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백령의 탈출 방법은 딱 하나였다.
‘정말 이곳이 테스트서버의 던전이라면, 로그아웃이 되지 않을까?’
백령은 즉각 실행에 옮기려 했다.
물론 로그아웃해봤자 맹인 검객도 뒤따라 나올 터.
얼핏 지금 상황과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그런 까닭에 특별조치를 취한 뒤에 로그아웃하기로 했다.
후-아아아악!
[살기를 방출합니다.]
살기를 뿜으면서 로그아웃했다.
뒷일을 상상하면서-
‘내가 쏜 살기에 강기찬이 자제력을 잃고선 바다로 빠질 거고, 맹인 검객은 구하러 가겠지.’
완벽한 계획이었다.
변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번 시간을 틈타 멀리 달아나면 될 터.
그야말로‘안전한 도주’가 될 것이다.
* * *
“나갔네?”
“쟤도 바보는 아닌 거지.”
강기찬과 맹인 검객은 당황하지 않았다. 백령이 로그아웃할 줄 알았으니까.
‘백령도 낯선 장소에 왔으니 맵을 볼 거고, 테스트서버인 걸 알았으면 로그아웃을 시도해봄 직하니까.’
오히려 로그아웃 안 했으면 실망했을 거다.
그리고 알려주었을 거다.
로그아웃하면 나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좀 나가라고.
왜냐하면, 백령이 나가는 것도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살기로 나도 쓰러뜨리고 맹인 검객도 따돌리고, 탈출 성공했다고 여기겠지? 그런데 어쩌나…’
강기찬이 백령을 걱정했다.
‘…나가면 더 지옥이야, 이 친구야…….’
* * *
백령은 현실로 귀환하자마자‘길드 전용 전체 귓속말’을 보냈다.
[백령] 야! 애들 다 모아… 전쟁이다!
맹인 검객, 단 한 명 상대하는 거다.
하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어색함은 없으리라.
이후, 10초… 20초… 30초… 40초…….
기어코 1분이 넘었을 무렵에서야,
[백령] 뭐야? 왜 말이 없어? 야! 이것들아!
백령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1대1도 아닌‘길드원 전체’귓속말이다.
길드원은 못 들을 수가 없다.
자고 있을 때도 귓가에 목소리가 꽂히는 절대 통보.
심하게는 수면 내시경 하다가 깰 정도라고 한다.
그랬기에 길드 설립 이래 딱 한 번 썼을 정도다.
이번엔 길드원들을 총집합 시켜 맹인 검객을 막게 하려 했다. 그런다고 맹인 검객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멀리 도주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왜 말이 없지?’
응답하는 길드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니, 그것보다 아무도 응답 없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어떡한담…….’
원인을 알려면 백호길드로 가면 되었다.
하나, 왠지 가기가 꺼려졌다. 맹인 검객이 그리로 올 것 같아서.
일단 멀리 피신하면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재빨리 스마트폰을 켰다. 백호길드에 무슨 일이 터졌다면 뉴스에 떴을 수도 있었다.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을 봤는데,
“!”
실시간 인기검색어에 백호길드가 떠 있었다.
1. 청룡길드 & 백호길드 전쟁.
2. 백호길드 마스터, 백령 도주.
“나도 모르게 길드전을 하고, 나는 도주했다고? 미친…….”
짤막한 검색어만 봤음에도 사태파악이 끝났다.
“청용, 이 개자식이……!”
청용이 자신의 공백을 틈타 기습적으로 길드전을 터트린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그 과정이 궁금했다. 전쟁 과정과 결과는 길드 기록을 열람하니 확인할 수 있었다.
[길드석이 파괴되어 길드전에서 패배했습니다.]
[길드의 운명은 청용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길드원이 전부 탈퇴 당했습니다.]
‘길드원들이 전원 강제 탈퇴 당했으니 ‘길드 전용 전체 귓속말’이 되지 않은 거구먼…….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겼다.
자신이 테스트서버로 넘어간 지 불과 30분도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안에 길드전이 끝났다?
‘길드전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끝이 난 거다…….’
