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내 계좌 입금액 : 300,000,000,000원]
강기찬은 백령으로부터 3,000억 원을 챙겼다.
[VIP 캐시 상점 입장료 : 415,310,000,000 / 1,000,000,000,000원]
이로써 VIP 캐시 상점 입장료까지 41.5%!
‘머지않았네.’
강기찬은 흐뭇해하며,
“자.”
백령에게 백호의 갑옷을 주었다.
“…….”
“이제 테스트서버로 가야 하는데…….”
백령이 든 백호의 갑옷을 보며 물었다.
“그거 무겁지 않겠어?”
무겁고말고.
유저일 땐 안 무겁다. 무게를 생략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 신분.
상당히 무겁다.
그런 의미에서 강기찬이 물어본 거다.
유저가 아니라 인벤토리에 보관도 못 하니까.
‘객관적’으로 백호의 갑옷은‘짐’인 것.
“내가 맡아줄게.”
강기찬이 맡아주는 것.
얼핏 보면 선의다.
하나, 한 짓이 있는데 선의로 비칠 리가.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그래.”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시키면 따라야 했다.
막말로 강기찬이 뺏으려 한다면 뺏을 수 있기에, 거절의 의미가 없었다. 고분고분 넘기는 게 신상에 좋았다. 여기서 더 불편해지는 것보다는 말이다.
백령이 강기찬에게 백호의 갑옷을 넘겼다.
강기찬이 백령에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나는 약속은 지켜. 진짜 맡아만 줄 거다. 네가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백령은 전혀 걱정을 덜지 못했다.
죽으면 가진다는 의미로 해석해서.
아니, 그쪽이 더 가깝겠지.
하나, 중요치 않았다. 그깟 갑옷이 중요하겠는가. 강기찬이 죽음을 언급한 판국에.
‘죽음…….’
랭커 유저라면 숱하게 염두에 두는 단어다.
실제로 직종 중에서 사망률 1위가 유저니까.
하지만, 이만큼 절절히 느껴지긴 처음이다.
백령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걸 느꼈다.
‘이 자식은 날 살려둘 마음이 없구나.’
일전에 스스로 파리목숨이라고 칭했는데, 실질적으로 파리목숨만 못했다. 파리는 자유로이 날아다녀 살 수 있는 여지라도 있지, 자신은 강기찬의 손뼉 한 번에 죽을 신세이기에.
그래서일까?
“어… 저기 미안하다.”
저도 모르게 사과부터 나왔다.
이렇게라도 하면 생존율이 올라갈까 싶어서.
강기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뭘 미안해하는데?”
“… 널 죽이려 했던 거.”
“너는 좀 이르네.”
“뭐가?”
“경석이는 좀 늦게 사과했었거든.”
백령의 눈이 커졌다.
“그 자식도 널 죽이려 했었나?”
“어, 왜 이렇게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몰라.”
강기찬의 투덜거림에 백령은 하고픈 말이 있었다.
‘다들 너를 죽이고 싶을 만하지.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아…….’
…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 했다. 말하면 당장 죽을 수도 있으니.
“…….”
“…….”
잠깐의 침묵 끝, 강기찬이 물었다.
“살려달라고 안 하네?”
“내가 한 짓이 있는데.”
“털끝만큼의 양심은 있네. 그런 의미에서…….”
강기찬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 계정 넘겨.”
“뭐?”
백령은 제 귀를 의심했다.
계정 넘기라고?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감히 누가 자신에게 그딴 소리를 한단 말인가?
아니,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소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상호 간에 금기시되는 거니까.
레전드스토리 측에서 놀랍게도 계정 거래를 막지는 않았지만, 수면 위에서 계정 거래가 된 적은 없었다.
그걸 강기찬이 시도하는 것.
“뭐라고?”
“미안하면 네 계정 넘기라고.”
“되게 뻔뻔하구나.”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이로써 백령은 제 뜻을 밝혔다.
