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뭐?”
“앞을 보게 해줄 수 있는데?”
“…….”
맹인 검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대단하네. 대단해. 앞을 보게 해줄 수 있다니?”
절대 진지하지 않은 말투였다.
“어떻게 할 건데? 저 화타라는 양반이 해주려나?”
이에, NPC화타가 강기찬을 보고선 물었다.
“이따위 태도로 나오는데도… 고쳐줘야 합니까?”
강기찬이 진중하게 부탁했다.
“예, 해주셨으면 합니다. 믿지 못하니까 저럴 수 있는 거지. 기적을 행해주신다면 저 버르장머리도 스스로 고칠 겁니다.”
“하… 용사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하지만, 만약 고쳐주었는데도 여전하다면, 그땐 제 손으로 본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지요?”
“예, 그땐 저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간절함이 전혀 없는데도 고쳐주는 건 오롯이 용사님을 봐서입니다.”
맹인 검객이 혀를 차더니 외쳤다.
“… 하 듣자 듣자 하니까, 뭐-어? 누구 맘대로? 너희들이 내 눈을 고친다 마라야?”
NPC화타가 화답했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게다.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기다란 침을 맹인 검객의 정수리에 꽂았고, 맹인 검객이 조용해졌다.
* * *
뿌옇던 시야가 초점이 잡혀갈수록…….
‘뭐, 뭐…… 뭐?!’
맹인 검객은 사고가 늘려져 갔다.
기어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벌떡.
“하… 하…… 하……….”
제 손바닥을 보고, 뒤집어서 손등을 보았다.
그리고 하체, 발끝, 침대, 벽, 천장, 방 전체를 훑기까지.
뺨을 매만졌다. 더듬거릴수록 촉감이 생생하다.
꿈인 줄 알았다.
꿈이 아닌 걸 알았을 즈음에는 누군가를 찾았다.
“가, 강기찬! 강기찬 어디 있어!”
저벅, 저벅.
누군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고…….
“네가 강기찬이야?”
“나는 화타다…….”
“아…….”
목소리가 NPC화타였다.
“저기… 이거… 꿈 아니지?”
퍽!
NPC화타가 맹인 검객에게 꿀밤을 먹였다.
“당연히 꿈 아니지, 이 녀석아.”
“허-어… 대체 어떻게 한 거…….”
그제야 맹인 검객은 NPC화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화… 화타라고?”
같은 이름이지만, 얼굴까지 대조해보니 확실했다.
홈페이지에 실려있던 그 NPC화타라는 걸…….
“그래, 내가 뭐 다른 화타인 줄 알았느냐?”
“아니, 이게 무슨…….”
“누구나 날 사칭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내 경지를 따라올 수 없느니라, 어때… 앞이 잘 보이느냐?”
끄덕.
맹인 검객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잘, 잘 보여… 너무 잘 보인다고!”
“왜 소리를 지르느냐?.”
“너무 좋으니까!”
“다행이군. 혹시나 괜한 짓 하나 했는데 말이지.”
“이거… 꿈 아니지?”
“아 글쎄, 그렇다니까 그러네! 속고만 살았느냐?!”
“어.”
“뭐……?”
“내 눈 고치게 해주겠다고 한 것들, 다 사기꾼에 돌팔이 새끼들뿐이었거든.”
“… 고생이 많았겠구먼.”
맹인 검객이 침대에서 내려와 NPC화타에게 말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은혜는 내가 아니라 강기찬 용사님께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처럼 싹수없는 것을 고쳐주지 않았을 테니까.”
NPC화타의 말에 맹인 검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강기찬은 어디 있지?”
“용사님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시다.”
“출타? 어디로? 이 시간에?”
오후 11시 20분, 야심한 밤이었다.
NPC화타가 말했다.
“지구에 없으시지.”
“뭐?”
“놀랄 거라더니, 정말이로군. 이곳은 차원 이동에 대한 개념이 없구먼…….”
“지구에 없다니?”
“더는 말해줄 수가 없느니라.”
“그 자식은 뭐 이렇게 비밀이 많아? 근데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야?”
“강기찬 용사님의 은혜를 입은 건 너 하나뿐만이 아니니라.”
