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화 (1/300)

# 1

1화 (1941.6.22)

말도 안돼...

시험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늘어지게 한숨 잠이나 자볼까 한 것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분명히 잠이 든 것은 후덥지근한 고시원 방이었을텐데, 일어나 보니 주변이 온통 달라져 있었다. 고시원의 싸구려 매트리스가 아니라 푹신푹신한 솜이 가득 들어있는게 분명한 침대에서 화들짝 놀라 달려나왔다.

몸이 무거웠다. 분명히 내가 운동을 좀 안 하기는 했는데... 마치 물 먹인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게 익숙하지 않았다. 휘청이는 다리를 붙들어매고, 주변에서 거울을 찾았다.

"으아아악!"

거울 속에서 주름지고 콧수염이 부숭부숭 돋친 곰보 할배가 경악한 표정을 하고 나를 응시했다. 거울 속 할배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확히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이.

분명히 나는 21세기의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뿐인데-평범이라기에는 밀리터리나 2차대전 시기의 역사에 과도하게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왜 지금 내가 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가장 거대한 전쟁의 주인공이었던 스탈린의 몸 속에 들어와 있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대체.."

당황해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내가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러시아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스탈린의 것이 분명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듯 올라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

코바라고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와 내 원래-한국어-이름을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고 어제 본 1학기 기말고사의 내용과 전쟁 보고의 내용이 합쳐져...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모스크바,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

회의실은 조용했다. 탁자의 맨 끝자리, 최고 상석은 비워져 있었고 옆에 도열하여 앉은 인물들은 다들 눈을 감고 머리를 짚고 있거나 푹푹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대한 보고가 올라온 이후 전쟁을 지도해야 할 최고지도자인 서기장은 본인의 예측이 틀렸다는 데 충격을 받고 본인의 다챠(러시아식 별장)에 틀어박혀 칩거 중이었다. 서기장은 스타브카나 정치국에서 보내는 어떠한 연락에도 대답을 보내지 않았다.

"서부전선군의 주력 부대들은 대부분 비알리스톡 돌출부에서 포위당했습니다. 소수의 병력이 포위망을 탈출하여 민스크의 방어선에 집결하고 있지만 지휘계통이 붕괴하여 민스크를 사수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벨라루스 SSR의 수도인 민스크가 함락당했다. 지휘관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보고는 계속되었지만 대부분 독일군이 어떻게 소련군 부대들을 포위하고, 전멸시키고, 패주시켰는지에 대한 것들 뿐이었다.

병력 미상의 독일군과 교전하여 아군의 얼마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독일군은 어디까지 진격한 것 같다. 패배, 패배, 패배의 보고만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연락장교가 계속 보고사항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웅성이기를 멈추자 어깨가 무거운 듯 푹 구부린 채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는 회의실을 쭉 내려다 보았다. 둥근 안경테를 긴장되는 듯 만지작거린 그는 큼큼 목을 골랐다.

"먼저, 인민들에게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더러운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어머니 조국을 피로 물들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게 해 주어야 하기는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는 것일 뿐. 소련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통해 나치 파시스트들을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인민들과 병사들의 피로.

"서기장 동지는 현재 다챠에서 칩거 중이십니다만, 오늘 중으로 저와 몇몇이 다챠를 방문하여 그분이 다시 우리를 지도하시기를 요청할 계획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튼 나중에 생각하도록 합시다."

소련의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신경질적으로 콧수염을 매만졌다. 서기장은 그를 견제하면서도 신뢰했고, 사실상 2인자의 직위를 맡겼다. 그리고 몰로토프는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이 위치에 올라온 것은 전적으로 서기장의 덕택이라는 것을.

그보다 뛰어난 이들은 대부분 서기장을 적대했었다. 그리고 숙청당했다. 적군을 이끌어 전 러시아를 볼셰비키당의 품에 안겨준 트로츠키가 그랬고, 레닌을 제외하면 최고의 이론가라던 부하린이 그랬고, 카메네프, 지노비에프같은 고참 볼셰비키의 리더들이 그랬다.

몰로토프는 스스로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전쟁을 다루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과대평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을 이끌 볼셰비키당의 리더들, 붉은 군대의 최고참들은 모조리 사형당하거나 유배당했다. 몰로토프 그 자신도 수십 명의 장군들과 수백, 수천 명의 장교들을 처형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지금 전쟁이 터질 것을 알지 못했다. 며칠 전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승리할 수 있을까..?'

어두운 회의가 스쳐 지나갔다. 말하지 않아도 회의장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아무리 내 몸을 꼬집고 뺨을 때려 잠에서 깨어나려 해도 깨어날 수 없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막 시작된 시기, 즉 41년 6월 말의 스탈린에게 빙의되어 있었고 스탈린이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부터 얼마 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것 까지. 그가 느꼈던 감정들도 똑똑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충격, 당혹, 그리고 공포.

