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 *
[내 계좌 입금액 : 10,000,000,000원]
강기찬은‘강기찬’을 처단하기 위해 경석 아버지로부터 100억 원을 받았다.
강기찬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VIP 캐시 상점 입장료 : 115,310,000,000 / 1,000,000,000,000원]
이번에도 말 몇 마디에 100억 원을 벌었다. 이로써 VIP 캐시 상점 입장료목표액의 11.5%를 넘겼다.
‘한국 정상급의 게임 실력으로도 한방에 정도는 못 벌었는데, 말 몇 마디로… 세상 참…….’
실은 맹인 검객을 고용하는 데에는 100억까지는 필요 없었다. 정확히는‘강기찬’처치에 100억까지는 필요 없는 거지만,
고로, 순전히 강기찬이 책정한 값이었다.
자신을 해치우는 값을.
‘이 정도도 싸다고 여기지만…….’
물론 이 안에는 맹인 검객 고용비 외, 각종 비용이 다 첨부된 거지만.
‘내 천억…….’
아직도‘살해당할 뻔한 거에 대한 정신적인 위자료로 책정한’ 1천억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어찌 되었건 기분 좋았기에.
‘100억… 잘 먹겠습니다.’
당연히 맹인 검객을 고용 안 할 거다.
그렇지만, 맹인 검객이랑 붙어보고는 싶었다. 맹인 검객이 자신과 싸워줄 이유가 없지만, 돈을 낸다면 다르지 않을까?
철저하게 돈에 움직인다고 했으니.
그리고 강기찬은 돈을 낼 의향이 충만했다.
‘돈을 내고서라도… 붙어보고 싶네.’
이때까진 마음에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할 형편이 못 되었다면, 이제는 가망은 생겼다. 물론, VIP 캐시 상점 입장료부터 모으고 난 뒤의 이야기지만.
‘돈 벌어야 할 이유가 더 생겨버렸네…….’
돈 벌어서 맹인 검객을 고용해서 한 판 붙어야 하지 싶었다.
누가 돈을 대신 내주는 게 아닌 다음에야…….
* * *
< 외딴 건물과 건물 사이의 통로 >
두 남성이 서로를 향해 걸어왔다.
교차지점에서 멈추고선 사진을 주고받았다.
사진엔 강기찬의 얼굴이 있었다.
이윽고 눈빛 교환과 고갯짓.
둘은 각자 갈 길을 갔다.
한 명은 그 길로 백호 길드 본사로 돌아왔다.
회장실로 진입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회장님 의자가 돌아서고 백호길드 마스터, 백령이 얼굴을 드러냈다.
“어떻게 됐어?”
“맹인 검객에게 강기찬 사진을 넘겼습니다.”
“잘했다. 언제까지 처리해 준 데?”
“기회만 포착하면 즉시 실행에 옮길 예정이라더군요.”
“그래?”
백령이 진한 미소를 흘렸다.
“강기찬이 죽으면 청용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데?”
“예, 아주 볼만할 겁니다. 해외 진출이 엎어질 테니.”
“국내 1위면 1위에 안주해야지,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해? 나를 두고서? 그건 절대 안 되지.”
백호길드는 국내 2위 길드였다.
가뜩이나 청룡길드 따라잡기 벅찼는데, 강기찬의 등장으로 전망이 더 어두웠던 참이었다.
강기찬은 예고된 불행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암살하고자 한 것.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잘 됐지.’
강기찬은 이동한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당연히 백호길드에서도 탐냈었다.
그러던 차에 A길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저 밑의 길드라 위협되지 않았으니까. 계약 끝날 때, 뺏어오면 될 문제고.
하지만, 청룡길드에 들어가는 건 다른 얘기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청룡길드는 독보적인 1위, 거기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 터. 백호길드는 영원한 2위로 남을 것이다.
또한, 강기찬을 암살할 이유가 더 있었다.
“강기찬이 네크로맨서 맞지?”
