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주은은 헛웃음을 흘렸다.
“예? 정신적 피해 보상… 뭐요?”
강기찬은 정색하며 토로했다.
“저한테 사기 치신 거, 상당히 불쾌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적 충격이 커서… 그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겠는데요?”
이 말에 주은도 불쾌해했다.
‘뭐 이런 건방진 새끼가 다 있어? 내가 누군지 알 텐데, 이렇게 고자세로 나올 수가 있다고?’
마음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나, 지금 필요 이상의 자극은 금물이었다.
주위의 이목도 그렇고 백령 & 맹인검객도 거슬렸다.
일을 키우기보다는 줄여야 했다.
빨리 용무를 끝내는 게 좋았다.
“저기요, 사기라뇨? 말이 과하신데요? 억울합니다. 저도 몰랐어요. 백령 & 맹인검객이 저를 노리는 건지, 그쪽을 노리는 건지… 그래도 그쪽을 노릴 가능성도 있어서 알려드린 거라고요.”
강기찬이 조소 지었다.
“아니,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애초에 백령 & 맹인검객이 나를 노리지 않는다는 걸.”
주은의 한쪽 입꼬리가 가늘게 경련했다.
화가 나는데 겨우 다스리는 중이리라.
“… 몰랐다니까, 그러네…….”
“청룡 길드가 백호 길드 다음 표적은 어디겠어? 그쪽이나 현무 길드겠지. 추측하건대, 청용이 맹인검객을 고용해 당신을 암살하라 했을 것 같고, 백령은, 청용에게 투항하고 밑으로 들어갔다고 보고…….”
“…….”
“당신도 백령 & 맹인검객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그쯤은 예상했을 텐데, 내 말이 틀렸나?”
“…….”
까득!
주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 양념을 더치는 강기찬이었다.
“혹시 근처에 현무길드장도 있으신가?”
“!”
주은은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맹인검객으로도 될걸, 백령까지 보낸 게 이상해서… 현무길드장까지 둘이면 설득력 있잖아? 맹인검객 혼자서는 한쪽은 놓칠 우려도 있으니까.”
주은은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무길드장’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때려 맞춘 것일 테지만, 여하튼 맞췄으니까.
강기찬이 다리를 꼬면서 중얼거렸다.
“그쪽 상황이 좀 안 좋은 거 같으니까, 특별히 정신적 피해 보상 및 위자료는 받지 않도록 하지. 대신 나한테 무릎 꿇고 사죄해. 이런 식으로 뉴비들 등쳐먹은 게, 예전에는 통했어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인정하고.”
“…….”
“안 그러면‘대마법사가 되는 방법’을 파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인 것 같은데…….”
강기찬의 당당한 엄포에 주은은 더 참지 못했다.
주은은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얹고선 강기찬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런 다음 강기찬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내 말 똑바로 들어. 네가 지금 갑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해 갑질 한 번 해보려고 하나 본데? 넌 상대를 잘 못 골랐어. 내가 지금 살해당할 위기에 놓였어도 너 하나 죽이고 황천길 뜨는 건 일도 아니야, 알겠어?”
강기찬은 주은을 무시하고 백령에게 귓속말했다.
[강기찬] 현무길드장, 현기현을 겁줘서 쫓아내.
[백령] 어.
강기찬은 백령에게 현무길드장의 현재 위치를 찍어서 전송해주었다.
[강기찬] 어느 정도 뒤쫓는 시늉도 하고…….
[백령] 알았어.
강기찬이 백령과 귓속말하는 사이,
‘뭐야? 왜 반응이 없어?’
주은은 짜증이 났다.
먹힐 만한 협박이었다.
살기까지 섞었으니까.
신규 유저라면 못 배긴다.
그런데 무반응이었다.
물론, 얼굴을 가려놓아서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손의 떨림이나 자세 같은 거로도 떠는지 안 떠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 않나.
‘확! 선글라스를 벗겨봐?’
그리 마음을 품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지금…….”
강기찬이 주은에게 말했다.
“… 백령이 움직였네.”
