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 *
정점에 오른 유저 대다수가 안정을 추구한다.
나가로는 더 심했다.
단 한 번도 정면승부를 한 적 없었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어떻게든 피했다. 되도록 나서지 않고, 나서더라도 압도적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했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
맹인검객과 정면승부를 안 하려 했다. 다치는 건 기본, 목숨까지 잃을 수 있으니.
맹인검객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청용도 마찬가지.
레벨이 몇 백 차이나서 이길 확률이 높은데도 말이다.
맹인검객이고 청용이고 간에 죄다 부하들을 시키려 했다.
물론, 부하들은 상대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게끔 준비해놓았다.
그런데 강기찬이라는 변수가 발생했으니…….
‘뭐… 어쩔 수 없지. 내가 상대하는 수밖에.’
‘직접 싸우지 않는다.’라는 철칙이 깨질 줄 몰랐다. 그것도 신경도 안 쓴 존재로 인해서…….
그래도 이거는 고수하기로 했다.
‘내 승률이 100%까지 올랐을 때, 싸워야 한다.’
승률이 99%로도 성에 차지 않았다.
승률이 100%여야만 했다. 만렙에 특수 스킬을 지닌 존재를 상대하니까.
그러려면 3분 10초 뒤여야 했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되었다.
강기찬이 싸울 마음을 잠시라도 접을 수 있게끔,
흥미를 끌 만한 화두를 던져야 할 시기였다.
“저기…….”
“?”
“궁금하지 않나?”
“뭐가?”
“내가 맹인검객을 어떻게 암살하려고 했는지…….”
“음, 궁금하네.”
강기찬도 궁금했다.
발걸음을 멈추고선 귀를 기울였다.
‘서, 성공이다.’
나가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놈이 관심을 가졌어!’
여기까지만 해도 반은 성공한 셈.
강기찬이 물었다.
“뭔데? 어떻게 암살하려고 했는데?”
“로그인 가능 시간을 이용해서, 암살하려고 했다.”
“아아… 그거였어?”
유저는 하루에 12시간만 로그인할 수 있다.
그 시간을 다 쓰면 일반인이 되어 제거하기 쉬울 터.
“근데 그 시간이 언제인 줄 알고?”
강기찬의 타당한 질문이었다.
최상위 랭커는 바보가 아니다.
‘로그인 가능 시간’을 다 안 쓰고 자정을 맞이하는 편이다. 그 전에 다 쓰면 남은 시간 동안 무방비 상태니.
반면, 자정이 되면 다시‘12시간’이 생길 터. 그때 맞춰서 다 쓰거나, 안 쓰고 남겨두는 것이다.
안 쓰는 시간이 아까우나, 안전이 중요해 무방비 상태가 되는 시간을 아예 없애는 걸 택하는 거다.
이에, 나가로가 대답했다.
“자정이 되면 로그인을 못 하지 않나.”
하루 중, 로그인을 못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자정부터 아침 6시까지.
유저들에게 밤엔 자라고 만든 시간,
이른바, ‘로그인 금지 시간’이었다.
강기찬이 의문을 제기했다.
“자정이 되면 로그인을 못 하는 거?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지.”
예외는 없다.
자정부터 아침 6시까지.
6시간 동안, 모든 유저는 강제 로그아웃 당한다.
즉, 모두가 공평하게 일반인이란 의미.
이후, 오전 6시가 되어야 로그인해 유저가 될 수 있는 것.
그러나,
“맹인검객이 유저일 때보다는 일반인일 때 암살하기 쉽지 않겠어?”
유저일 때라면 못 죽여도 일반인이라면 죽일 수 있다, 이거다.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되니까.”
유저일 때는 레벨이 깡패다.
레벨이 낮으면 숫자가 많아도 못 이긴다,
하나, 일반인일 때는 다르다.
머릿수가 깡패다.
단독행동하는 맹인검객.
거대 길드를 이끄는 나가로.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훤한 일인 것.
