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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 테스트서버-87화 (87/151)

87화

“나보고 나크로서가 절망의 협곡에서 못 나가게 막으라고?”

“어.”

권유가 아니다.

강요다.

무조건해야 했다.

거절한다고 힘 빼봤자다.

“어떻게?”

강기찬도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 것일 터.

“따라와 봐.”

강기찬이 백령을 인도했다.

둘은 절망의 협곡을 나왔다.

몇 걸음 가다 멈춰 선 곳은 포탈 앞.

수그리고선 인벤토리에서 뭘 꺼냈다.

“그건… 걸레? 비누?”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강기찬이 포탈 바닥에 손을 가져갔다.

거긴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에 비누칠을 하는 게 아닌가?

이후, 물 묻힌 걸레로 닦았다.

슥- 스스쓰윽- 슥슥-스스슥-

그러자,

“어? 마법진이 지워지네?”

마법진이 지워지고 그 결과, 포탈도 사라졌다.

“!”

백령은 놀랐다.

마법진을 지울 수 있는 것도, 마법진을 지웠다고 포탈이 사라지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상상도 못 해보았기에.

강기찬이 걸레와 비누를 도로 인벤토리에 넣으며 일어섰다.

“네가 할 일은 이렇게 포탈 지우는 거야.”

“그러니까… 나크로서가 포탈 타고 절망의 협곡에 들어가고 난 뒤에…….”

“못 나오게 포탈 지우라는 거야.”

완벽한 방법이었다.

‘역시 강기찬은 무언가 있었어…….’

설마 이런 식의 접근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이런 건 어떻게 안 거야?”

“나도 혹시나 하고 시도해본 거야.”

물론, 그도 무작정 시도한 건 아니었다. 그 전에 여러 경험을 통해 시도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 덕분이었다.

왜 있지 않나.

현실의 화염방사기로 화재를 일으켰으며.

현실의 장갑을 껴 NPC를 만질 수 있었고.

현실의 물로 던전에서 숨이 막힐 수 있게 했다.

그 가능성을 포탈에 대입했을 뿐이다.

레전드스토리 공식 홈페이지 포탈 설명란에 고대의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려 포탈을 생성했다고 하니.

역으로 마법진을 지우면 포탈이 제거될 거라 본 것이다.

그렇게 현실의 비누와 물, 걸레면 지워지지 않을까, 상상력을 더해보았고 실천에 옮기니 되어버린 것.

“확실히 포탈은 막혀.”

적어도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터.

그것만큼은 확실해졌다.

“근데, 우려스러운 게 있네.”

“뭔데?”

“다른 탈출 방법이 있지 않을까?”

포탈만 막는다고 탈출을 막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때, 강기찬이 풀썩 웃었다.

백령은 영문을 모르니 의아해했고.

강기찬이 해명했다.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백령이 시키는 대로만 할 줄 알았다.

한데, 의견 피력까지 할 줄이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백령이 말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한 말이니까.”

“그래, 나야 좋지.”

“어떡할 건데? 다른 탈출 방법이 있으면?”

“다른 탈출 방법이라…….”

강기찬이 웃었다.

“내가 그거 생각 안 해봤겠어?”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어조였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나크로서가 작정하고 탈출한다면 탈출 막기는 어렵지.”

…자신 없을 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백령이 보기엔 분명 강기찬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패가 있을 거라고 보았다.

강기찬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백령이 물었다.

“나는 절망의 협곡 입구 포탈 근처에서 숨어있으면 되겠네?”

“어, 대기하다가 나크로서가 오는 게 보이면 바로 귓속말 해줘.”

“어.”

“이번 일 잘 끝나면 네 명예만큼은 회복시켜줄게.”

“명예?”

“길드 버리고 도주한 년. 그게 기사 헤드라인이던데?”

“…그건…….”

“알아, 알아. 거기다 강기찬 암살 녹음파일까지 있으니…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명예만큼은 완전히 조져버릴 수가 있지.”

“잠깐.”

“?”