그리고 2010년대를 살아가던 대학생으로서 '나'의 기억 역시 또렷했다. 특히, 이쪽의 지식들.

방금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군이 어떤 패배를 거두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결국 어떤 희생을 치르고 소련이 승리했는지 역시 자세한 숫자들까지 일일이 기억할 수 있었다. 2천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고 소련의 가장 생산성 있는 영토들이 유린당했으며 민간인들 역시 잔혹한 독일군들에게 짓밟히고 강간당하고 굶어죽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스탈린의 몸에, 스탈린의 기억을 가지고 빙의된 이유조차 모르는데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나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는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

나치 독일에 의해 총살당해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은 있다. 당장이라도 저기 서랍의 권총을 내-스탈린의-머리통에 대고 당기면 악몽을 꾸었던 것처럼 깨어날 수 있다면 이 머리통을 총알로 날려버리면 된다.

그렇지만... 만약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영원히 원래 '내' 인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끝장이 나 버린다면? 판타지 소설의 편의주의적 전개처럼 죽었더니 원래 세상에서 깨어났어요! 가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역사 속에서 스탈린은 53년에 뇌출혈로 죽는다. 지금으로부터 12년이 지난 이후고, 내게 남은 시간은 딱 그만큼일지도 모른다.

또, 만약 여기서 자살하거나 고의적으로 태업을 해서 소련이 전쟁에서 패하고 실제 역사와 다르게 사건들이 진행된다면... 과연 내가 다시 돌아간다 쳐도 그 세계는 똑같을까? 나치가 소련마저 짓밟아 버리고 세계를 정복해서 호령하는 세계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인인 내 운명은 독일의 충실한 동맹국, 일본 제국의 2등 신민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핵전쟁 속에서 조상님들이 죽어 태어나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른다면 일단 내가 아는것을 활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수밖에. 한국인으로 돌아가든, 돌아가지 못하든 소련이 패배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희대의 또라이 새끼인 히틀러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내버려 두는것보다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게 낫다. 마찬가지로 상또라이나 다름없는 일본 제국이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전쟁으로 끌고 가서 죽이고 성노예로 만드는 것을 '나'-스탈린-는 조금 더 빨리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가 분단의 상처 속에서 동족들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꼴도 바꿔놓을 수 있지 않을까?

"서기장 동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망상을 폭주시키는 동안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혼자 생각에 빠져 있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방 바깥에는 꽤 많은 사람이 와 있는듯 여러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방문은 열렸고 사람들이 와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스탈린의 기억에서나, 아니면 '내' 기억에서나.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주코프.. 보로실로프.."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중얼거렸다. 역사책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얼굴들과 스탈린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생생한 모습들이 겹쳐졌다. 이름이 불린 이들은 다들 조금씩 움찔거렸다. 다들 입술을 꽉 깨물거나 주먹을 꽉 쥐는 등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알 것 같다. 이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를.

"서기장 동지, 나치 파쇼들의 군대가 지금.."

"알고 있네."

그래, 인생은 어차피 연극이라지. 각자의 배역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해내야 하는. 대본은 무대 작가인 신만이 알고 있지만...

나는 이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배역에 충실할 수 밖에. 그동안 상상 속에서, 혹은 컴퓨터 게임으로 마우스를 딸깍거리면서 하던 것을 이제는 진짜 목소리와 손짓으로 진행할 뿐. 독소전쟁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고, 이것은 그 반복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바꿀 수 있고, 나도 꽤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보너스까지 주어진 것이고.

"스타브카로 가지. 계획은 세워 뒀네. 전황에 대해서는 현재 확인된 전선과 적군의 위치 위주로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고하게."

"예!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내 명령을 받은 이들이 우렁차게 경례를 붙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몰로토프는 아까의 긴장이 확 풀어졌는지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있었다. 이들은 내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경우 내게서 권한을 몰수하려고 온 것인데 '내' 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하자 부담이 확 줄었겠지.

많은 이들에게 스탈린은 일종의 신이나 다름 없다. 혁명기에는 같은 당원이었지만, 관료들을 장악해 이 거대한 국가를 건설하고 자기네들을 부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를 한 손에 휘어쥔 사나이. 그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스탈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스탈린이 오판을 내렸던 것이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결코 이 시점에 소련을 침공하지 않으리라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틀려 버렸다. 그가 충격을 받고 칩거하기 시작했을 때 과연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 그 신은 미래의 지식으로 무장한 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전쟁을 이겨 줄 것이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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