“예,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일전에 A길드, 그리고 이번에… 두 경우는 유사점이 많습니다. 동일인물의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맞아, 맞아.”
“그리고 그건 강기찬일 가능성이 크지요. 저번 사건과 이번 사건, 둘 다 개입된 인물은 그놈뿐이니까요.”
강기찬이 네크로맨서일 가능성이 컸다.
네크로맨서는 대마법사처럼 재앙급 직업 아니던가.
청룡길드의 해외 진출을 떠나 세계 10대 길드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가능할 터.
“강기찬이 죽어서 사망한 몬스터 부활시키는 일 없어지면, 결과적으론 강기찬이 네크로맨서인 거 아니야?”
“맞습니다. 한데… 만에 하나의 경우, 강기찬이 네크로맨서가 아니라면?”
“아니면 뭐? 아니면 마는 거지. 어차피 이동한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죽일 명분은 충분해. 그리고 잘못될 경우를 염두에 두고선 암살자 쓰려는 거 아니야? 그것도 실패할 확률이 0%인 우리 맹인 검객을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참에 청용도 암살하는 게 어떻습니까?”
“야!”
“예?”
갑작스러운 백령의 호통에 비서가 잔뜩 움츠렸다.
“내가 안 물어봤겠어? 강기찬보다 청용을 더 죽이고 싶은데…….”
“그러면 왜?”
“청용은 비싸대! 내 재산으로는 감당이 안 돼. 뭐, 부동산 팔고 대출 끼고 해서 전재산이라면 될 것 같긴 한데.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죽여야겠냐? 청용을 위해서 돈을 쓰는 거잖아!”
“아! 따로 알아보셨군요.”
“그래! 일단은… 강기찬에서 만족해야지, 어쩌겠어?”
“예… 다행히도 강기찬은 많이 저렴했습니다. 이동한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거랑 네크로맨서인 걸 전혀 모르는 눈치더군요.”
“놈이 장님인 게 주효했겠지.”
“근데, 신기합니다. 앞을 못 보는데 어떻게 전부 암살할 수가 있죠?”
비서의 순진한 물음에 백령이 혀를 찼다.
“으휴, 등시나! 상대방도 앞을 못 보게 하잖아, 그럼 공평해지지?”
“예.”
“똑같이 앞을 못 보는데- 그때부턴 누가 유리하겠냐?”
“아! 원래부터 그런 상태였던 맹인 검객이 유리하겠군요.”
“그래. 상대방이 당황한 것도 한몫할 테지. 고수들은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을 부르니까.”
비서가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강기찬이 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백령이 정색했다.
“미친놈아! 강기찬은 지금은 급이 딸려. 애들 중 아무나 보내도 제거돼. 그런데도 암살자를 쓰는 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손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지.”
“네. 근데 왜 그렇게 쉬운 일을… 제일 비싼 맹인 검객에게 시킵니까?”
“싼놈 쓰기엔 찝찝하달까?”
“뭐가 말입니까?”
“… 주어진 정보만 봐선 분명 신입 하나만 보내도 될 것 같은데… 경석이 굽실거리더라고… 걔는 썬더버드 퇴치까지 한 놈인데 강기찬에게? 그러고 보면 그 자식도 참 수상하고…….”
“돈이 좀 많이 들어도 확실하게 끝내시려고요?”
“어, 어제 악몽도 꾸고 해서…….”
“미신을 잘 믿으시는군요.”
“대격변 터지고 난 이래로는 못 믿을 게 없어졌지. 강기찬이 걸어 다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어.”
“에이, 그건 좀… 그런 게 되었으면 진작…….”
백령이 구시렁거리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아까 물었었지?”
비서가 괜히 초조해하며 되물었다.
“뭘요?”
“아주 만약에… 강기찬이 맹인 검객을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었잖아.”
“아, 그랬었죠.”
“어떻게 하긴? 내가 나서야지.”
