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경석(강기찬)은 흡족했다.
‘한풀 기세를 꺾었네. 천하의 앤드류가 닥치고 손을 들어 발언을 요청하다니…….’
평생 말 못 하게 한다는 협박이 먹힌 모양.
전사라면 스킬 못 써도 순수한 무력이라도 남는다.
마법사는 스킬 못 쓰면 초보자나 다를 바 없다.
대마법사도 마찬가지.
굽히는 게 현명한 거다.
‘반경 10미터 이내의 상대에게만 ‘침묵’ 적용이 된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물론, 실상을 들여다보면 말뿐인 협박인 셈.
하나, 앤드류가 그걸 알 수가 없다.
당장 처한 상황은 협박에 무게를 실어주기 충분했기에.
앤드류는 얌전히 손들고 기다렸다.
매스컴에서 다루던 이미지하곤 정반대.
경석(강기찬)이 앤드류의 발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말해.”
“궁금한 게 있다.”
“뭔데?”
“방금 그 공간이동…….”
“공간이동이 왜?”
경석(강기찬)이 속으로 웃었다.
‘그 공간이동 암살자 스킬인데 오해하겠네. 무영창으로…….’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무영창인가?”
“그래.”
너무 예측대로 흘러가니 재미없다?
아니, 때로는 예측대로 흘러가야 재미있는 법이다.
지금 그랬다.
‘웃겨서 미칠 것 같네. 오랜만에 찾아온 참기 힘든 즐거움이다.’
반면 앤드류는 심란했다.
‘하, 이놈이 정녕 전설의 대마법사란 말인가?!’
무영창은 전설의 대마법사 스킬이다. 스킬명을 외우지 않고 스킬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네…….’
경석(강기찬)은 맛있게 조리되는 음식에 양념을 더하기로 했다.
‘우선, 이것부터…….’
경석(강기찬)이 앤드류 앞으로 공간이동 했다. 좀 전부터 지금까지 쭉 썼던, 암살 대상 한정 그 곁으로 이동을 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하나, 앤드류는 전혀 모를 터. 그쪽 계통으로 빠삭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경석의 직업을 대마법사로 못 박은 뒤였으니까.
그랬기에,
‘…또! 또 공간이동을?’
앤드류는 또 놀랐다.
‘몇 초 전에 공간이동을 안 썼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또 공간이동을 쓴단 말인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쿠, 쿨타임 제로?!’
앤드류는 못 참겠다는 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경석(강기찬)이 이번엔 쉬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앤드류가 사슴 같은 눈망울을 연출하는 게 아닌가.
애교라도 나올 기세였기에,
“왜!”
경석(강기찬)은 발언을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동을 연달아 두 번 쓴 것은…….”
그러자 경석(강기찬)이 또 써주어 앤드류의 옆으로 이동했다.
“세, 세 번이나 연달아 쓴 것은…….”
이때, 경석(강기찬)이 앤드류의 말을 가로챘다.
“전설의 대마법사의 스킬이 어디 무영창, 하나뿐인가?”
“역시, 맞았군. 쿨타임 제로!”
“어.”
경석(강기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쿨타임 제로.
스킬 사용 후, 재사용까지 걸리는 시간을 제거해주는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한 마디로 스킬을 따발총처럼 난사할 수 있다는 말씀.
오직 전설의 대마법사만의 스킬이었다.
‘실제로는 이제부턴 사용할 수 없는 암살자의 시간제 스킬이지만…….’
만약 여기서 더 공간이동 해달라고 하면 경석(강기찬)은 할 수 없었다. 고로,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다.
그러나,
‘앤드류는 지금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니까, 어지간하면 의심조차 못 할 테지.’
안심할 수 있었다.
경석(강기찬)은 이 대목에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하인스를 쓰러뜨렸는데, 내가 그냥 대마법사 나부랭이일 수는 없지.”
“…….”
앤드류는 말을 줄였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대마법사를‘그냥 대마법사 나부랭이’라고 칭했구먼… 하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녀석은 무시할 만하지. 전설의 대마법사이니까.’
또한,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전설의 대마법사인 하인스를 처치할 수 있는 마법사는 오직 같은 전설의 대마법사뿐이겠지.’
그리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역시 이놈 소행이었구나.’
경석의 NPC하인스 살해.
지금껏 확실치는 않았었다.
갓 전직한 주제에 전직 교관을 살해했다는 것이 말도 안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시기, 정황이 경석이 유력 용의자라고 했고.
본인 입으로 실토하기까지 했다.
거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한 방도 남아있었다.
“그, 그 모자, 로브, 지팡이…….”
경석의 무기와 장비가 변하고 있었다.
앤드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다.
“맞아, 하인스의 것들이지…….”
“!”
이로써 의심의 여지가 완전히 없어졌다.
앤드류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석이 전설의 대마법사라는 걸.
경석이 전설의 대마법사이니 하인스를 죽일 수 있고, 그러니 하인스의 옷이 있는 거다.
물론, 어떻게 빼앗아 입은 건지는 의문이지만.
… 게임은 끝났다.
“…어쩔 셈이지, 나를?”
반항할 엄두를 못 냈다.
아니, 목숨을 구걸해야 할 판이었다.
마법사와 대마법사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물며 대마법사와 전설의 대마법사는?
하늘과 우주 차이…….
하늘을 날아서 닿을 수라도 있지, 우주는…….
“자아…….”
경석(강기찬)의 눈이 희번들해졌다.
“거미줄에 자발적으로 걸려든 나방을, 거미가 어떻게 할까?”
“으… 으으으!”
앤드류의 눈동자에 공포가 차올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살려줘… 나를!”
경석(강기찬)은 앤드류가 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어차피 난 할아버지 못 죽입니다.’
