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맹인 검객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안 가면 나를 찾으러 오려고 했다고?’
[강기찬] 내가 집에서 나올 때, 말 걸지… 아니면 공격이라도 하던지.
[맹인 검객] 그때부터 나를 인지했었나?
[강기찬] 집에서 나오고 한 5분 뒤부터?
맹인 검객은 놀랐다.
미행이 최초로 들켰으니.
[맹인 검객] 그럼… 설마 화장실로 들어온 것이 날 유인한 거냐?
[강기찬] 어. 어차피 일어날 일, 빨리하고 해치우는 게 낫다, 싶어서.
[맹인 검객] 그럼, 내가 뭐하러 왔는지도 알겠군.
[강기찬]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 건 아닌 걸 알았지.
[맹인 검객] 그래, 너를 죽이러 왔다,
[강기찬] 암살자가 그걸 알려줘도 되나.
[맹인 검객] 주변에 아무도 없고 네가 죽으면 그게 암살이다.
[강기찬] 내가 주변에 알리면?
[맹인 검객] 달라지는 건 없다.
[강기찬] 청용한테 알려줄 건데도?
[맹인 검객] 그래.
[강기찬] 왜?
[맹인 검객] 청용은 내 아래다.
[강기찬] 그렇게 자신 있으면 죽이고 1위 하면 되잖아?
[맹인 검객] 1위는 관심도 없다. 나는 그놈처럼 관심종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죽일 이유가 있어야 죽이지, 누가 청용을 암살하려 한다면 모를까…….
[강기찬] 청용을 죽여달라고 한 사람이 없었어?
[맹인 검객] 있었지… 몸값이 비싸서… 무산되었지만.
[맹인 검객] 남자가 말이 많군. 어서 나와라, 한판 붙자.
[강기찬] 근데 더럽게 화장실에서 싸울 건 없지 않나?
[맹인 검객] 네가 여길 선택한 거 아니냐?
[강기찬] 잠시 대화 좀 나누려고 그런 거지. 원래 진솔한 대화는 화장실에서 이루어지는 법이거든. 그럼, 자리를 바꿔볼까?
[맹인 검객] 도망칠 구실 대나?
[강기찬] 이미 도망쳤는데? 그것도 성공적으로.
[맹인 검객] 뭐, 그것도 맞는 말이네.
[강기찬] 내가 나타나자마자 공격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맹인 검객] 알았다.
[강기찬] 검은 집어넣지?
맹인 검객은 내심 놀랐다.
강기찬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검을 꺼내놓은 걸 알다니?’
이곳은 암흑의 장막 속이다.
밖에선 안을 볼 수가 없다.
안에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짐작으로 한 말일 수도 있지.’
이 정도는 감으로 때려 맞출 수도 있을 터.
[맹인 검객] 알았다. 검을 집어넣지.
맹인 검객은‘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고자 검을 검집에 밀어 넣으려다가 멈췄다.
‘정말 내가 보이는지 확실하게 확인해보고자.’
검을 검집에 밀어 넣지 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맹인 검객] 자, 됐나? 네 말대로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강기찬] 뭐가 돼?
[맹인 검객] 음? 무슨 소리냐? 시키는 대로 했…….
[강기찬] 검을 검집에 왜 집어넣으려다가 말아?
[맹인 검객] ……!
[강기찬] 한 번만 더 개수작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맹인 검객은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선 주위를 살폈다.
‘… 뭐지? 어떻게 안 거지? 암흑의 장막을 깔았고, 또 시각도 차단했는데도…….’
이상한 건, 더 있었다.
‘암흑의 장막을 깔았는데 어떻게 이동한 거지?’
암흑의 장막 안에서는 밖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기찬은 밖으로 이동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탈출했다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문이었다.
잠자코 강기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슉.
강기찬이 나왔다.
그런데 곧바로 사라지고 남은 건…
후-와-아아알!
… 파이어볼이었다.
파이어볼이 화장실 천장과 벽, 바닥을 모조리 불태우며 진격했다.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맹인 검객을 덮쳤다.