“뭐?”
주은은 약간 당혹했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하니까.
당연하게 헛소리로 치부했다.
지금껏 안 움직이던 백령이 움직인다고?
‘내가 가만히 있는데?’
목표물이 정지해있는데 저격수가 움직인다?!
백령 정도 되는 인물이 참을성 없어서 움직였다는 걸 믿으란 말인가?
‘아니, 그걸 떠나서 그걸 어떻게 알아? 그것도 고작 신규 유저 주제에……?’
자신도 맵을 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겼다.
‘저 말을 왜 한 거지?’
단순한 화제전환용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저걸 해서 상대가 얻는 게 뭐란 말인가?
괜한 불신만 심어줄 텐데…….
그렇지만, 반사적으로 시선은 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저, 정말…….’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 백령이 움직이잖아?’
돌이 된 건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던 백령이었다.
그런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저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주은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차라리 창밖으로 고개라도 돌렸으면 무언가 있겠거니 싶을 텐데, 창문과 등지고 앉아있었다.
신규유저가 다른 수단이 있을 리 만무한데? 무슨 수로 백령의 움직임을 포착한 걸까? 그것도 적어도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리에 있는데…….
그리 물음을 던지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여기 앉아있을 상황이 아니지 않나.
나가서 현기현을 돕던가, 버리고 도망치던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백령이 움직였다는 건 맹인검객도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럼, 맹인검객의 표적은 자신일 거다. 백령보다 훨씬 더 성가신 존재다.
‘온 김에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도 알아내고 가면 좋은 일이지만, 너무 다급한 상황이야…….‘
일단 대마법사의 증표를 손에 넣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마법사 길드원을 대마법사로 전직시키고 나서 집중 초단기 육성 기간으로 잡은 일주일만 시간을 더 벌면…….
그것만으로도 즉시 전력감이 되기 충분하니 이쯤하고 물러서면 되지 싶었다.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생존한 뒤 다시 만나 협박해서 알아내면 될 일이다.
그렇게 발을 내디디려던 그때였다.
“앉아, 안전하니까.”
“?!”
주은은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뭐라는 거야?’
누가 봐도 불안전한데 안전하다고 하니 황당했다.
하나,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신규유저 따위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시 나가려던 그때.
현기현의 귓속말이 귓전을 때렸다.
[현기현] 야! 이거 뭐… 습격이다! 도와줘!
강기찬과 주은이 동시에 카페 밖을 보았다.
- 꺄-아아악!
- 유, 유저협회에 연락해!
카페 밖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백령이 다짜고짜 현기현에게 공격을 가했고 주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기 바빴다.
그보다 더 멀리 있던 사람들에겐 의외로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유저가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유저끼리 싸우는 건 더 희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 저, 저 사람들 누구야?
- 싸우는데?
- 저 사람 옷 찢어진 거 봐, 어! 현기현이다!
- 현무 길드장 현기현!
- 둘이 싸운다!
둘 중 한 명의 정체가 드러나니 더 시끌벅적해졌다.
4대 길드 중 하나인 현무 길드장 현기현이라서.
- 둘이 싸우는 게 아니야!
- 현기현이 밀린다!
- 어? 현기현이 도주한다!
- 현기현이 탱커라서 어쩔 수 없어.
- 상대는 누구지? 아무리 탱커라도 현기현을 쫓아낼 정도면?
- 어? 현기현을 쫓아간다!
사람들의 이목이 현기현을 공격하는 자에게 집중되었다.
현기현을 저 정도로 압도하는 자는 한국에 몇 없기에.
각자 추측한 인물을 내뱉기 바빴다.
그것도 잠시,
슉- 슈슈슈슉!
카페 내부가 그늘이 졌다.
지금은 낮이었다. 정전도 아니고 정전이어도 이럴 수는 없었다. 곧장 그늘이 지는 원인을 파악했다.
‘… 무언가 막고 있어?’
무언가 여럿이 카페 밖을 가리고 서 있었다.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암만 봐도 저 거대한 기둥은‘다리’ 같았으니까.