“뭐?”
“나도 강기찬 용사님의 은혜를 입었지.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라, 이렇게 곁에 머물며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있는 것이고…….”
NPC화타가 강기찬에게 은혜를 입었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믿지 못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믿을 수 있었다.
“… 언제 오는데?”
“40분 뒤에…….”
“지구 밖으로 나갔다며? 근데 그렇게 빨리 돌아와?”
시계를 본 게 아니지만, 체감상 강기찬이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이에, NPC화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용사님에게 물리적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네.”
‘뭐라는 거야?’
맹인 검객은 NPC화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넘어갔다.
맹인 검객이 대충 실내를 둘러보고 있을 때쯤,
“떠날 거냐?”
NPC화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본 맹인 검객이 대답했다.
“아니, 일단 강기찬은 만나야지.”
애초에 강기찬을 기다리기로 했다.
적어도 그에게 감사함은 표해야 할 테니.
시간이 길어져도 그래야 했다.
하물며 40분 뒤라고 하니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를 들은 NPC화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멋대로 나가려 했다면 내가 제압해야 했을 터. 꽤 귀찮아졌을 테니.”
“…….”
“아직도 용사님을 해칠 마음이 있는 거냐?”
“미쳤어? 나도 은인은 구분한다고.”
“뭐 미쳤냐고? 나는 은인 아니냐? 이년아?”
“아, 맞네. 미안.”
그때였다.
띠리링- 덜컥.
강기찬의 오피스텔 현관문이 열렸다.
“야,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김만수 전 매니저가 들어왔고…….
“엉?”
NPC화타와 맹인 검객을 번갈아 보았다.
“누구……?”
맹인 검객이 대뜸 검을 꺼내 김만수에게 겨누었다.
“너는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
“엥? 잘못 찾아왔습……?”
쾅!
김만수는 황급히 현관문을 다시 닫았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는데 들어가긴 겁나서.
‘방금 저 여자… 속옷만 입고 있었지? 강기찬 이 자식은 그새 여친을 갈아탄 거야? 아니면 양다리인 거야? 근데 그때 걔도 그렇고 하나같이 정상이 없지? 기찬이 취향인 건가?’
* * *
< 테스트서버 >
경석 아버지에게 받은 100억 코인.
강기찬은 NPC네크에게 주었다.
그 대가로 전설의 네크로맨서, NPC나크로서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띠링!
《 전설의 네크로맨서 전직 퀘스트 》
[등급] 최초
[난이도] 헬
[목표] 전설의 네크로맨서, NPC나크로서 처치.
[성공 시] 전설의 네크로맨서 전직.
[제한 시간] 없음
[진행 상황]
1. 네크로맨서 전직 교관 NPC네크의 조력을 받음.
2. NPC나크로서의 레벨은 4,700이었음
(지금은 더 높아졌을 거로 추정됨)
* 2차 전직이기 때문에 1차 전직의 4,700레벨과는 비교를 불허.
3. 절망의 협곡에 있음.
“어떡할 거야?”
강기찬의 곁에는 GM미르, 그리고 경석이 있었다.
NPC화타는 맹인 검객을 돌봐주어야 했기에 현실에 남았고 그 빈자리를 GM미르가 메워주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절망의 협곡으로 가야죠. 거기 가라고 하는데…….”
옆에서 경석이 GM미르에게 물었다.
“도와주실 수 있어요? 운영자인데?”
GM미르가 웃었다.
“못 도와줄 게 뭐야? 지금은 운영자 아닌데.”
강기찬이 거들었다.
“지금은 네크로맨서이시지.”
그랬다.
GM미르는 강기찬을 사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
GM미르는 운영자고 강기찬은 유저이니까.
하지만, 신분세탁을 하면 괜찮았다.
겉보기에 GM미르인지만 모르면 되었고.
때마침 NPC화타의 부재로 네크로맨서 계정이 공석이었다.
GM미르가 네크로맨서 계정으로 로그인한 상태다.
대놓고 운영자라고 홈페이지에 찌르지 않는 한, 문제 될 건 없었다.
비밀만 지켜진다면 이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강기찬은 GM미르가 함께해주어서 좋았다.
