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사실, '내' 관점에서 히틀러는 아예 멍청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히틀러가 내린 전략적 선택들은 그가 처한 한계 내에서 꽤나 유용하고 합리적인-내적 합리성만을 가지고 외적 합리성은 많은 부분 결여하고 있었지만-것이었다. 2차 대전 관련 서적들에 파묻혀 살며 기존의 편견을 많이 갈아치우며 내린 '나'의 작은 결론은 그랬다.
예컨대, 41년 6월 소련을 공격한 것에 대해, 영국을 정리하지도 못했으면서 내린 희대의 병크로 생각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은 그 시점에서 결코 근시일 내에 정리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고, 영국의 전쟁 수행의지를 꺾으려면 대륙의 잠재적 아군인 소련을 분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소련은 계속해서 체급을 불려나가며 거대한 군대를 건설하고 있었다. 41년 6월 시점에 이미 탱크 1만 대와 항공기 1만 대를 가지고 있고, 막강한 요새선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그때 통수를 치지 않는다면 언제 칠 것인가? 42년? 43년?
히틀러는 1차대전의 참전 용사로 그 자신이 겪어 보았던 총력전 체제와 참호전을 극도로 혐오했다. 따라서 군비 증강 속도는 서쪽에서의 위협을 뼈 속 깊이 느끼던 소련보다 느릴 수 밖에 없고, 결국 최대한 빠른 개전만이 승리를 보장해준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역사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일련의 전략적 기습을 통해 소련의 군대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초 전선에 배치된 군대가 300만이었는데 12월까지 소련군의 인력 손실은 500만에 달했고, 탱크 2만대와 항공기 2만대를 파괴당했다. 가지고 있던 군대보다 훨씬 더 큰 규모가 파괴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다시 수백만을 동원해 전선을 틀어막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히틀러든, OKH(독일군 총사령부)든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과 의지를 과소평가하고 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히틀러와 OKH의 해법은 달랐다. OKH는 또 한번의 모스크바 공세를 통해 전쟁 수행의 의지를 꺾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반대로 남부 소련의 우크라이나 석권을 통해 전쟁 수행 능력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밀, 석탄, 그리고 코카서스의 유정지대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코카서스로 들어가는 관문 마개인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난 것이며, 상호간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 에서 나오는 상징성 때문에 싸움이 기괴하게 커진 것이다. 이후 전개는? 모두들 알지 않는가?
실제 역사에서는 그랬다. 부됸늬는 남부전구를 관할하며 스탈린의 비합리적인 현지사수 명령에 붙들려 우만에서 10만명, 키예프에서 60만 명을 잃어버렸고 드네프르라는 거대한 방어선을 상실했다. 이것은 중부에서 똥이 역류한 측면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은 다르다. 주코프와 키르포노스는 '내' 가 몰아준 병력과 장비들을 바탕으로 탄탄한 방어를 펼치고 있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드네프르 강이라는 천연의 방어선을 바탕으로 중부에서 자칫 역류할 수 있는 똥덩어리들을 막는 우산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이대로만 겨울이 오면 좋겠는데...
희망찬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푹신한 의자에 파묻혔다. 어우 씨... 내 알맹이는 20대인데, 몸뚱어리가 60대 노인네이다보니 뭐만 하면 피로감이 올라왔다. 아니, 소련의 서기장쯤 됐으면 러시아 누나들 몇 명 정도는 끼고!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다 해보고 싶었는데... 안 선다! 미친! 아니 여기서 일하는 타이피스트 누나의 그야말로 거-대한 흉부를 보는데 어째서 서지 않는 거지??
스탈린이 왜 그렇게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 숙청을 저지르고 했는지에 대해서 어쩐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의 나는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해줬어야 하는데 심리적으로는 너무 땡기는데 몸이 받쳐 주지를 못했다.
하... 비아그라라도 개발해야 하나? 실제 역사에서 비아그라는 90년대인가에 나왔다. 화학 합성 기술 자체는 없는게 아니므로 개념을 준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전쟁 수행에 도움도 안되는 그런 거나 만들라고 서기장이 명령을 내리는 것 자체가 트롤링일 수도 있지만, 서기장이 머리가 깨끗해야 전쟁 지도도 잘 할게 아닌가?! 암! 이런 약을 팔아서 국가 재정에 이바지할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수출 상품이 될 테니. 향후 소련이 원자재 판매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선진 화학산업에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후 사망자로 줄어든 인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출산율을 어떻게든 제고해야 할 것이다. 중년 이상들이 적극적으로.... 크흠
"서기장 동지! 서기장 동지!"