강기찬이 맹인 검객을 이긴다면 그거야말로 강기찬을 살려두어선 안 된다는 게 검증되는 거니까.
“죽어도 청용이 더 잘되는 꼴은 못 봐!”
비서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1등에 열등감을 느끼는 만년 2등.
* * *
맹인 검객은 암살 의뢰를 받자마자 강기찬 미행에 나섰다. 기회만 포착하면 즉시 암살을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기에.
비록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상대에게 좌표를 찍고 따라가는 스킬을 익혔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강기찬을 쭉 따라가다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강기찬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10분… 20분… 30분…….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았다.
참다 참다 참을 수 없어졌고, 다행히 근방에 인적은 드물어 눈치를 보면서 화장실에 진입했다.
그런데 강기찬이 없었다.
놓친…? 아니, 놓친 게 아니었다.
슉!
“어?”
갑자기 강기찬이 나타났다.
맹인 검객은 황급히 스킬을 발동시켰다.
[일대에 암흑의 장막을 깔았습니다.]
[암흑의 장막 안에서는 밖으로 이동이 불가합니다.]
[외부의 개입이 전면 차단됩니다.]
[강기찬님에게 저주를 겁니다.]
[강기찬님의 시각을 차단합니다.]
[강기찬님은 10분간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맹인 검객님은 10분간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서로 10분간 앞을 볼 수 없다.
맹인 검객은 애초에 앞을 볼 수 없어 페널티가 아닌 것.
그 덕분에 이 스킬을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차-아아앙!
검집에서 검을 빼내 즉각 휘두르는데 강기찬의 또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기척을 느끼려 했으나 잡히는 게 없었다.
이 현장을 완전히 이탈한 걸까?
이때,
“어!”
맹인 검객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 검이…….’
강기찬만 사라진 게 아니다.
쥐고 있던 검도 함께 사라졌다.
‘강기찬이 검날을 잡는가 싶더니… 사라졌어.’
인벤토리를 열어보았다.
… 없었다.
강기찬의 수중에 넘어가고선 돌아오지 않은 것.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레전드스토리에선 상대의 것은 뺏을 수 없다.
쥐고 있는 검이라 할지라도.
설령 힘 스탯 1이 쥐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인벤토리에 비슷한 수준의 검이 더 있기는 하나…….
‘의미가 있을까?’
만약 강기찬이 잡는 것마다, 없앨 수 있다면 무기가 무기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검을 교체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바로 새 검을 꺼내 들었다.
강기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온 것은 다른 것이었다.
[강기찬] 야 반갑다! 직접 와줄 줄이야. 돈도 안 들고 좋다, 야!
… 강기찬의 귓속말이었다.
‘뭐야,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
귓속말 거부 안 해놓았으니 귓속말이 올 수 있다.
다만, 강기찬은 암살대상이 아닌가. 암살대상이 먼저 귓속말해오는 건 최초였다. 아마 세계 최초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이지 않을까?
뭐, 그것도 암살자가 먼저 귓속말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하튼…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
… 다시 없을 경험이지 싶었다.
죽일 대상을 굳이 귓속말 거부 설정해놓을 필요는 없었다. 아니,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처음으로 신경 쓰게 된 것.
30초 지났을까?
그때까지도 아무런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강기찬의 목소리가 너무 정겨웠다. 옛친구를 만나듯 반갑게 인사까지 하고.
그것들이 심히 거슬렸다.
계획이 어그러진 거야, 그렇다 쳐도…
‘왜 나를 보고 반가워하지?’
이제는 당황을 넘어서 궁금하기까지 했다.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맹인 검객] 나를 알아?
사실, 반쯤은 강기찬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라고 여겼다.
[강기찬] 채팅 설정해놓았냐? 왜 이렇게 대답이 느려? 음성설정 해놓으라고.
[맹인 검객] 나를 알았냐고 물었다.
[강기찬] 알지, 맹인 검객. 네가 안 오면 내가 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강기찬에게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