‘화타님이 없어서 하는 소리지만, 움직임 자체가 화타님보다 나아…….’
아무래도 전투와는 전혀 관계없는 직종이었던 NPC화타보다는 GM미르가 좀 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싶었다. 물론 피지컬이 그다지 필요 없는 네크로맨서이긴 하지만.
“절망의 협곡은 보통 절망을 머금은 자들만이 갈 수 있지.”
“잘 아시네요?”
경석의 칭찬 섞인 물음에 GM미르가 쪼갰다.
“내가 거기 설계했잖냐.”
“오오… 큰 도움이 되겠는데요?”
“혼자서 다 한 건 아니라도 너희들보다는 잘 알겠지.”
“어떻게 해야 절망을 머금은 자가 될 수 있죠?”
경석이 궁금해하자 GM미르가 곧바로 말해주었다.
“죽는 것.”
“예?”
“유저가 절망에 빠지는 방법이 뭐가 있겠어? 죽는 거지. 죽으면 들어갈 수 있어.”
강기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으면 로그아웃으로 튕기는 거 아니에요?”
던전 밖에서 죽으면 로그아웃되었다.
지구서버(현실)에서는 일반인이 되지만.
테스트서버에서는 지구서버(현실)로 퇴장당해야 했다.
GM미르가 답했다.
“안 그런 곳이 몇 있지.”
경석이 끼어들었다.
“이동한계선 너머, 버려진 세계. 거긴 던전인데도 로그아웃해도 안 튕겼지.”
경석의 경험담이었다.
버려진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로그아웃했는데 실패하지 않았나. 되레 일반인이 되어 포탈도 못 탔고.
그때 기억은 잊을 수가 없었다.
GM미르가 말했다.
“맞아, 여기도 그래. 죽어도 안 튕겨. 대신…….”
“사망자의 시점 상태로 돌입하겠군요.”
“맞아, 영혼인 상태로 절망의 협곡으로 넘어가면 돼.”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히든피스니까, 레전드스토리의 히든피스가 그렇잖아. 알고도 그게 되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상식을 깨트리는 것. 그래서 알기 전에는 더 찾기가 힘든 법이지.”
“어쨌든 된다는 말씀이네요.”
“어.”
경석이 순수하게 물었다.
“그런데 굳이 죽을 필요가 있나요? 기본적으로 경험치가 손해인데? 다 아시면 혼자 가셔서 퀘스트 대신 깨주면 안 돼요?”
“그럴 수도 있는데, 혼자서 깰 수가 없어.”
강기찬은 이해했다.
그가 깼던 네크로맨서 퀘스트도 본래 여러 NPC의 협력을 받아야 했던 것이었다.
강기찬이 비정상적인 거지, 혼자서 깰 수 없게끔 되어있었다.
하물며 그 상위 격인‘전설의 네크로맨서 전직 퀘스트’가 단독 진행일 리가…….
“여럿이 같이해야 하는 거죠?”
“어, 운 좋게도 딱 셋이네.”
* * *
< 절망의 협곡 5미터 전 >
GM미르가 아수라 도깨비들을 소환했다.
“자, 죽여. 죽어”
아수라 도깨비들, 그리고 강기찬과 경석에게 한 말이었다.
아수라 도깨비들이 둘에게 다가갔다.
이를 강기찬과 경석은 마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지만, 죽으라는데 어쩔 건가.
군말 없이 죽어주는 수밖에.
“이런 적은 처음이야.”
“나도.”
아수라 도깨비들이 둘에게 방망이를 내리쳤다.
죽이는 건 금방이었다. 레벨 격차가 꽤 컸기에.
딱 한 방씩이면 족했다.
둘은 사망했고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왔다.
“자, 절망의 협곡으로 넘어가.”
GM미르의 지시에 따라 둘이 절망의 협곡으로 넘어갔다.
‘일단 넘어가지긴 넘어가 지네.’
살아있을 땐 접근할 수 없다는 경고 메시지가 왔었다.
GM미르의 시선엔 영혼이 된 둘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넘어갔을 거라 확신했다.
“이제 거기서 부활하면 끝이야. 이미 들어온 육신까지 밖으로 내쫓지는 못하거든.”
절망의 협곡 진입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