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도대체 어떻게?”
정말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내가 할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따라 할 수가 있…, 아니 이건 따라 한 게 아니다. 내 말을 이은 거다?! 정말 생각을 읽은 거라고?!’
강기찬이 자기 생각을 읽은 것.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싶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대격변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졌으니, 이거라고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아니지, 레전드스토리에 그런 스킬은 없잖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져 있는 한편, 강기찬이 뇌까렸다.
“뭐 그렇게 생각이 많아?”
“아, 아니다.”
강기찬의 말에 퍼뜩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정태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래, 강기찬이 생각을 읽을 줄 알면 뭐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강기찬에게 말했다.
“네 아이템, 다 넘겨. 그럼 목숨만은 살려준다.”
“나도.”
“뭐?”
이번에는 강기찬이 정태수가 했던 말을 똑같이 말했다.
“네 아이템, 다 넘겨. 그럼 목숨만은 살려준다.”
“무슨 소리지? 제정신인가?”
“어.”
강기찬이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마자,
둑둑, 두두두두두두둑-!
자신을 묶은 밧줄이 터져나갔다. 벌떡 일어서면서 정태수의 목을 부여잡았다.
순식간이었다. 정태수는 목이 잡히고 나서야 목이 잡힌 걸 알아차렸다.
‘강기찬이 이렇게 힘이 세다고? 그리고 이, 일어섰어?’
강기찬이 말했다.
“나름대로 힘 조절한 건데 어때? 숨은 쉴만하지? 서비스로 말도 할 수 있게끔 목을 조였어.”
강기찬은 힘 조절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힘 조절에 실패했다면 지금 정태수는 목이 부러져 사망했을 테니.
“…느, 느어… 도대체…….”
정태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강기찬의 손목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런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강기찬이 손에 실은 힘이 어마어마한 것!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나보다 레벨이 높아도… 이건 너무 차이나잖아?!’
자신의 레벨은 990이다.
강기찬의 레벨은 999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10레벨 차이가 큰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격차를 상쇄시킬 수 있다.
‘나는 전사고 강기찬은 암살자잖아!’
직업적으로 10레벨 차이를 좁힐 수 있다.
전사와 암살자.
오히려 순수한 힘으로는 우위를 점하고도 남는다.
자신은 전사라 스탯을 거의 올‘힘’에 찍었다.
반면, 강기찬은 암살자라 스탯을 거의 올‘민첩’에 찍었고.
그런 둘이 순수하게 악력을 겨룬다?
질 수 없다.
마법사가 레벨 더 높다고 팔씨름에서 전사를 이길 수 없듯이. 물론 그 정도 격차는 아니지만, 그게 그거인 것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졌다.
이쯤 되니 여기까지 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너… 너으 어뜨케 서있찌?!”
똑똑히 보았다.
강기찬이 벌떡 일어서는 것을.
아니, 지금도 서 있지 않은가.
‘어떻게 일어서 있을 수가 있냐고?!’
강기찬이 일어선 것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어났고.
그동안의 인생에서 겪었던 반전 중, 최고의 반전이었다.
이제와서 느낀 건데 조금 전의‘힘’의 차이가 났던 건 양반이었다. 그거야‘특별한 스킬’이나‘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으로 힘을 대폭 증가시켰다고… 어떻게든 상상의 여지를 펼칠 수가 있다. 물론 이마저도 억지로 짜내야 이해를 할 수는 있는 셈이지만.
하지만 강기찬이 일어서는 건 아니다.
애초에 변수랄 게 없었다.
강기찬이 일어설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가능성이 있다면 이 역시 레전드스토리에서 찾아야 하지만…
‘레전드스토리에선 그런 게 가능한 게 없잖아?’
…레전드스토리에는 하반신 마비 환자를 치료해줄 수 있는 약이 없었으니까.
강기찬이 웃었다.
“신기하지? 내가 어떻게 일어서 있는지?”
“으-으으으…….”
“기분 좋아지면 말해줄게. 그러려면 일단 한 대 맞자. ”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다.
빠드득.
[정태수님이 사망했습니다.]
