 계급이 충분히 높지 않은 이들에게는 군단장이나 사단장, 격전지의 최 선봉을 맡아 전공을 세워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두었다. 그리고 이들의 보고서는 내가 열심히 읽어 보는 만큼 각급 지휘관들이 더더욱 배려해 줄 것이다. 자기들이 뭐라고, 서기장이 찍어 놓은 이들을 뒤로 물려?
올라온 보고서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단연코 파벨 로트미스트로프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군이긴 하지만 파벨 로트미스트로프는 전후 소련 원수까지 올라간 최고위급 군인 중 하나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북서전선군 휘하 기계화 군단의 참모장으로 있었고 진급을 거듭해서 쿠르스크 전투의 프로호프카 대 전차전에서 5근위전차군의 사령관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다.
쿠르스크의 남부에서 만슈타인의 창끝을 상대로 혈전을 펼치며 돌출부의 절단을 막아낸 것이 바로 로트미스트로프다. 그가 이끄는 5근위전차군 앞에는 기라성 같은 네임드 부대들이 포진해 있었다. 무장친위대 1사단 LSSAH, 2사단 다스 라이히, 3사단 토텐코프와 국방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까지, 나치 독일이 긁어 모아 투입한 최정예를 상대로 필사적인 분투를 펼쳐 결국 승리한 것이다!
그 와중에, 야전군 사령관씩이나 되어 직접 전차에 타고 돌격해 '육박전'으로 적 전차를 파괴한 이력까지 있었다.
"여기가 무슨 삼국지... 크흠, 아무것도 아니네."
지금 분명히 2차 대전 시대 아닌가? 장군들끼리 일기토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삼국지를 쓰고 있었다. 교차검증을 통해서 올라오는 보고서에도 분명히 '로트미스트로프 소장, 카베 전차를 타고 돌격해 적 전차 2대 파괴' 라고 적혀 있었다...
생긴 건 얌전한 샌님처럼 생겼는데, 싸움에만 들어가면 광전사가 된다던가?
"돌격! 돌겨어어억!!! *미 뒤진 파쇼들의 대가리를 따 버려라!!"
전차병은 그야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해치를 열고 권총을 하늘에 빵야빵야 쏘아대며 우렁차게 돌격을 외치는 저 사람은 바로 사단장이었다. 우리 사단장.
파시스트 군대의 탱크로는 아군의 카베 전차(KV-1)를 격파할 수 없다지만 기관총이든 대전차포든 사람을 갈아버릴 수 있는 건 똑같은데 장군은 기관총을 잡고 파쇼 군대의 참호에 총질을 하고 있었다.
"11시 대전차포! 대갈통에 고폭탄 갈겨! 흐하하하핫! "
"예! 각하!"
로트미스트로프는 스타브카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아마 이 정도의 또라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만 했다만... 아무튼 북서전선군의 바투틴은 흔쾌히 전선군의 기갑 전력을 싹싹 긁어모아 5기갑사단에 몰아 주었다.
진짜 '전차' 라고 할 수 있는 카베 전차와 T-34 전차 대부분이 로트미스트로프가 이끄는 5기갑사단에 편제되었다. 남은 기갑부대들은 해체되거나 여단급으로 감편되었고, 그나마도 전차라 부르기 민망한 탱켓들만 수십 대씩 남아 있었다.
5기갑사단은 북서전선군의 가장 강력한 주먹이 되었다. 남은 경전차와 어중이떠중이들은 사실 공세 수단이라 일컬을 수도 없으니 유일한 주먹이라 해도 되겠다. 이 주먹을 휘두르는 로트미스트로프는 공세의 최 선두에서 직접 기관총을 난사하며 돌격을 이끌었다.
물론 광전사같다 하여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 법. 그는 전투 개시 이전 세워둔 작전계획과 지형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프스코프에서 30km 가량 동쪽까지는 기갑부대의 기동이 어려운 습지대가 뻗어 있었다. 도시와 습지가 천연의 방어선으로 기능하는 바 파시스트 군대의 기동은 이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적의 목표는 레닌그라드로의 신속한 진출. 프스코프에서 인력과 시간을 소모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투틴 대장은 저들의 공세를 이렇게 예측했다. 독일 북부집단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련 산업의 중심지이자 혁명의 시발점, 레닌그라드를 짓밟는 것이었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철도 교차점이란 걸 빼면 의미도 없는 프스코프가 아니라.
이 방어선에 소중한 인명을 바쳐 가며 소련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것은 독일로서는 패착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저들은 도시와 습지를 우회해 아군의 후방으로 돌아 포위섬멸을 시도할 것이다. 이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은..."
