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주은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이 처한 이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
그건‘대마법사의 증표’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있지 않나.
‘이자…….’
신규 유저라 자신을 소개한 이.
여러모로 수상했다.
하나, 더는 정체가 중요치 않았다.
이미 전투력은 증명이 되었기에.
자신을 도와주기엔 충분했다.
“요점만 말해라, 날 도와주겠다는 거냐?”
“물론, 조건만 맞으면…….”
“원하는 게 뭐냐?”
“우선, 나한테 무릎 꿇고 사죄해.”
주은이 곧장 실천에 옮겼다.
의자에서 내려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살기 위해선 이 길밖에 없었다.
“야, 저거 뭐야…….”
당연히 주변 카페 손님들이 쳐다보았다.
다만, 주은이 얼굴을 가려 누군지는 몰랐다. 강기찬도 이 점을 인지했다.
“누가 사과를 얼굴 가리고 하나?”
“하아…….”
주은은 탄식하며 천천히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선글라스, 마스크를 벗고 후드를 뒤로 젖히자마자,
“어? 저 사람 주은 아니야?”
“주은이 누구… 아! 주작길드장?!”
카페 손님들이 주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 맞네, 맞아.”
“주작길드장이 왜 무릎 꿇어?”
“아까 좀 엿들었는데 저 사람한테 잘못한 게 있나 봐.”
“그래?”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해서 하는 중인 거야.”
“허… 무슨 잘못을 지어서?”
“잘못을 지어다 해도 저 양반이 무릎을 다 꿇네?”
“그러게, 주은 성격 되게 더러운데.”
“4대 길드장 중에서 두 번째로 성격 더럽기로 유명하잖아.”
“누가 첫 번째로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데?”
“백령.”
“야, 입 조심해. 다 들릴 거야”
“아, 맞네…….”
강기찬이 카페 손님들을 향해 외쳤다.
“여긴 위험합니다. 다들 나가주세요.”
그 말에 다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한편, 주은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있었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아 왔던 나날이었다.
그건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보다 굴욕적인 상황은 없었다.
더 비참한 건 이 상황의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상대를 등쳐먹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게 다 상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지. 저만한 ‘거물’을 알아보지 못한 잘못이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떻게 알아봐!’
상대가 하필 네크로맨서인 줄 어떻게 알았겠나. 레전드스토리 역사상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는데.
‘지금도 안 믿겨. 네크로맨서라니…….’
물론 상대가 자신을 네크로맨서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걸 못 알아챌 정도로 바보는 않았다.
저자는 분명 네크로맨서였다.
저만한 몬스터들을 부리고 있다는 게 그 방증이었다.
‘이제야 왜 이 자가 대마법사의 증표가 있었는지 알겠네. ‘대마법사 전직 시련’을 통과해서 대마법사의 증표를 받아놓고‘네크로맨서 전직 시련’도 통과한 거야.’
‘대마법사 전직 시련’을 통과해놓고도 대마법사로 전직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려우나…….
사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인해 상식이 깨진 지는 오래였다.
‘대마법사와 네크로맨서… 두 직업을 비교했을 때 대마법사보다는 네크로맨서가 낫다고 여긴 거고, 전직했으니 대마법사의 증표는 필요가 없어진 거지, 그래서 팔러 온…….’
상대가 신규 유저인 것도 이해가 갔다. 기존 유저 중에는 네크로맨서가 있을 수가 없으니까.
네크로맨서는 본서버에 출시도 안 하지 않았나.
반면, 이번엔 네크로맨서 전직교관인 NPC네크가 왔었단다.
갑자기 왔다가 금방 떠나서 반대 여론이 생길 수도 없어졌고, 그 덕분에 이자가 네크로맨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일 터.
‘그나저나… 어마어마한 힘이다……!’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저자는 신규 유저다.
즉, 전직한 지‘이틀’ 되었다는 얘기.
단‘이틀’ 만에‘비공식 세계 랭킹 1위’인 맹인검객을 압도하는 권속을 보유한 것이다.
‘이건 저자가 대단해서라기보다는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이 워낙 우수해서라고밖에 볼 수 없지.’
육상 금메달 리스트라도 자동차보다 빠를 수는 없다.
이렇듯, 이틀 만에 맹인검객을 압도하는 권속을 부리는 것? 이게 과연 노력 & 실력의 영역에서 가능할까?
‘순전히 ‘직업빨’이지.’
내심 상대에 대한 시기심에 깎아내리는 거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평가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심하게 굴욕스럽지는 않네.’
자신보다 하찮은 존재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굴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는 대단한 존재이지 않나.
또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 확실한 생명 연장이 된다면야…….
“미안하다.”
주은이 고개를 들어 강기찬을 올려다보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강기찬이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때는 말이야. 네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말해야 하는 거야.”
디딩-!
강기찬이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그건 왜 찍는 거야?”
“네 잘못을 박제하려고.”
“그건 너무하지 않아?”
“내가 하는 건 너무하고 네가 하는 건 괜찮고?”
“…….”
“왜… 네가 사기를 치려 했다가 발각된 사실을 다른 사람들한테는 숨기려고?”
“…….”
혹자가 볼 때는 과하지 않나 싶겠지만, 만약 강기찬이 힘이 없는 소시민이었다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대마법사의 증표’와‘대마법사가 되는 방법’을 무료로 홀라당 넘겨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살해당하는 쪽은 자신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아주 싼 가격에 판매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것조차 아깝다고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해? 사실 그 돈이면 너 말고도 산다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빽빽할 거야.”
주은도 그 점은 반박할 수 없었다.