맹인 검객은 피할 틈이 없었다. 막을 수도 없었고. 온전히 맞아 사지에 불이 불었다.
불을 끄기 위해 변기통으로 달려갔으나 도중에 정신을 잃었다.
“캔슬.”
[스킬, 파이어볼이 취소되었습니다.]
강기찬의 주문에 맹인 검객의 몸에 붙은 불이 꺼졌다. 기절한 맹인 검객을 내려다보았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네.’
테스트서버에서 파이어볼을 띄웠고 덩치를 키워 화력을 증대시켰다. 그런 다음 현실로 돌아가자마자, 맹인 검객에게 쏘았다.
레벨 격차로 인한 데미지 Miss?
강기찬은 마법사의 2차 전직인 대마법사다.
반면, 맹인 검객의 직업인 검객은 1차 전직이고.
레벨보다 전직이 우선이지 않나.
그래서 데미지가 먹히는 것이다.
“썬.”
- 써-어언!
강기찬이 맹인 검객을 썬 등에 태웠다.
“화타님에게 가. 치료 좀 해달라고.”
- 써-어어언!
썬이 날아가는 걸 보고 생각했다.
‘아직은 죽으면 곤란하지.’
맹인 검객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암살자로서 제대로 한판 붙고 싶었으니. 암살자의 레벨도 비슷한 수준까지 올리고 다른 일들이 정리될 때까지는 싸움을 보류해두기로 했다.
그러나 기다려달라고 말해도 기다려주지 않고 대뜸 죽이려들 테니 우선 기절부터 시킨 것이었다.
‘이제부턴 말을 알아듣겠지?’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를 확실히 낙인찍어주었다.
물론 이래도 안 되면 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테지만,
‘부디 그렇게까진 안 가기를…….’
맹인 검객의 암살이 최초로 실패하는 날이었다.
* * *
< 강기찬의 집 >
“으, 으으읍…….”
“어때… 정신이 좀 드는가?”
NPC화타가 맹인 검객의 안색을 살폈다.
입술을 떨면서 신음을 흘리는 게 의식을 차린듯했다.
“누, 누구냐!”
앞을 볼 수가 없으니 사태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의식을 잃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강기찬의 기습에 불에 탔던 자신을.
‘망할 새끼, 치사하게……!’
한데 방금 들었던 목소리는 강기찬이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지?”
“화타다.”
“화타?”
맹인 검객은 의아했다.
한국인의 이름이 아니니.
“유저인가?”
유저는 이름 대신 아이디를 대기도 했다.
NPC화타가 어이없어했다.
“용사? 아니다.”
“아니라고? 본명인가?”
“그렇다.”
맹인 검객은 이쯤 하기로 했다.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
“여긴 어디지?”
“집이다.”
“당신의……?”
“아니, 강기찬 용사님의…….”
강기찬 집은 둘째치고 거슬리는 게 있었다.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 용사라니? 정신병자인가?’
‘용사’는 10년 전에 레전드스토리 NPC들이 유저를 부르던 단어였다. 요즘 사람들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10년 만에 듣는 건가?’
이 또한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강기찬은 어디 있지?”
“왜?”
강기찬의 목소리다!
맹인 검객이 분노를 표출했다.
“이- 이이이!”
“닥치고 누워 있어. 치료 중이니까.”
“뭐, 치료? 아! 아앗?!”
그러고 보니 사지에 불이 붙지 않았던가. 그 고통이 새삼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다가 문득 깨우쳤다.
“왜? 왜 이러지?”
의식 차리고선 하나도 안 아팠다.
“치료? 나를 치료해준 거냐?”
“그래.”
“누가?”
“내가.”
이번에 말한 건 강기찬이 아니라 NPC화타였다.
강기찬이 이어 말했다.
“고마운 줄 알아. 화타님에게 치료받는걸.”
“… 왜 통증이 없는 거지?”
“화타님에게 치료받으니까.”
“뭐?”
맹인 검객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상을 치료한다?