자신의 계정을 넘기는 것을 거절한다고.
‘살려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어떻게 넘겨? 아니, 살려준다는 보장이 있어도 못 할 짓이다.’
무려 랭킹 2위의 계정이다.
이걸 넘기면 자신은?
부와 명예, 권력,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셈.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다면 모를까,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보았다.
‘차라리 죽고 말지.’
강기찬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경석도 처음엔 거절했지. 테스트서버의 버려진 세계에 가두기 전까지는…….’
백령의 계정이 급한 건 아닌지라, 이쯤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는 백령이 해줄 역할이 있기에.
“계정 넘기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럼 내 일 좀 도와주라.”
“그럼, 나도 부탁 좀 하자.”
“뭔데?”
백령이 말했다.
“… 나랑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
“제대로? 방금, 제대로 붙은 건데?”
“치사하게 늦게 나타나서…….”
강기찬이 낮게 혀를 찼다.
“야, 치사?
“내가 스킬을 다 뺄 때까지 기다린 거 아닌가?”
강기찬의 등장 시기는 아무리 봐도 우연이 아니다.
철저히 계산 하에 진입한 거로 추정했다.
“맞아.”
“…….”
“근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나 암살자야.”
“…….”
“암살자는‘물몸’이니까, 딜러 스킬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나타나서 폭딜 넣어서 마무리 짓는 건 상식 아닌가?”
강기찬이 다 알면서 왜 묻느냐는 얼굴을 했다.
여세를 몰아 쏘아붙였다.
“왜? 궁수한테 근접전으로 안 싸우면 치사하다고 할 건가?”
“…….”
백령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라서.
애초에 비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직업마다 전투 방식이 있고.
강기찬은 암살자의‘정석’ 전투 방식을 따랐을 뿐이니까.
“또… 내가 너보다 레벨도 낮은데 어떻게 정정당당하게 싸울 수 있겠냐? 안 그래?”
“… 그래. 그럼, 이거라도 답 해줘.”
강기찬의 일을 맡기 전에 호기심 하나는 풀고 가고 싶었다.
“네 레벨로 어떻게 나한테 데미지를 입힌 거지?”
“급소는…….”
“알아! 생명력이 5% 미만일 때! 그리고 급소는 레벨 격차 무시하고 데미지 들어가는 거!”
“알고 있네.”
“근데 두 경우 다 해당 사항이 없잖아!”
레전드스토리에서 인정되는 급소는 오직 두 곳.
정면에서 바라보는‘목’
그리고‘심장’이었다.
따라서 백령의 의구심은 타당했다.
팔과 목덜미에선 MISS가 떠야 했는데 데미지가 떴으니.
“가르쳐 줄까?”
“그래.”
“나는 레전드스토리의 모든 법칙을 무시한다.”
강기찬이 호언장담했다.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그 예로 청용과 NPC화타가 존경의 눈빛을 담아보았다.
강기찬이 이어 말했다.
“질문은 더이상 안 받는다.”
백령도 위와 같았다.
더는 할 질문이 없었다.
가진 상식으로는 말이 안 통할 거 같아서.
대신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내가 죽이고 싶은 NPC가 있거든. 도움을 줬으면 해.”
“NPC? 누군데?”
“전설의 네크로맨서, NPC나크로서.”
백령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자.”
강기찬이 손을 내밀었고 백령이 맞잡았다.
청용과 NPC화타도…….
그와 동시에 테스트서버로 이동했다.
* * *
[현재 위치 : 테스트서버 - 버려진 세계 - 절망의 협곡]
백령은 솔직히 강기찬이 이동한계선을 넘나들 수 있다는 걸 안 믿었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원을 보내 접선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도 그랬었고.
그러나 막상 이동한계선 너머의 버려진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니 영 싱숭생숭했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오셨습니까.”
테스트서버에 있는 존재들이 하나같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
한국 랭킹 1위, 청용.
공식 세계 랭킹 1위, 대마법사 앤드류.