상대가 부른‘대마법사의 증표’ 값은 3천억 원이었다.
돈을 여기저기 다 긁어다가 영혼까지 끌어모으고도 부족해서 현기현까지 합세한 금액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다 보니 모을 수는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도 남는 장사였다.
대마법사 한 명이 가지는 가치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으니까.
즉, 저자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걸 알고도 팔아주려고 했고.
그런 자를 상대로 감사해하기는커녕 사기를 치려고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 아, 알겠어. 미안해. 시키는 대로 할게.”
여기서 내빼는 순간, 권속을 물릴 테고 맹인검객이 들이닥칠 것이다. 무엇보다 일주일의 기간을 보장받지 못할 터.
강기찬이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네가 뭘 잘못했지?”
“내가 뭘 잘못했냐 하면…….”
주은이 자신의 잘못한 점을 읊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물들었다.
그렇게 정직을 중시하던 인간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좋아. 이제야 가식 없는 주은과 대화할 수 있겠네.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 팔게.”
“… 지금 돈이 없어서.”
“너 정도 몸값이면 돈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아. 내가 잘 아는 분이 유저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시거든? 이번에 경석이도 거기 소속이 되었고, 어때? 거기서 일 좀 하면 돈은 꽤 벌릴 거야. 길드원들 데리고 해외에 원정사냥도 다니고…….”
주은은 망설였다.
하나, 금방 결심이 섰다.
벼랑 끝에 몰렸는데 뭔들 마다하겠는가.
“어.”
“잠시만 기다려 봐.”
강기찬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선 계약서를 준비해왔다.
그걸 읽어내려가던 주은이 한 대목에서 동공이 흔들렸다.
“10조?!”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 정보사용료 : 10조 원]
“왜 너무 싼가?”
“…….”
사실, 10조도 돈만 있으면 흔쾌히 지급할 돈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다.
즉 저건 빚을 떠안는 거라는 의미.
주은은 문득,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을 모른 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저기… 그냥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안 살래.”
“뭐?”
강기찬이 정색했다가 금세 풀었다.
“좋아, 부담스러워서 그러나 본대… 특별가로 할인해서 1조.”
“1조? 그렇게 싸게?”
“그래.”
“…….”
사기 치는 건 아닐 터.
갑의 위치에 있음에도 대마법사의 증표도 저렴하게 3천억 원에 팔지 않았나. 그것도 을에서 갑이 된 거라 더더욱 제 꼴리는 대로 부를 수 있었음에도.
더군다나 대마법사의 증표처럼 일회용도 아니다. 대마법사를 양산할 수도 있을 터.
빚이 아닌 투자라 생각기로 했다.
‘10년만 고생하자. 작정하면 벌 수 있는 돈이잖아…….’
이 건은 여기서 넘기고 좀 더 계약사항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또 걸리는 게 있었다.
“경호비용으로 하루 1억?!”
“그럼… 공짜로 경호하겠나?”
“그건 아니지만…….”
“하물며 암살자가 맹인검객인데? 이건 네 경호비용이기도 하지만, 내 위험 & 생명 수당도 잡아둔 거야. 널 보호하다가 나도 암살당할지도 모르잖아. 내 권속이 강한 거지, 내 몸 자체는 물몸인 거 알지? 나는 너한테도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해.”
“아…….”
“… 그런 것치고는 1억도 싸게 먹히는 거지.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도 아니고, 경호 안 하는 순간 반드시 일어날 위험이니까.”
당연히 주은이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애당초 맹인검객은 주은을 죽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으니까.
“내 경호만 받으면 넌 절대 위험해질 일 없다는 것을 보장하지. 위험해지는 순간, 내가 위약금을 토해내는 거기도 하고.”
“좋아.”
슥, 스스스슥.
주은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여자 정말 고맙네.’
강기찬은 주은이 고마웠다.
맹인검객의 등장에, 혼자 착각하고 자신을 등쳐먹으려고 해준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않나.
그러지만 않았어도 순수한 거래만 하고 끝냈을 거다.
‘… 또 미안하네.’
강기찬은 주은에게 미안했다.
‘나도 너한테 사기를 쳐서.’
받은 것‘그 이상’을 돌려주는 성격이었다.
사기당할 뻔하면, 역으로‘사기 쳐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주은에게 사기 친 것이다.
물론, 주은은 평생 모를 것이다.
자신이 사기당했는지를…….
맹인검객이 자신을 죽일 생각조차 못 했다는 것을…….
반면, 이번 건, 곧 알게 될 것이었다.
‘사기’는 아니지만, 사기당한 것처럼 느낄 만한 것이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지금 알려주자.’
“근데 말이야…….”
강기찬이 말을 꺼냈다.
“어…….”
“하인스가 있어야 전직할 수 있잖아? 근데 현실에 하인스가 없지 않아?”
“그렇지… 근데 고객센터에 물어보니까, 필요할 때 올 수 있다던데?”
“아 그래?”
“내가 그 정도도 안 알아보고 대마법사의 증표를 사러 왔을까 봐?”
주은은 이미 알아둔 상태였다.
< 레전드스토리 고객센터 >
[Q. 전직이 필요할 경우, 어떡하나요?]
[A. 전직 교관 NPC가 출장을 옵니다.]
이걸 믿고선 대마법사의 증표를 사러 온 것이다.
강기찬에게도 답변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강기찬이 찬물을 끼얹었다.
“에휴, 하인스가 올 수 있는지, 그걸 물어봤어야지.”
“무슨 소리야?”
“하인스, 몇 달간 못 와.”
“뭐?”
“내가 죽여서 부활 대기 상태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