아니, 중년 이상이라고 했지만 저 콧수염 노인네를 의미한 것은 아닌데... 사진으로 볼 때도 위엄찼지만, 부됸늬의 콧수염은 실제로 보니 압도적인 풍성함을 자랑했다. 와씨, 한번만 만져 보고 싶다! '내' 몸에도 콧수염은 달려 있었고, 그냥저냥 풍성해 만지작거리기 꽤 괜찮았는데 저건... 저건 크고 아름답잖아!
그런데 부됸늬는 왜 왔지? 여러 장군들이 증언했듯, 말 궁딩이밖에 모르는 인간 아닌가. '내' 손으로 4만 대의 전차와 4만 대의 항공기를 달라는 투하쳅스키를 숙청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차의 유용함을 부정할수는 없었다. 그때 열성적으로 기갑-기계화 전력이 기병 전력에 비해 너무나 열등해서 투하쳅스키가 사보타주를 했다고 주장하던 부됸늬를 어떻게 중용하겠는가?
"아니, 어르신 그렇게 혼자 들어가시면... 흠흠, 서기장 동지 안녕하십니까?"
얘는 또 왜 왔냐? 스탈린의 짱친 절친으로 유명했던 보로실로프가 쓰윽 문 안을 들여다 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분명 이 두 인간은 전쟁 지휘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배제했던 것 같은데... 그나마 적백내전 당시 기병 지휘관으로 끝없는 동유럽의 대평원을 내달리며 공을 세웠던 부됸늬, 500년쯤 일찍 7천 킬로미터 동쪽에서 태어났으면 위대한 칸이 되었을 수도 있는 부됸늬에 비해 이 인간은 지휘관으로는 완전 폐급인데?! 총도 잘쏘고 싸움도 잘하고 카리스마도 있긴 한데 그건 딱 대대장급 수준에서였다. '내' 기억 속에서 보로실로프는 같이 은행강도질 할때는 상당히 유능하고 날 한번 살려준 적도 있었는데 그건 그 시절 이야기고! '나' 도 그시절엔 존잘이었더라?
"보로실로프 동지와 저, 그리고 원수부의 참모들과 함께 세운 공세 작전계획입니다 서기장 동지!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아니, 샤포슈니코프와 바실렙스키는 뭐라고 하던가?"
샤포슈니코프 아재, 아무리 부됸늬랑 보로실로프가 '내' 측근이라고 해도 무능한건 당신도 잘 알잖아. 바실렙스키 당신도. 당신들 유능한 사람 아니었어? 왜 나한테까지 올라오게 만들지? 건강이 안 좋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제스처인가? 영원히 쉬게 만들어줄까? 앙?
뜬금없이 보로실로프가 바실렙스키라는 이름을 듣자 급 방긋하며 문서철을 탕 하고 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내' 기억 속에서 보로실로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엄청난 기회가 왔을 때인데... 뭔가 불안해졌다.
"바로 그! 바실렙스키 동지가 아주 혁명적인 작전안이라고 극찬한 작전안입니다 서기장! 한번 검토를 해 보시죠."
바실렙스키, 너였구나?
너어어어는... 샤포슈니코프가 은퇴하면 주코프를 그냥 총참모부로 부르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어. 아무리 짬 높은, 소비에트 초기 5원수에 내 최측근이라지만 뻔히 겨울전쟁에서 트롤하는걸 봤으면 좀 니가 찍어 누를수도 있지 거기다가 좋은 작전안이라고 칭찬까지 하나?
아무튼 보로실로프의 저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눈빛과 부됸늬의 움찔움찔하는 콧수염의 부담감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파일철을 펴자, 프리퍄티 습지의 지도가 튀어나왔다. 인근 철로와 현재 나치 독일군의 진군 현황, 민스크에서 포위된 채로 사수전을 펼치고 있는 2개 사단과 공수여단의 상황 같은 문서들이...
"이게 왜 여기서 나오나? 설명 좀 해보게."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자! 들어오게!"
내 집무실 문을 열고 거의 일개 분대의 장교들이 거대한 칠판을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부됸늬는 어디서 꺼냈는지 지휘봉을 휘릭 꺼내어 주요 지점들을 짚어 내려가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파쇼 놈들의 중부집단군은 모길례프와 스몰렌스크를 향해 기동하며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남부집단군은 지토미르에서 주코프 동지와 키르포노스 동지의 영웅적 방어전에 가로막혀 있지만 적의 정예인 6군이 도착할 경우 결국 밀려나리라 사료됩니다. 그 와중 민스크에서는 아군의 약 2만 병력이 도시를 사수하고 있으나 보급이 끊어져 곧 포위 섬멸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들을 구원하고,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예봉을 동시에 꺾을 수 있는 작전안입니다!"
말만 들으면 그럴듯 한데... 일단 더 들어나 보자.
"파쇼 놈들의 주력은 뭐니뭐니 해도 기갑부대와 차량화 부대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험지에서-특히 습지에서-의 기동성이 극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들의 이 약점을 아주 잘 활용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기병대를 습지에서 집중 운용하는 것입니다."