“강기찬 암살 녹음파일이 뭔데?”

이때, 녹음기 소리가 났다.

지지지지직!

- 백령, 왜 강기찬을 죽이라 했지?

- 그러는 너는 왜 강기찬을 죽이지 않았지?

-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 …….

- 강기찬이 청룡길드에 갈까 봐, 그러면 청룡길드가 더 부흥할 테니, 그게 싫었다…….

백령이 인상을 구겼다.

“…….”

“녹음해놓았더라고. 여기다 내가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눈물로 장식하면 대박이지 않겠어?”

“…….”

“그래도 희망은 있어! 일 잘 마무리되면 특별히 녹음파일은 공개하지 않을게.”

“그럼, 길드 버리고 도주한… 은?”

“그것도 없었던 거로 처리해달라고?”

“…….”

백령은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왕 죽을 운명이라면 덜 추하게 후세에 기록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 내 한 말이었다.

“그건 내가 어찌해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강기찬이 부정적인 말을 하니, 백령도 약간 마음을 내려놓았다.

“물론, 백령이 길드 버리고 도주했다? 진실은 아니지.”

강기찬의 소환으로 테스트서버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백호 길드가 털리고 있을 때, 네가 테스트서버에 있었다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그것이 맹점이었다.

아니, 어떤 핑계를 만들어내도 곱게 볼 수 없다.

백호 길드가 털리고 있을 때 백령은 그 자리에 없었고 그 이후로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가뜩이나 대중한테 미운털이 박힌 판국에 회복시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야 강기찬도 여론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강기찬 암살 녹음파일만 없던 거로 해주겠다는 거야.”

“…….”

“피해자인 내가 이걸 덮어주겠다는 것도 엄청난 자비다, 알지? 마음 같아선 공개해버리고 싶거든.”

백령이 강기찬을 노려보았다.

“궁금한 게 있다.”

“질문은 안 받는다고 했을 텐데.”

“마지막이다.”

“좋아.”

“왜 날 바로 죽이지 않고 여기로 데려왔지? 이런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강기찬이 히죽 웃더니 물었다.

“걸레질 해봤어?”

“아니.”

“알고 있었어. 너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더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보고 살았다고. 원래도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잘 먹고 잘살았는데 유저하면서 네 부모보다 더 부와 명예, 권력까지 이루었지.”

“…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거 해보라고. 나를 위해서 걸레질한다는 게 네 인생이 밑바닥 쳤다는 증거니까.”

“…….”

“무엇보다, 너는 막 대해도 죄책감도 안 들 테니까. 너처럼 아무 죄도 없는 사람 죽이려고 암살자나 고용하는 새끼는 그래도 싸.”

“…….”

백령은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녀에게 강기찬이 말했다.

“너무 우울해하지마, 아직 살 기회는 있으니까. 계정만 넘기면… 혹시 계정만 뺏기고 팽 당할까봐 염려되면 경석에게 상담 신청을 해 봐. 걔도 나한테 계정 바치고 살아난 케이스니까. 아! 살려주는 조건이 좀 있긴 하지만…….”

강기찬이 포탈을 타고 넘어갔다.

백령은 이젠 확실하게 깨달았다.

‘강기찬은 기어코 날 죽일 생각인 거다.’

문득, 백령은 바닥에 놓인 비누와 걸레를 보았다.

‘어쩌면 지금이 도주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포탈을 지우고 도주한다면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백령은은 급히 무릎을 꿇고선 마법진에 비누를 가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강기찬] 야, 왜 지금 지우려고? 너 그 행동 책임질 수 있겠어?

“…….”

백령이 움찔하며 멈췄다.

‘이 자식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야?’

강기찬이 마저 귓속말했다.

[강기찬] 그거 지워도 내가 운영자한테 요청해서 복구 신청할 거야. 그러니까 괜한 짓 하지 마.

“…….”

[강기찬] 테스트서버는 내 앞마당이야. 도망 못 가.

백령은 마법진에서 손을 뗐다.