‘이러면 되겠지?’
나가로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게 되겠어?”
강기찬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하지만, 나가로는 무덤덤했다.
저런 반응? 상관없다.
사실, 이건 위장용 답변이니까.
애초에 시간 끌기가 목적이었다.
이걸 상대가 받아들이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성공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고 그러면 만족했기에.
강기찬이 이어 말했다.
“자정에 일반인 된다고 암살하기 쉬우면 이때까지 암살 안 당한 게 이상하잖아?”
누구보다 원한을 많이 산 자가 맹인검객이었다. 암살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암살 대상의 가족이나 지인의 원한을 사게 될 터.
한 명 암살하면 수 명의 원한을 사는 격. 적은 갈수록 늘어나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인검객은 지금껏 암살은커녕 암살위협도 당하지 않았다.
왜? 맹인검객은 바보가 아니니까. 자신이 가장 위험해지는 시간이 고정되어있는데 대책을 마련해놓지 않겠나.
그 대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강제 로그아웃 당하기 전에 일찍이‘안전한 장소’에 가 있으면 되었다.
이거야 그녀가 단독행동을 했기에 그랬고, 대다수의 최상위 랭커는 길드 마스터일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믿을 수 있는 부하들에게 경호를 부탁하기도 하고.
나가로가 쉬이 수긍했다.
“그렇지. 네 말이 맞아. 일반인이 된다고 암살하기 쉬우면 이때까지 암살 안 당한 자가 없겠지.”
현실적으로 암살당하기가 더 어려웠다. 저렇듯, 그만큼 다들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 어디 보자…….’
말을 하면서 시계를 엿보았다.
오후 11시 59분 30초.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30초밖에 안 남았기에.
30초 후에는 승률이 100%가 될 것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강기찬이 나가로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포착하고선 물었다.
“티가 났나 보네?”
“어, 쪼개고 있는데 어떻게 몰라.”
“그럴 게 있다. 너도 곧 알게 될 테고…….”
“그게 뭔데? 지금 가르쳐주지?”
“기다려 봐, 아니, 이제는 말해줘도 되겠네.”
이제는 진실을 밝혀도 되지 싶었다.
그래봤자 강기찬이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러는 사이에 벌써 25초 남았고…….
“이제는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네.”
“뭘?”
“이 몸이 맹인검객을 제거하는걸…….”
“그래? 그러려면 나부터 제거해야 할 텐데?”
“그냥 보내주진 않을 거다?”
“당연하지, 그럴 거면 여기 너만 따로 데려오지도 않았지.”
“하긴 그렇긴 하네…….”
나가로는 강기찬이 가소로웠다. 조만간 다가올 제 미래도 모른 채 건방을 떨고 있는 모습이.
비웃으면서 시계를 보았다.
오후 11시 59분 59초.
다시 강기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게 가능하겠냐?”
“뭐가?”
“어, 이제 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러네…….”
강기찬이 나직이 읊조렸다.
‘어떤’ 시간이 다 되었는지는 설명이 불필요했다.
자정, 강제 로그아웃이 되는 시각이지 않나.
그런 까닭에,
‘저거… 시간 개념이 하나도 없는 놈인가?’
나가로는 강기찬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기본 중의 기본이지 않나. 자정이 되면, 그 순간부터 강제 로그아웃이 되어 일반인이 된다는 사실!’
잠깐도 아니고 무려 6시간이나 일반인으로 지내야 한다. 그걸 몰랐을 리도 없을 텐데 지금까지 무슨 자신감으로 여유를 부렸던 걸까?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한심하긴 한심하구먼…….’
마침내 자정이 되었다.
이제부터 자신과 강기찬과 똑같은 일반인이다.
강기찬이 정말 만렙이라는 가정하에, 강점이 사라졌다. 아니, 본인이 포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물론 우리가 만났을 때도 자정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빨리 나를 처치했어야지… 무슨 생각으로 자정까지 시간을 끈 거지?’