부됸늬의 콧수염이 열정적인 연설 와중에 푸들푸들 떨려 왔다. 말을 하면 할수록, 흥분이 되는지 그는 이젠 아예 칠판을 쾅쾅 두들기며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기묘한 열정에 차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은 쾌속 진군을 위하여 경비사단 등 일부 병력만을 후방 정리에 남겨두고 주력을 운용하여 스몰렌스크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프리퍄티 습지 내의 철도선들은 살아 있으며, 포위망을 탈출한 몇 개 사단들이 습지에서 참호를 파고 버티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 철도망을 통하여 기병 10여개 사단을 투입, 저들의 후방 보급선을 타격하고 민스크에서 사수전을 펼치는 아군 병력들에게 보급과 증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아군의 철도망은 습지 내의 마을인 말코비치까지는 살아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대략 130km 떨어진 바라노비치의 철도 교차점을 기습, 파괴한다면 저들은 아직 민스크조차 완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기에 드네프르 강 까지의 보급에 엄청난 난맥을 겪게 됩니다. 당장 스몰렌스크로 이어지는 민스크발 철도망 역시 확보하지 못하였고, 지금 이 바라노비치를 기습한다면 저들은 스몰렌스크 전면의 군대에게 보급을 해 주기 위하여 빙 돌아 드비나 강을 건너 비텝스크로 가는 철도망을 활용하여야 합니다"
어? 뭔가 그럴듯 했다. 철도망과 지형지물들이 자세히 그려진 지도에서 부됸늬가 짚어내는 점들은 다 일리가 있었다. 독일군이 400만이라 해도 후방을 경비하는데 수십만 병력을 할애하지는 못한다. 특히 아직 파르티잔들이 날뛸 시기가 아니기에. 그때 아무리 경무장이라도 기관총과 76mm포, 122mm 곡사포로 무장한 정규 사단 몇십 개를 후방에 밀어넣을 길이 열려 있다고?
바르바로사 작전의 대형 포위섬멸을 아직 몇번 당하지 않아서 전력에는 여유가 있다. 남부로는 기갑과 보병 전력을 주로 보내고 있는 만큼 편제되어 배치를 기다리는 기병사단들은 아주 엄청난 필요가 있지는 않다. 이것을 기병전의 스페셜리스트인 부됸늬 휘하에 몰아준다면..?
바실렙스키가 찬성한 이유가 있었다. 부됸늬 스스로가 습지에서의 차량 기동이 어렵다고 한 만큼 정규 기병사단에 배치되는 소수의 기갑차량도 편제에서 제외할 수 있다! 당장 전차 한 대가 아쉬운 전장이 넘쳐나는데 기병사단에 편제된 BT-7 경전차나 T-60 몇십대 씩을 모아 크고 아름다운 기갑부대를 편제하는데 쓸 수 있으면 전선군 규모에서도 직할 예비대로 사용가능하잖아! 정규 기갑사단이나 여단에 비하면 T-34도 KV-1 중전차도 없는 허접한 기갑부대지만 기갑부대가 아니고 차량화보병, 탱크 데산트를 얹어서 쓴다고 하면 썩 나쁘지 않다.
지휘관이 부됸늬인게 문제인거지.
서기장이 뭐라고 생각하던지 간에 부됸늬가 서기장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전장이 앞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기에.
이미 부됸늬는 한번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붉은 군대의 기병은 반쯤 그의 사병으로 여겨졌으며, 병사들의 그런 인식을 구태여 수정하려 한 적도 없었다. 정치국은 군대 내의 파벌화를 진저리치며 경계했기에 다른 원수들이 숙청될 당시 부됸늬 역시 숙청하려 한 바 있었다. 스탈린 서기장과의 친분에 빌어, 그리고 다시는 앞으로 나서지 않겠다고, 군인으로서의 인생을 이제 끝내버리겠다고 빌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평화의 시기에 군인은 그저 쓸모 없어진 사냥개, 자칫하면 손을 물 수도 있는 사냥개였으며 그것은 적백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영웅인 부됸늬라고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군인이 활약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국가의 환란을 바라는 불충이라 비난한다면 어쩔 수 없다. 아직 육체가 강건하고 정신이 맑을 때에, 다시 한번 전장으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전장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서기장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으며, 부됸늬는 마음 속으로 이미 오래 전에 떠나온 신께 기도드렸다. 그의 콧구멍이-그리고 압도적인 콧수염이-벌렁이는 것을 아마 부됸늬 자신만 빼고는 방 안의 모두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콧수염이 얼마나 더 크게 왕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장교들이 궁금해하기 시작했을 때쯤 서기장은 말했다.
"좋소. 해보게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