못할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안 아플 수는 없었다.
과거, 화상을 입어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힐러 유저도 마찬가지다.
레전드스토리에는 화상 관련한 물약과 스킬은 없다.
현대 의학보다 못하다는 의미.
‘뭘 어떻게 치료했기에 이래?’
그녀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나 어리둥절해서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그때, NPC화타가 말했다.
“통증? 당연히 없지. 내가 돌팔이들하고 같은 줄 아느냐? 내가 이곳에 와서 느낀 게, 참 실력도 없는 머저리들이 사람의 병을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맹인 검객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날 때부터 원래 그런 건데, 뭘 어떻게?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으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지금 원인이 중요한가?
결과가 이런데.
“강기찬, 왜 날 치료해준 거지?”
“이래야 대화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대화?”
“난 지금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뭐?”
“아직 내 암살자 레벨로는 너하고 싸우면 재미없으니까.”
“무슨 소리냐?”
“한 마디로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미친 새끼.”
누군 진지하게 암살하려는데, 누군 태평한 소리나 하다니. 그것도 암살 대상이라는 점에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깐, 나하고 싸울 수 없다고?”
이상했다.
싸울 수 없다고 했지만,
“네가 발산한 그 불덩어리…….”
“파이어볼이야.”
그래, 저 파이어볼은 충분한 데미지였다.
잠깐…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게 파이어볼이라고?”
“그래.”
그렇게 강력한 파이어볼은 맞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넘어가기로 했다.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워서.
“하여간, 그걸로 나한테 치명상을 입혔다. 네 레벨로 말이지! 근데 뭘 싸울 수 없어?”
“아니, 뭐… 그런 게 있어.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서 길게는 안 말할 건데, 여하튼 기다려 달라고.”
“하…….”
“그건 그거고, 내가 암살자인데 파이어볼 썼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앗!”
“…그런 거야,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어떻게 그럴 수가…….”
“궁금한 게 많을 거지만, 안 말해줄 거고, 내 할 말만 할게.”
“…….”
“나는 네 상식 밖에 있어. 그러니까 날 암살하려는 건 포기해.”
“… 난 이때까지 암살을 실패한 적이 없다. 그런 나한테 포기하라고?”
“나도 옛날, 랭킹 1위에 올라갔을 때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어. 2위고 100위고 떨어질 거란 걸 상상도 못 해본 거야. 근데, 지금 내 꼴을 봐, 랭킹 정산에 들지도 못할 정도로 나락으로 추락해봤잖아. 세상에 평생, 절대라는 건 없더라고…… 그러니까 고작 그거 한 번 실패했다고 표정 썩지 말라고.”
“닥쳐라! 내가 널 죽……!”
맹인 검객이 일어서려고 했다.
하나, 꿈쩍도 하지 않는 몸.
NPC화타가 말했다.
“못 움직인다. 침 좀 꽂았느니라!”
혀를 날름거렸다.
“허… 변태 할배새끼가?!”
강기찬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날 죽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지금은 안 돼. 뭐 영원히 기다려달라는 게 아니야. 길어야 몇 달이야.”
“내가 왜 기다려줘야 하지?”
“내가 네가 받은 돈 두 배로 줄게.”
“하! 나는 단순히 돈만 보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맹인 검객은 암살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무엇보다 자존심 문제였다.
“비겁한 새끼…….”
“뭐?”
“나보고는 검을 집어넣으라더니, 기습질이나 하고!”
강기찬이 풀썩 웃었다.
“누가 할 소리인지… 네가 먼저 날 기습해서 죽일 생각이었잖아? 근데 난 이것도 못 하냐? 네가 선빵쳤고, 난 정당방위야.”
“하, 됐고. 차라리 날 죽여라.”
“멍청하네, 죽일 거였으면 화장실에서 죽게 놔두었지.”
“나를 살려두면 후회할 거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계약서 쓰자.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내가 왜 계약서를 써야 하지?”
“앞이 보고 싶지 않아?”
“앞?”
“눈알, 언제까지 장식으로 달고 다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