비공식 세계 랭킹 1위, 맹인 검객.
전설의 대마법사라는 경석.
세계 최고의 힐러, NPC화타.
거기에 강기찬보다 급이 높아 보이는 정체불명의 여성까지?
‘공식 & 비공식 세계 랭킹 1, 2위가 다 모인 거네…….’
‘한국 랭킹 2위’라는 타이틀이 이처럼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뭘 한 것도 없는데 벌써 기가 꺾였다.
국내에서 뛰던 축구선수가 해외에 나가면 이럴까?
‘내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이때까지의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또다시 청용이 한 말이 떠올랐다.
강기찬을 일컬어,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묘사했던 것.
- 실상을 안 거지. 이 세상이 누구 손아귀에서 놀아나는지를.
‘맞는 말일 수도…….’
전설의 네크로맨서라는 NPC나크로서 처치.
다른 이였다면 미친 짓이라고 했겠지만, 왠지 강기찬은 가능할 것 같달까?
‘이 자식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지?’
이전에는 강기찬이 여태 보여준 게 다가 아닐 것 같아서 불안했다면 이젠 앞으로 무엇을 보여줄지가 기대되었다.
가능하다면 그 끝을 구경하고 싶었다.
“오셨습니까!”
강기찬이 오자 GM미르 빼고는 모두 예를 갖추었다.
이를 본 백령은 속으로 감탄했다.
밖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할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강기찬은 저 대단한 자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한편, 강기찬이 백령을 소개했다.
“여긴 백령, 한국 랭킹 2위… 였지.”
씁쓸한 마무리였다.
한국 랭킹 2위가 과거의 전적이 되어버렸으니까.
백령은 내심 놀랐다.
‘생각보다는 안 씁쓸한데?’
과거엔 랭킹에 집착했었다.
그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런데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은 이랬다.
‘강기찬이 있는데 랭킹이 무슨 의미겠어.’
강기찬이란 존재로 인해 랭킹의 의미는 무색해졌다. 레벨이 너무 낮아서 랭킹표에 들지도 못하는 인간이 강기찬 아니던가.
그런 강기찬의 실상이 이랬다.
랭킹이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리가…….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불현듯, 백령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내가 이 남자를 가지면 그게 곧 세계 최고라는 거잖아?’
자신이 1위가 될 수 없다면 이미 1위인 자의 아내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강기찬 정도면 내 남자가 될 자격이 충족되고말고…….’
백령은 마음을 굳혔다.
‘강기찬을 내꺼로 만들자.’
강기찬을 꼬시기로 했다.
그 흑심을 모른 채 강기찬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머지도 시선을 돌렸다.
척, 처척.
모두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향했다.
“저기가 절망의 협곡이야.”
강기찬이 백령이 들으라는 듯 말을 시작했다.
말로는‘보이지 않는 벽’이라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가 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좀 전에 네가 빠졌던 곳이지.”
백령의 테스트서버에 대한 첫인상이 안 좋은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결 나아졌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마치 수족관을 보는 기분이었다.
협곡을 저렇게 인위적으로 물로 채울 수가 있던가?
강기찬이 백령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신기하지?”
“어? 어어.”
“저게 가능한 건, 저 물이 현실의 물이라서 그래.”
테스트서버 안에서 저만한 물을 특정 공간에 가득 채우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다른 데서 물을 떠 올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스킬 중에 저만한 물이 나올 수도 없을뿐더러 나온다 해도 금세 사라지니.
백령은 이해했다.
그다음에 나올 건,
“저 물로…….”
“어, 나크로서를 익사시킬 거야.”
“나크로서는 어디 있는데?”
“지금 오고 있어. 저 포탈로 들어올 거야.”
“근데, 들어오자마자 바로 나가려 하지 않을까?”
“잘 짚었네.”
“뭐?”
“그거 막는 거, 그게 네가 할 일이야.”
“!”
자기들보다 더 센 놈을 막으란다.
일반인보고.
백령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