[인벤토리에 보유한 아이템 중, 하나를 무작위로 떨어뜨립니다.]
과거의 오늘, 정태수는 강기찬이 당한 그대로를 돌려받을 예정이었다.
우선은… 말이다.
‘이 원한은…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지.’
무려 10년 치 이자를 갚아줄 작정이었다.
정태수의 시체가 남고 그대로 놔두었더니 일반인이 되었다.
“자, 잠깐… 가강기찬! 우리는 동료잖아? 맞지? 엉?”
정태수는 현실을 직시했다.
지금 강기찬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이젠 강기찬이 어떻게 일어서 있을 수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제, 제발… 살려줘.”
“내가 뭐 죽이기라도 한대?”
“제발.”
“내가 왜 너를 살려줘야 하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강기찬의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이에 정태수는 위기감을 느꼈다. 강기찬에게서 느껴지는 무감정함이 더 심각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덜 화났다는 걸 의미할 테니.
그러니 뭐라도 협상을 할 만한 걸 던져야 했다.
“사, 사 살려주면 뭐든지 할 테니까, 살려만 주라. 응? 제발, 시키는 대로 할게.”
강기찬의 눈이 빛났다.
“살려주면 뭐든지 할 테니까, 살려만 주라고? 뭐, 동료였던 적도 있으니까,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줄 수 있지. 좋아, 살려는 줄게.”
“?”
정태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그 말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진 않았다. 아니었더라면 진짜 죽었을 테니까.
한데, 어째서일까? 살려준다고 했는데도 이토록 불길한 까닭은…….
금세 알게 되었다.
* * *
“어? 어어? 여기는… 이동한계선 안이잖아?”
“그래, 버려진 세계야.”
강기찬은 정태수를 버려진 세계로 끌고 왔다.
“여기를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건 알 것 없고, 넌 앞으로 여기서 살게 될 거야.”
“여, 여기서 살게 될 거라고?!”
강기찬은 정태수를 죽이지는 않으려고 했다.
“네가 살려달라며? 아니면 죽고 싶어? 언제든지 말해, 너 죽이고 싶은 의지는 충만하니까.”
“… 농담이지?”
“뭐가?”
“내가 여기서 살 거라는 거…….”
“진심인데?”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뭐?”
“그래야 너도 정신 차릴 거 아니야? 이게 바로 경석 치료법이라는 거야.”
“겨…, 경석 치료법? 그게 뭐야? 아, 아니! 그, 그만하자. 이러지 말고, 대화로 하자.”
“야, 대화로 하고 있거든?”
“살려주, 아니, 나가게 해주라.”
“살려주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한다며? 일주일이 지났냐? 하루가 지났냐?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냐?”
“야!”
약하게 나가는 거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정태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네가 나한테 이러면… 이러면 안 되지!”
정태수가 울먹거리기까지 한다.
이에, 강기찬은 조소를 흘렸다.
“걱정하지마, 내가 먹을 것도, 챙겨주고 옷도 새 옷도 사다 줄 거니까. 야, 세상에 해코지하려던 상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냐?”
“… 해코지? 나,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안 했다고! 오히려 도를 넘어선 건 너지!”
“아? 그렇네?”
강기찬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진 상황만을 놓고 보면 정태수는 그저 강기찬을 데리고 자신만의 창고에 와서 밧줄로 묶고‘말로만’‘네 아이템 다 넘겨. 그럼 목숨만은 살려준다.’라고 협박했을 뿐이었다.
“근데 내가 안 나섰으면 너는 말로만 협박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지.”
“아니, 넌 계획한 대로 저질렀어. 나는 겪어봤으니까, 하는 소리야.”
“뭔 소리야? 겪어봤다니?”
“회귀했거든.”
“?”
정태수는 영 거슬렸다. 강기찬의 저 회귀라는 단어가.
아까도‘회귀하는 바람에 사실상 어제 기억은 없거든.’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머뭇거릴 것도 없었다.
“아까부터 회귀 회귀 거리던데,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미래에서 왔다, 이 말이야.”
강기찬은 곧이곧대로 말해주었다.