길드전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못 믿겠다.
하물며 끝났다고 하니 더더욱 못 믿겠다.
30분 안에 길드전이 끝이 나려면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준비했다는 게 되었다. 그것도 속전속결로‘길드석’만 ‘파괴’할 수 있게끔.
‘이 정도라면 사전에 내가 부재할 거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백령의 부재.
청용은 이를 미리 알고선 일찍이 길드전을 준비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기록을 보니 자신이 사라진 직후, 바로 길드에 침입자가 발생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청용이 어디서 정보를 구했는지도 자연스레 답이 나왔다.
‘강기찬…….’
강기찬이 청용에게 귀띔을 해두었을 터.
‘이 자식이, 나만 건드리려 했던 게 아니었던 건가… 아니, 청용이 시킨 거겠지.’
청용이 시켰다 한들, 강기찬을 죽이고픈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두고 보자…….’
타닷, 타타탓!
백령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해졌다. 지금 맹인 검객만 걱정할 게 아니구나…….’
예상대로 맹인 검객이 뒤쫓는 기색은 없었다. 살기로 바다에 빠진 강기찬을 수습 중이리라.
‘후, 백령아! 정신 차리자! 아직 기회는 있다고!’
스스로 다그쳤다.
백호길드가 공중분해 되었다.
하나, 백호길드원이 전멸한 건 아니다.
백호길드가 공중분해 된 것은 단지 길드석이 파괴된 결과일 뿐이니까.
‘백호길드원들을 규합해 다시 일어선다……!’
인터넷을 보니 현재 백호길드원들이 각지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전세가 밀리긴 했으나, 자신이 나타난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들의 구심점이 되어준다면 말이다.
물론, ‘백호길드원 ’으로 있을 때 함께 싸우는 것과는 전투효율이 몹시 나쁠 것이다. 같은 길드라 가능한 각종 버프와 정보 전달이 이제는 불가능해졌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우는 수밖에.’
그렇게 뛰어가려던 찰나.
“어이.”
백령이 고개를 돌렸다.
청용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예상은 했었다. 자신이 테스트서버에서 나왔다는 걸, 강기찬이 청용에게 일러바쳤을 테니.
‘잘됐네.’
어차피 청용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 전쟁의 끝은 결국 길드마스터에게 달렸기에.
여기서 청용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더 잘된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동안 서로에게 이런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화난 건 화난 거다.
“… 너……!”
백령의 분노가 실린 음성이 쏘아졌다.
하나, 청용은 여전히 차가웠다.
“강기찬님께서 말씀하셨지. 네가 나올 수도 있으니 자리를 지켜달라고. 다행이야. 그분에게 보탬이 될 수 있어서.”
백령은 의아했다.
“그분… 누가?”
대충 감은 잡혔지만, 현실성이 떨어졌다.
“귀가 먹었나? 강기찬님 말이다.”
“강기찬님?”
“그래.”
“자, 잠시만…….”
백령은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때까지 청용이 시키고 강기찬이 따른 줄 알았다. 그게 정상적인 사고로 가능한 추리였으니까.
그런데 어째 그 반대일 것 같나.
‘강기찬이 시키고 청용이 따른 거라고?!’
확인이 필요했다.
“왜 그놈에게‘님’자를 쓰는 거지?”
“그게 예의니까.”
“너… 단단히 미쳐버렸구나?”
“미쳤다기보다는 실상을 안 거지. 이 세상이 누구 손아귀에서 놀아나는지를.”
“그게 미친 거야. 미친 새끼야!”
“… 이해는 한다. 내가 너라도 이해 못했을 테니까.”
청용은 미쳤다는 소리에도 태연했다.
이에, 백령은 더 화가 났다.
하나, 간신히 추스르고 이성 있는 질문을 했다.
“청용! 하나만 묻자, 왜 뜬금없이 길드전을 터트린 거지?”
“맹인 검객에게 들었다. 네가 날 암살하려고 했었다는 걸.”
“하지만 결국 암살하지 못… 그래, 그렇다.”