경석(강기찬)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앤드류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앤드류도 경석(강기찬)을 죽일 수 없게 되었다.
괴물이 아파트를 밟으면서 자신이 약하다고 주장한들, 어떤 인간이 곧이곧대로 믿겠나. 경석(강기찬)이 다 거짓말이었다고 해도 되레 앤드류가 부정할 것이다. 그 지경까지 온 것.
덕분에 이제는 앤드류를 죽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릎은 꿇릴 수 있게 되었다.
경석(강기찬)이 말했다.
“살려달라? 날 죽이러 온 자를 살려주라는 건가?”
“어리석었어, 내가…….”
앤드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부터는 경석(강기찬)의 처분에 따르겠다는 듯이.
‘오래 고민할 것도 없지.’
경석(강기찬)은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일찍이 생각해두었다. 변한 거라고는 그가 간 게 아니라 앤드류가 온 것뿐.
경석(강기찬)이 운을 띄웠다.
“날 죽이려 했던 이유가 단순히 대마법사 경쟁자가 하나 더 생겨서만은 아니겠지…….”
앤드류에겐 그것이 단순한 사유가 될 수는 없지만, 경석(강기찬)의 기준에선 지극히 단순한 사유에 불과했다.
그것이 격의 차이였다.
앤드류가 답했다.
“그래…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 화가 났지. 하인스가 죽어서 내 인생이 꼬이게 되었으니.”
경석을 죽이고픈 이유.
NPC하인스의 사망, 정확히는 그의 부재로 인해 퀘스트, 스킬, 무기와 장비, 다 얻을 수 없게 된 것 때문이었다.
경석을 해치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분풀이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석(강기찬)이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아… 퀘스트, 스킬 같은 것들 때문이지?”
“그래.”
물론, NPC하인스는 시간이 지나면 부활한다.
단, 부활 대기 시간은 유저처럼 적용된다는 게 문제였다.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1년 걸린다더군.”
‘멘탈 터질 만하네…….’
무엇이든 시기가 중요하다.
다 큰 성인에게 어린이용 장난감이 필요 없듯, 각 레벨에 맞는 스킬과 장비가 있는 법이다.
하나, NPC가 없으면 아무것도 제때 갖출 수 없다. 엄청난 손실일 터.
“당장 급한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내가.”
앤드류는 침울했다.
그에게 경석(강기찬)이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뭐?”
뜻밖이었다.
일을 그르친 자가 되레 도와줄 수 있다니?
“정말인가?”
솔직히 안 믿었다. 아니, 못 믿었다.
‘뭘 도와준다는 거지? 어떻게?’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꿈도 안 꾸었다. 그보다는 경석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 의도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하나, 그걸 묻기도 전에…….
“어, 퀘스트, 스킬, 무기와 장비, 다 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먼저 대답이 나왔다.
“정말?”
“그렇다니까.”
경석(강기찬)은 앤드류가 자신을 죽일 마음이 사라지는 선에서 그치기를 원치 않았다. 그 이상을 바랐다.
그래서 종속시키려고 했다.
공포심이 아닌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길 바랐다.
‘이거라면 가능하겠지.’
퀘스트, 스킬, 무기와 장비, 다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
NPC하인스의 역할을 대신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앤드류의 물질적인 지주가 되는 것이……!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앤드류는 재차 궁금했던 걸 물었고,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경석(강기찬)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말만 했다.
“뭐?”
“떠나라.”
“어, 어어.”
앤드류는 떠나기로 했다.
더 있어봤자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복수심도 사그라져버렸다.
남은 건 일말의 기대뿐이었다.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리고 이건 피해보상으로 내가 가지도록 하지.”
경석(강기찬)이 앤드류의 목걸이를 빼앗아 들었다.
이전에 NPC하인스의 장비 중에선 목걸이가 없었다.
그에 대한 보강인 것이다.
“아……!”
앤드류는 한발 늦게 깨달았다.
지금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내가 착용한 목걸이를 가져갔어?’
제 목걸이를 경석이 가져갔다.
‘내 허락도 없이?’
이에, 경석(강기찬)이 불만 섞인 말투로 외쳤다.
“왜? 불만이야? 나를 죽이려고 했던 놈한테 이 정도도 못 빼앗나?”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두려웠다.
유저가 착용한 것은 타인이 잡을 수 없지 않나.
그걸 해버렸으니…….
“왜? 모자도 주게?”
방금 일어난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한 발언이었다.
“허-어…….”
앤드류는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때마침 경석(강기찬)이 이를 허락해주었다.
“볼일 다 봤으면 꺼져, 다 뺏고 죽여버리기 전에.”
“히-이익!”
앤드류는 쫓기듯 현장을 이탈했다.
쿵!
어찌나 다급한지, 앞이 보이는데도 벽을 처박고 넘어졌다.
콰-앙.
출구가 닫히고 나서야…….
“후…….”
경석(강기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네.’
앤드류가 작정하고 의심했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귀찮아졌을 테니.
‘말로 끝냈으니, 최선의 결과가 나온 거야.’
조만간 앤드류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충직한 심복이 될 터.
‘계정을 뺏지 않은 건 잘한 거겠지……?’
실은, 경석처럼 계정을 뺏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너무 원하던 대로 전개가 되었기에.
하나, 보류해두기로 했다.
저렇게 자존심 센 인간은 목숨을 포기하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그러면 또 귀찮아졌을 것이다. 그간 쌓아놓은 거짓말도 다 탄로 났을 수도 있고. 여러모로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었다.
척.
청용을 보았다.
곧장 그의 곁으로 갔다.
경석(강기찬)이 말을 꺼내기 전에, 청용이 먼저 말했다.
“당신, 진짜 전설의 대마법사입니까?”
아무래도 대화 내용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라고 밖에 안 내보낸 거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