어차피 정태수는 평생 여기서 썩을 몸이다. 비밀이 새어나갈 리 없었다. 로그인해 누군가에게 귓속말할 수도 있지만, 권속을 상시 배치해 로그인하면 바로 죽이게 시킬 거니까.
“나보고 믿으라고?”
“믿기 힘든 일이 한두 번 일어나야지?”
“…….”
강기찬의 말이 맞았다. 믿기 힘든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중이었다.
게임이 현실이 되었다. 강기찬이 일어섰다. 이동한계선을 넘었다.
시간 회귀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면… 네 말이 맞는다면, 보, 복수하러 돌아온 거냐?”
“어. 두뇌 회전이 빠르네.”
“…….”
정태수가 완전한 절망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상대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으리라. 그 짓조차 이미 일어났던 일일 수도 있기에.
강기찬이 등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잘 지내라, 다시 만나는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테니까.”
“…….”
“아, 기억해. 나는 오늘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걸.”
여기까지가 과거의 오늘, 강기찬이 당한 그대로를 돌려주고, 약간의 이자를 친 과정이었다.
그리고 아직 남았다.
10년 치 이자를 갚는 것은.
그것은 정확히 10년 뒤에 일어날 일이었다.
* * *
시간 회귀한 뒤의 일정은 빠듯했다. 우선순위를 짜두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허투루 시간을 낭비했을 정도로.
우선, 슈슈크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상태창을 엿보았다.
‘레벨이 30,399이라… 대단하네.’
이 시점은 대격변 직후다.
과거의 자신과는 정확히 30배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레벨 격차였던 것.
‘미래의 적이 될 건데 살려둘 것 없지.’
곧장 슈슈크크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장차 우주 랭킹 2위가 될 까로로우도 마찬가지, 거기에 더해 아래로 100위까지 일찍이 제거했다.
‘미래에 나를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정리를 다 했네.’
그 밑의 새싹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을 따라잡지 못할 터. 이로써 지구 멸망은 일어날 가능성조차 원천 봉쇄해버렸다.
외계 행성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지구로 귀환했다. 가까운 국밥집에서 회귀 후의 첫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역시 회귀 후에는 국밥이지!’
국밥집에 가자 많은 손님이 있었고 떠들썩했다.
그중 바로 옆 테이블에서 소리가 들렸다.
“야! 그거 들었냐? 도심 한복판에 괴물이 나타났대!”
“나도 알지.”
“근데 용케도 여기 나왔네?”
“유저들이 지켜주니까.”
“그 무슨 게임이었지?”
“레전드스토리.”
“어, 어어, 그래. 그거.”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앞으로는 유저들의 세상이 오겠지. 초능력, 아니 게임 스킬도 쓴다더만…….”
“야, 잠깐! 그러면 강기찬이, 그 새끼 인생 피는 거네? 랭킹 1위잖아!”
“야, 말조심해라.”
“괜찮아, 여기 없을 건데 뭐.”
“근데, 강기찬은 무리지.”
“왜?”
“암살자잖아, 근데 휠체어 타는 신세야…….”
“아… 아아… 개불쌍하네.”
“그러면 누가 대세가 되는… 아! 2위도 한국인 아닌가?”
“기다려 봐, 검색해볼게, 떴다. 정태수래.”
“와, 그럼 실질적으로 정태수가 최강이 되는 거네?”
“그런 셈이지.”
“정태수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를 봐주기라도 한다냐?”
“에휴… 이럴 줄 알았나?”
“야, 그래도 희망을 품자. 강기찬보다는 낫지. 우리는 지금이라도 유저가 될 수 있는데, 걔는 이제 나락으로 떨어질 일만 남았잖아.”
강기찬이 국밥을 먹다 말고-
“풋.”
-웃었다.
분명 자신을 헐뜯는 대화였다.
그런데 이제는 웃음만 나왔다.
저들은 알까, 지금이라도 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신규 유저가 10년 뒤에야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실질적인 랭킹 1위라 칭하는 정태수가‘감옥’에 갇혀 평생 썩다가 비참한 말로를 겪을 예정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불쌍하게 여기던 자신은 그 누구보다 잘살게 될 거라는 것을.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