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6화
휘릭 휘릭 끼요오오옷! 끼하핫!
이 얼마만에 마음껏 말을 타고 질주하는 길인가? 10년? 20년?
1910년대 후반, 적백 내전 당시 그는 붉은 군대의 기병군을 조직한 공으로 30대의 나이에 일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말과 함께 전장을 질주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때에도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자 했으나 모두가 그를 만류했다. 강건한 심장은 고동치고 뿜어져 나오는 피는 여전히 붉었지만 그가 처한 위치가 그를 달리지 못하게 했다.
말갈기가 휘날린다. 동으로 장식된 가죽 고삐가 보인다. 세월과 함께 허벅지에 내려앉은 지방질 사이로 오랫동안 잠자던 근육들이 기지개를 펴고 이제야, 이제서야 불렀느냐고 떨리기 시작했다.
"우라! 우라!!! 붉은 군대 만세!"
부됸늬는 수천 기, 수만 기의 기병의 선두에 서서 내달음질쳤다. 그의 뒤를 따르는 용맹한 붉은 군대의 용사들이 함성에 응답하며 환호했다.
살아 있음에 행복하라!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 위에서 질주할때, 그는 행복했다. 소비에트 연방 원수이자 인민 영웅 부됸늬의 질주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부됸늬가 입안한 작전은 그에 대한 편견을 일부 없애 버릴정도로 괜찮았다. 요체는 중부집단군의 스몰렌스크 진군을 늦추기 위해 보급로를 짤라먹는 것이다. 아직 살아있는 프리퍄티 습지의 철도망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수송 용량을 덜 잡아먹는 기병을 기동부대로 투입해 철도 교차점을 타격한다. 잘만 한다면 쌓여 있는 독일군의 보급품을 홀라당 날려줄 수도 있고 민스크에 고립된 채로 도시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부대들을 지원할 수 있다!
이렇게 중부집단군의 배후를 한번 후려갈기면서, 지토미르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는 1기갑집단의 측면 역시 사정거리 안에 넣을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전면에 가해지고 있는 적의 압박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압해줄 수 있는 수인 것이다.
스타브카의 최고회의에서 이 작전을 승인했을 때 부됸늬는 마치 날아오를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핏속에는 말에 대한 일종의 사랑이 숨쉬는 듯 했다. 더 늙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말을 타고 전장을 내달리며 싸움의 공기를 숨쉬고 싶은 전사의 피가 그의 심장 속에 흐르고 있었다. 내일 모레면 예순에 손주까지 있는 노인네가 전장에 그토록이나 서고 싶어한다니. '나' 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스탈린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스타브카의 그 누구도 결코 그를 진실되게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20세기, 물질문명과 근대성의 상징이자 강철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도시를 지배하는 볼셰비키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됸늬는 오랫동안 우리의 동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초원과 들판의 인간이었으며 몇십 년의 세월 속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전장의 낭만을 믿어서일까?
덜컹거리는 철마에 올라타는 부됸늬를 뭇 장군들과 배웅했다. 모스크바 중앙역의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자 수많은 병사들이 내게 경례를 바쳤다. 그리고 부됸늬는 그들 사이에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승리해서 돌아오시오!"
"예! 서기장 각하!"
우렁찬 목소리로 출발을 알리자 열차는 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묘한 감회가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그동안 클릭으로, 몇 번의 키보드 두들김으로 나는 수많은 게임 속 병력들을 전장으로 보냈고 발생하는 사망자 숫자에 대해 별 감흥없이 바라봐 왔다. 우리가 스타크래프트 하템의 킬수를 보며 유닛 하나하나의 삶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듯 그저 숫자로만 바라봐 왔지만... 저들에게도 삶과 뜻과 희망과 인생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전설적인 혁명가들의 얼굴을 직접 보겠냐며 차창에 다닥다닥 붙어 손을 흔드는 이들,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는 병사들. 아비를 전장으로 보내는 아이들과 남편을 떠나보내는 여인들.
모스크바 중앙역은 그런 이들로 북적거렸다.
부됸늬라는 야생마가 들판을 달리며 한 편의 낭만적인 서사시를 써 내려가는 뒤에서도 '나'의 행정 업무는 계속되어야 했다. 아직 핵심 대도시들-키예프, 레닌그라드, 하르코프-의 공장들을 소개시킬 필요는 없다고 스타브카는 판단내렸다. 실제 역사였다면 방어선이 쭉쭉 밀리며 공장을 뜯어내기도 전에 독일군에게 짓밟혔겠지만 아직은 꽤나 여유가 있었다.
북부에선 프스코프가 탱킹을 하는 동안 레닌그라드의 KV-1 공장은 쌩쌩 돌아가며 독일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중전차를 찍어냈다. 이렇게 찍혀 나온 KV-1은 중부의 최중요 방어선인 스몰렌스크와 주코프의 남부전구 반격작전이 기획되고 있는 오데사와 키예프로 보내져 배치되었다. 북서전선군이 가지고 있는 중전차들을 아득바득 긁어내어 반격작전에 차출하는 동안 남부는 소규모 교전만을 거듭하며 독일군을 지연시키고, 강력한 한 방을 준비했다.
프리퍄티 습지로 진입한 1근위기병군 휘하 12개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경전차 전력들은 실험적으로 새로 편제된 기계화사단으로 재편되었다. 이 전력은 개전 이후 하르코프에서 필사적으로 생산된 T-34 200여대와 함께 묶어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군 휘하로 보내졌다. 이 기동전력을 창끝 삼아 키르포노스는 1기갑집단의 신장된 옆구리를 찔러줄 것이다.
이런 작업들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요약해서야 이 정도이지 실제 생산 관리에서는?