강기찬이 몰랐다면 도전해볼 만한 짓이었지만, 다 아는 마당에 이걸 하면 수명 단축밖에 안 되었다.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이게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시킨 게 아니라고. 자신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인 것이다.

‘내가 탈출 의지를 꺾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백령은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구 탈출 방법을 걱정했던 거지?’

좀 전에 NPC나크로서의 다른 탈출 방법이 뭐가 있을까, 떠올리지 않았나.

‘누굴 도와줘, 나나 걱정해야지…….’

얼마 뒤, 경석이 왔다.

백령이 그에게 물었다.

“… 너 강기찬을 죽이려 했었다면서?”

“어.”

“간도 크네.”

“지는.”

“야, 너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비법 좀 알려주라.”

“야? 야라고 했냐?”

“?”

경석이 세게 나오자 백령이 당황했다.

하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선 경석에게 삿대질했다.

“너 누구 앞이라고 언성을 높… 아악!”

빠악!

경석이 백령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야, 너 왜 반말이냐. 내가 너보다 짬을 더 먹었는데?”

“뭐? 짬?”

“그래, 여기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다. 내가 너보다 일찍 강기찬 밑에 들어왔으니까, 꼬박꼬박 존댓말 쓰도록 해. 알았냐?”

“하!”

백령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밖에서 만나면 말도 못 걸던 새끼가, 나한테 감히 손찌검해?!’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작금의 경석은 예전의 경석이 아니다.

더럽긴 해도 경석의‘짬’이 더 높았다.

싸워도 강기찬이 누구 편들지도 자명했고.

거기다,

‘듣자 하니 전설의 대마법사라던데…….’

예전 같았으면 절대 못 믿었겠지만, 이젠 믿기로 했다. 설사 전설의 대마법사가 아니라 해도 일반인인 자신보단 강할 테니.

“……후!”

“경석 선배님이라고 해봐.”

“…….”

“말해보라고.”

“겨, 겨겨경석… 후우- 못 해 먹겠다.”

“팁 줄 수도 있어. 어떻게 하면 강기찬이 살려주는지…….”

“하… 경석 선배님.”

“사실 그런 건 없어.”

“씨팔.”

“뭐? 너 방금 욕했…….”

그때였다.

[미르] 다들 준비해.

곧‘전설의 네크로맨서, NPC나크로서’가 온단다.

* * *

NPC나크로서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레전드스토리 본사에 취직했으니까.

솔직히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자신보다 스펙 뒤처지는 지인들도 다 간다는 레전드 대륙에 혼자 발을 딛지 못했으니.

억울한 마음에 레전드스토리 본사에 연락을 해보았다.

왜 자신만 제외냐고.

얼마 후, 알게 된 그 이유가 더 터무니없었다.

너무 뛰어나서.

그래서‘고객’인 용사들이 거부했단다.

그러다가 오게 된 기회.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이번엔‘고객’인 용사가 불러 달란다.

왜 이전과는 다른 반응이냐고 물었더니,

- 지금은 용사님이 딱 한 분인데, 그분이 원하셔서…….

‘정말 고맙군.’

그는 진심으로 용사에게 감사했다.

그 용사가 아니었다면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을 테니까.

레전드스토리 본사 입사.

연봉, 복지, 다 훌륭했고‘근무환경’도 마음에 들었다.

‘그냥 절망의 협곡에 가서 용사가 올 때까지 있기만 하면 되잖아, 용사 오면 대충 권속 몇 마리 보내서 쫓아내면 되고. 사실상 나는 놀면서 돈 버는 거지.’

손님 한 명인 가게인데 그 한 명한테도 장사 대충해도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격이다.

무엇보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레전드스토리 본사의 사원이 되면‘다쳐도 아프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지니게 된단다.

‘이제는 물에 빠져도 숨이 막히지 않게 된다는 거지? 물 공포증이 있는데… 후후.’

“자, 그럼 가볼까?”

NPC나크로서가 홀가분하게‘절망의 협곡’으로 향하는 포탈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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