어쨌든 감사한 건 감사한 것.
그 기념으로…….
“내가 비밀 하나 가르쳐 주마.”
나가로는 강기찬에게 비밀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뭔데?”
강기찬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나가로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중국, 정확히는 서울과 베이징에는 약 1시간의 시차가 있다.”
“그래?”
강기찬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느닷없이 시차 얘기는 왜 하는 걸까?
“그래서?”
“이게 버그더라고.”
“… 버그?”
“그래, 시차 버그.”
“그런 버그가 있었어?”
강기찬도 버그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그도 몰랐던 버그라? 이번에는 솔깃했다.
“나라별로 시차가 다른 건 알겠지?”
“어.”
“지금 서울은 12시이지만, 베이징은 11시다.”
“어.”
“내 계정은 베이징 시각을 적용받고 있다.”
여기까지 말했음에도 강기찬은 담담했다.
꽤 결정적인 의미가 함축된 건데도.
‘역시 돌대가리인가? 전혀 이해를 못 한 얼굴이군…….’
나가로는 욕이 나오려던 걸 삼켰다.
그건 나중에 해도 될 일이었다.
지금은 강기찬이 화들짝 놀라는 꼴을 보고 싶었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서라도 꼭 보고 마리라.
“즉, 나는 아직 강제 로그아웃이 안 되었다. 여전히 유저다. 베이징의 시간이 유지되고, 베이징은 11시라서…….”
강기찬은 진작 이해했다.
나가로가 시차 버그로 유저로 있다는 것을.
다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은 게 있었다. 그래서 생각을 좀 했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제야 나가로는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유저라면 누구나 버그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실제로‘시차’를 이용해보려 하기도 했었다. 타 국가 유저와는 시차로 인해서 자신은 유저이고 상대는 일반인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그런 것도 생각지 못할 레전드스토리 게임사가 아니었다.
1대 1이라면 몰라도,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짓밟아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시스템이지 않나.
당연히 조치가 취해져 있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그 나라의 시간으로 적용되는 거로.
고로, ‘로그인 금지 시간’ 동안, 같은 나라 안에선 모든 유저가 똑같이 일반인인 것이다.
그 예외가 나가로였다.
나가로는 한국 땅을 밟고 있는 이상, 한국의 시간을 적용받아야 했다.
즉, 일반인이 되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전히 유저였다. 아직도 베이징의 시간이 적용 중인.
완벽한 버그였다.
그런 까닭에 저렇게 우쭐댈 수 있는 거겠지.
이 시각,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유저이니까.
그리고 앞으로 6시간 한정, 대한민국에서 제일 강한 존재가 되었다.
그제야 강기찬은 이해가 갔다.
‘무슨 자신감으로 맹인검객을 암살하려고 하나 했는데, 시차 버그 믿고 깝죽거린 거였구나.’
나가로가 떵떵거린 게, 아무 근거 없는 게 아니었던 것.
‘하기야… 지금의 나가로라면 맹인검객도 우습겠지.’
나가로는 유저인 반면, 맹인검객은 일반인이다.
상대가 안 될 터.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강기찬이 재차 물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선.
사실은 하나도 안 심각했다.
해결책이 있어서.
그런데도 심각한 척 연기했다.
왜냐하면,
‘버그 정보 좀 얻자.’
‘시차 버그’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러려면 이래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정확히는 지금이 정보 얻기엔 최적의 시기였으니까.
본래 인간이란 비밀을 함구하기 어려워한다.
누군가에게는 비밀을 토로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하지만, 못 그런다. 비밀 유출이 염려되어서.
하지만, 자신에게 말하는 건 괜찮을 터.
강기찬은 곧 죽을 목숨이라는 사실.
나가로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나.
강기찬에게 말하면 비밀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으니, 비밀을 토로하기엔 적격자였다.
강기찬은 그 점을 역이용하려 했다.
‘야, 공짜 버그 정보 좀 넘겨라, 회귀하고 써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