그런 까닭에 카페 내부가 그늘이 진 것이다.
“내가 불러낸 거야.”
강기찬이 느긋하게 다 먹은 커피잔을 반납하러 가며 웅얼거렸다.
“저것들이 있으면 안전해. 그러니까 앉으라고.”
강기찬이 아수라 도깨비를 불러내 카페 밖에 밀착 배치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맹인검객에게 귓속말했다.
[강기찬] 카페 앞으로 와서 아수라 도깨비와 천천히 싸워줘. 네가 너무 약해서 밀리는 쪽으로 연출해주고.
[맹인검객] 알겠다.
맹인검객과 아수라 도깨비?
당연히 맹인검객이 압살할 거다.
그런데 맹인검객이 밀리는 쪽으로 연출하라?
누가 봐도 의심할 법한 장면이 될 거다.
그런데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맹인검객은 정체를 감추고 있었으니까.
아수라 도깨비도 마찬가지였다.
아수라 도깨비는‘시련의 공간 – 어둠’에 있었다.
아수라 도깨비를 본 이는 단 한 명, 강기찬뿐이었다.
‘시련의 공간 – 어둠’을 통과한 앤드류도 아수라 도깨비는 못 봤을 거다. 아수라 도깨비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공격을 피해 ‘시련의 공간 – 어둠’을 탈출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즉 양측 전투력을 세세하게 아는 건 강기찬뿐.
누가 이기게 연출을 하든 제삼자는 속을 수밖에 없다.
주은도 이에 해당했다.
완벽하게 속는 중이었다.
강기찬한테 유리한 쪽으로.
저 복면인이 맹인검객인 줄은 알았지만, 아수라 도깨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에.
그랬기에 더더욱 아수라 도깨비가 강해 보일 터.
자연스레 그 주인인 자신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 도깨비가‘비공식 세계 랭킹 1위’인 맹인검객을 처바르고 있는 거니.
주은은 카페 출구 앞에서 멈춰 선 채로 고민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도망치려 했다.
하나, 이젠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나.
창밖의 틈새로 보니 맹인검객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 저것들이 있으면 안전해.
정말 안전하지 싶었다.
‘이러면 괜히 도망치는 것보다는 이 안에 있는 게 나을 수도…….’
괜히 나가서 도망치면 맹인검객이 쫓아올 것이다.
맹인검객을 따돌리고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맹인검객한테 쫓겨본 적이 없었으니까.
반면, 여기 있으면 당장 도망치진 않아도 되었다. 저 소환 몬스터들이 있는 한.
달리 말하면, 저 소환 몬스터들을 치우는 순간,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저 소환 몬스터들을 치울 수 있는 게 바로 저 신규유저였다.
‘저 녀석 뭐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커피잔을 반납하고 온 강기찬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선 주은에게 손짓했다.
“야! 거래는 마저 끝내야지. 이리와.”
주은은 잠시 망설였다.
창밖에 시선을 떼지 못하며.
‘저 대치양상이 쉽게 뒤집힐 것 같진 않은데.’
무엇이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대마법사가 되는 방법’을 알아낼 여유는 있지 싶었다.
그러니까, 저자도 저렇게 당당한 거고.
‘어쩔 수 없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자석에 이끌리듯 강기찬의 맞은편 의자로 돌아왔다.
그러자마자 강기찬이 말했다.
“혹시 대마법사의 증표를 산 이유가 청용을 저지하기 위해서야?”
“…….”
“대마법사로 전직해도 레벨 1이잖아. 적어도 일주일은 기간이 필요한 거 아닌가? 즉시 전력감이 되려면…….”
“그건 왜 묻는 거지?”
“벌써 맹인검객한테 쫓기는 거 같은데, 일주일은커녕 오늘도 무사히 넘길지 모르겠는데, 대마법사 육성이 되겠어?”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어서 대마법사가 되는 방…….”
“이제는 눈치채야지.”
“뭐?”
“내 권속으로 맹인검객을 바르고 있잖아. 청용도 다를 거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