백령은 결과적으로는 암살하지 못했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못 한 거지, 돈이 있었다면 했을 터.
사실상 청용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용이 말했다.
“이건 여러 이유 중 하나다. 결정적인 이유는 이거지.”
불현듯, 녹음기 소리가 나왔다.
지지지지직!
- 백령, 왜 강기찬을 죽이라 했지?
- 그러는 너는 왜 강기찬을 죽이지 않았지?
-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 …….
- 강기찬이 청룡길드에 갈까 봐, 그러면 청룡길드가 더 부흥할 테니, 그게 싫었다…….
맹인 검객이 백령의 말을 녹음했던 것, 강기찬이 청용에게 전송한 것이었다.
“감히 그분을 암살하려 해?”
청용은 불같이 화를 냈다. 강기찬 암살을 떠나 이건 청룡길드에 대한 도전장이니까.
공식발표만 없었을 뿐, 강기찬이 청룡길드에 있어 어떤 존재인지는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런 강기찬을 건드리려 했다는 거 아니겠나.
동시에 기회였다.
안 그래도 틈날 때마다 시비를 걸어왔던 백호길드였다.
그런데도 마땅한 명분이 없어 큰 전쟁까지는 이어가지 못했는데, 청룡길드의 귀인을 암살하려 했다? 이거야말로 꽤 괜찮은 명분이었다.
길드석만 파괴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실, 저 방식은 자칫 치사하게 보일 수 있어서 길드 이미지엔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청용이 적극적으로 행동한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강기찬] 제가 백령을 격리해둘 테니 그때 일을 보시면 아주 수월하실 겁니다.
백령이 괜히 2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수월하게 풀리진 않았을 터. 성공하더라도 심각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한데, 강기찬이 백령을 격리해준단다.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가 온 셈. 마다하면 바보였다.
청용이 백령에게 말했다.
“넌 길드를 버리고 도망간 비겁한 군주로 낙인찍혔어.”
“네가 언론에 퍼트렸지?”
“아니, 기자들이 알아서 소설을 쓰던데. 그게 아닌 걸 알아도 정정할 이유는 없으니. 세상이 그렇잖아. 억울한 사람이 해명해야 하는 거.”
“허…어…….”
“어떡할래?”
“뭘?”
“죽은 자는 말이 없지. 반면, 산 자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살아서 언젠가는 변명할 수 있게 할래? 아니면 도망치다가 실종, 사망으로 네 인생의 마지막 글귀가 되게 남길래?”
“…….”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강기찬님께 목숨을 구걸해라. 혹시 알아? 자비를 베풀어주실지…….”
백령은 청용을 노려보았다.
“너처럼 그 얼간이의 밑에 들어가는 것보단 죽음을 택하는 게 나아.”
“너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백령도 제 목숨 귀한 줄 알았다.
다만, 아직은 목숨 구걸 단계가 아니라 여겼다.
‘청용만 쓰러뜨리면 된다.’
청용만 쓰러뜨리면 도주하는 데 문제는 없을 터.
‘해볼 만한 싸움이야.’
그녀보다 청용이 랭킹이 높은 건, 단지 누적 경험치가 더 많아서일 뿐이다. 때문에, 싸우면 결과는 미지수다. 1대1로는 싸워본 적이 없었기에.
‘해보자.’
백령이 삽시간에 청용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남들 눈엔 그저 지나치기만 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사이 수차례 일격을 가한 것.
그 증거로 그녀의 손톱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청용의 피다.
청용도 마찬가지였다. 백령이 다가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옆구리를 찔렀다. 관통상으로 움찔거리는 사이에 창을 회전시켜 상처 부위를 벌려 출혈을 증대시키기까지 했고.
딱 0.87초 걸린 공방이었다.
먼저 표정 변화를 보인 건, 백령이었다.
‘역시……!’
백령이 입가에 은은한 웃음기를 그렸다.
‘치명상을 입혔다……!’
자신도 치명상을 입었다.
그건 문제없었다.
청용도 팔을 잃어버렸으니까.
기세를 몰아 2차 공격을 위해 급히 돌아섰다.
그때였다.
“!”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