"이봐! 9호 야포공장의 생산수량이 안 맞잖아!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거야?"
"9호 야포공장의 강선 드릴 라인이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첼라빈스크 트랙터공장은 대체..."
"키로프 설계국은 설계도에 뭘 한거야!"
스탈린의 업무 스타일은 간단했다. 전권을 틀어쥐고 세세한 사항까지 감독하는 것. 부패와 비효율, 패거리 정신과 대충대충 윗선만 속여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방 관료들의 목을 화려하게 날려버리고 절대 권력자로 등극한 스탈린은 오랜 지병인 의심병에 항상 시달렸다. 그렇기에 드넓은 소련 영토의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조리 스탈린의 몸에 들어와버린 '내' 게 올라왔고, 나는 부산히 떠들며 전쟁물자의 생산을 감독하는 참모부들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려야 했다.
"정밀공작기계의 부족에 대해서는 중립국들에게 긴급 구매의사를 타진하게. 지금 금 몇 킬로그램따위가 중요한가?"
"첼라빈스크 공장에서 인력이 부족하다면 그 쪽의 숙련공들에게는 징집 면제 처분을 내리도록. 지금 우리가 숙련공들을 빼내면 그들을 알보병처럼 소모해버리겠다는 건가?"
"남러시아 캅카스 군구의 중야포를 수송해서... 후... 필요한 열차는 내 직권으로 차출해! 이건 명령이네!"
뭣빠지게 일하는 우리 총사령부와 참모본부의 행정요원들은 죽어나고 있었다. 최고 지도자라는 명목 하에 모범을 보인답시고 서지도 않는 그것이 빠지도록 일한, 60대에 술 담배에 찌든 나는? 개전 2주만에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버렸다.
"으...으어어어어억.."
6월이라고 해도 모스크바의 밤공기는 생각보다 쌀쌀했다. 직사광으로 비치던 햇빛 때문에 좀 시원하게 있어 보겠다고 집무실 창문을 쫙 열어놓고 새벽녘까지 일하다 잠들어 버린 나는 열이 펄펄 끓으며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크고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가정식 보르시치..-사실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를 먹으며 요양하고 싶었지만 전시 최고지도자의 직무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내' 수석 비서 알렉산드르 포스크레비셰프가 침대 옆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앉아 내 지시를 직접 수령하여 문서를 작성했고 나는 몽롱하니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붙잡고 사안을 이해하고 행정업무를 굴려야 했다.
"서기장 동지, 약 드실 시간입니다."
"어, 어! 그래... 약, 약 먹어야지... 자네는 좀 나가서 쉬다 오게. 담배도 한 대 피우다 오고."
내 서랍에 들어 있던 고오급 시가 한 대를 벌벌 떨리는 손으로 빼서 포스크레비셰프에게 턱 하니 넘겨 주고 멈칫거리면서 남아 있는 오늘치 행정 문서들에 눈길을 주는 그를 밀어서 내보냈다. 왜냐고? 알면서 그래.
크렘린 궁의 내 전담 의무실에는 나를 담당하는 여러 주치의들이 있었다. 이 시대의 의학 수준을 보면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 주치의들이 한 가지는 잘 한 것이 있었다. 바로 간호사를 예쁜 사람으로 뽑은 것..!
상당히 흉부가 갑갑해보이는 흰 간호사 제복에, 이 시대 기준으로 하면 충격적으로 짧은-물론 소련은 이미 콜론타이 여사가 '한 잔의 물' 이론을 주장할 정도로 동시대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서 개방적이기는 했지만-꽉 끼는 치마에 풍만한 둔부를 좌우로 흔들며 그녀가 들어왔다. 몸은 산전수전 다 겪은 60대라도 알맹이는 팔팔한 20대 청년인 것! 히틀러 당신은 틀렸어... 게르만 여자보다 슬라브 여자가 훨씬 예쁘다! 죽어 있던 나의 그것에도 어쩐지 움찔움찔 반응이 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약그릇이 올려져 있었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간호사는 내가 약의 쓴 맛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는지 애교섞인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어머, 서기장 동지도.. 약이 쓸까봐 긴장이 되셨나요? 달콤한 간식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호호"
그래... 달콤할 것 같다... 어우야...
"엇... 어엇!"
크흠, 절대 고의는 아니지만 약 그릇을 엎어 버렸네? 뜨끈하고 끈적한 액체가 다량으로 그녀의 옷 앞섶과 이불에 튀어 버렸다. 아니 이거 닦아 줘야 하잖아! 침을 꿀꺽 삼킨 것 같다면 그것은 당신의 반동적인 착각이다. 혁명적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최고 지도자도 이렇게 자상하게 부하의 실수를 수습해주곤 하는 것이다.
"이리 와 보게, 내가 닦아 줄테니."
내가 손짓하자, 그녀는 당황한 듯이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떨었다. 크흐흐... 그런 모습도 귀여운데..?
이불섶을 들어 거대하게 움찔거리는 흉부에 가까이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사슴같이 갸냘프고 흰 목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 같았지만 아마 눈의 착각일 것이다. 암, 착각이고 말고. 이건 어디까지나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른 하급자를 배려하는 이상적인 상사의 모습일 뿐이라고? 최고권력자인 서기장의 건강을 이렇게나 해치려 한 사악한 간호사를, 자애로운 서기장이 배려해주는 것인ㄷ...
그런데 갑자기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가? 숨이 가빠 왔다. 아... 아 안돼...!
몇 시간 후, 나는 주치의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깨어났다. 수석 주치의에 따르면 과도한 교감신경의 항진으로 일시적 혼절을 했다며 앞으로 격무와 감정적인 흥분을 자제해주십사, 그는 점잖게 나에게 권고했다.
정녕... 안되는 것인가?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