프스코프에서 동쪽으로는 습지. 그 이후 잠깐 평야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조금만 동쪽으로 가도 구릉과 삼림으로 기갑부대의 기동이 어려울 뿐더러 아직 소련군이 장악한 지역이다. 습지와 구릉 사이 좁은 회랑으로 독일 기갑부대는 신속히 진격하여 프스코프의 후방을 노릴 것이리라-바투틴은 그렇게 예측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바로 그 회랑에서 적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북부집단군의 창끝, 4기갑집단 예하의 56차량화군단. 로트미스트로프는 몰랐으나 그의 상대는 전격전과 낫질 작전의 설계자이자 명장으로 그 이름이 드높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물론 로트미스트로프에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포격 때려! 아군 오폭같은건 신경쓰지 마라!"
쾅! 콰쾅! 소련군의 자랑인 152mm 중곡사포가 무전 명령에 따라 일제히 포화를 뿜었다. 작전 자체는 간단했다.
습지와 구릉 사이 회랑의 출구 양편에 두 개 제대로 나눈 전차부대를 매복시킨 채 저들이 회랑을 통과하기를 기다린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좌우에서 쏟아지는 포화에 붙들려 있을 때, 사단 포병연대와 제 3의 전차대를 동원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강타한다!
독일은 전차 생산량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모험적인 외교적 작전 끝에 너무 일찍 개전해버린 나치 독일은 예상했던 만큼의 장비를 각 사단에 들려줄 수 없었다. 조공부대인 북부집단군이라면 더더욱. 56차량화군단에는 4개 사단이 있었으나 그 중 기갑사단은 단 하나뿐이었다.
기갑사단이라 하여도 대부분이 2호, 3호 전차고 본격적인 주력전차라 할 만한 4호 전차는 끽해야 수십 대 수준밖에 없었다.
"니미!"
깡! 카베 전차의 철갑에 4호 전차의 전차포탄이 맞았다가 튕겨나갔다.
불꽃과 섬광이 튀었으나 로트미스트로프는 욕설을 내뱉었다가 다시 광소를 터트렸다.
"더러운 파쇼 새끼들! *구멍을 찢어 버려! 발사!"
"예! 발사!"
카베 전차를 맞추고 좋아하던 4호 전차의 승무원은 탈출하지 못했다. 76.2mm 전차포는 4호 전차를 관통했다. 탄약이 유폭되었는지, 쿵 하는 묵직한 폭음과 함께 포탑이 터져나왔다. 격파!
독일군의 '상냥한 도어 노커' 인 PaK 36으론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적어도 사단 포병대나 군단 직할로 굴리는 15cm 중포나 그 유명한 8,8cm 대공포를 가져와서 쏴갈겨야 미친 곰처럼 날뛰는 중전차들을 멈춰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곡사포들은 소련 전차를 때리고 있을 새가 없었다. 소련 포병들은 집요하게 독일군 중곡사포들을 노려 대포병사격을 퍼부었고, 독일 곡사포들 역시 이들에 대응해야 했다. 포병은 전장의 신이지만, 신들께서는 자기네들의 일에 바빠서 하찮은 일들에는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오랜 농담처럼.
독일군 병사들은 소련의 무기 발전사를 온 몸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56차량화군단은 성난 곰 세 마리에게 습격당한 양떼들처럼 우왕좌왕하며 한 마리씩 사냥당하고 있었다. 그저 쉽게 지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곳에서 의외의 복병과 마주친 독일군은 소련군이 때리는 대로 얻어맞고 있었다.
"저, 저!"
"크하하핫! 이거나 쳐먹어라 *년들아!"
이가 강철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사단장은 수류탄의 핀을 이로 꽉 깨물어 뽑았다. 팔 힘도 좋으셔라, 휙 하고 날아간 수류탄에 육박해오던 적 보병 몇 명이 나가떨어졌다. 네 개 사단 중 1개가 기갑사단이니 남은 3개는 보병사단. 차량화가 되어 있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보병이었다.
보병들은 어찌할 줄 몰라하면서도 파괴된 전차의 그림자에 숨어 총질을 해 댔다. 몸을 훤히 바깥으로 내놓은 로트미스트로프 같은 사람을 최우선으로 하여.
무슨 신의 가호라도 받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는 신을 인정하지 않으니 서기장의 가호라도 받은 것인가? 총알은 그를 맞추지 못했다. 안경이 부서지고 파편에 긁힌 뺨에서 피가 흘러도 로트미스트로프는 아랑곳 않았다.
"소비에트 우라! 우라! 저 *새끼들의 머리통을 날려 버려!"
"우라아아아!!"
소련 전차병들은 열광적으로 환성을 터트렸다. 독일군은 그동안 제대로 된 저항에 맞닥뜨려보지도 못했으나, 신들린 듯 우월한 장비의 체급을 믿고 육박전을 걸어오는 소련군에게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