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한창 어둠 속의 도심을 질주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다 되어갔다. 강기찬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낯선 풍경을 보게 되었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경석.
엎드린 채 잡지를 읽고 있는 GM미르.
그녀의 등에 침을 꽂고 있는 NPC화타까지.
늘 혼자, 아니면 김만수 매니저나 가끔 오던 집에 이렇게 세 명이나 있는 건 처음이었다.
‘낯서네…….’
강기찬이 창문에 걸쳐있는 걸 본 경석이,
“아이쿠-시바!”
비명을 지르며 프라이팬을 손에서 놓쳤다.
“깜짝 놀랐네. 도둑놈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너 서 있는 거 볼 때마다 너무 어색해!”
“그건 나도 그래…….”
강기찬도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게 어색하던 차였다.
GM미르가 태연스레 고개를 돌려 강기찬을 보았다.
“왔어?”
NPC화타도 잠시 침놓던 걸 멈추고선 벌떡 일어나더니 강기찬을 향해 90도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아, 예…….”
거창한 환영 인사를 받은 강기찬이 거실로 들어섰다. 그러고선 NPC화타에게 똑같이 90도 인사를 했다.
“너무 흥분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아니… 아닙니다.”
NPC화타가 넙죽 엎드렸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잖습니까!”
강기찬도 지지 않기 위해 엎드렸다.
“제 다리를 고쳐주신 거, 잊지 않겠습니다!”
NPC화타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제가 더!”
쿵!
“저도!”
쿵!
이를 본 GM미르가,
“놀고 자빠졌네.”
욕을 퍼부었다.
강기찬이 슬쩍 고개를 들어 GM미르를 보았다.
“안 가고 있었네요?”
“어. 밤이 늦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되지?”
“예?”
“걱정하지 마, 얘네 둘도 같이 잘 거니까.”
“아… 네.”
“왜 실망했어? 나 혼자만 자고 가길 바랐던 거야?”
“아닙니다.”
“… 아, 아니야? 실망이네.”
“예?”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알아. 너희들도!”
아무래도 여기서 자고 가는 건, 방금 GM미르가 결정한 거지 싶었다.
일방적인 통보.
그럼에도 경석은 체념한 듯 반응이 없었고, NPC화타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도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너 갈 데도 없잖아? 다시 레전드 대륙으로 돌아갈래? 넌 공식적으론 삭제되었어야 하는 존재야. 거기서 얼쩡거리다가 발각되면 어떻게 될까? 또 휴지통에 버려지고 싶어?”
절레, 절레.
“그나마 여기가 들킬 염려도 적어. 물론 기찬이가 설칠 때마다 운영진들이 주목하긴 하지만…….”
강기찬이 GM미르에게 물었다.
“운영진들이 저를 주목합니까?”
“그래, 너만큼 화제의 인물도 없어. 하는 것마다 오죽 평범해야지?”
GM미르가 비꼬듯 말하자 강기찬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돌이켜 보니 자신이 했던 행위들이 운영진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를 떠올린 것이다.
“아, 이거 참…….”
누군가가, 그것도 운영진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더 열심히 플레이해야겠네요.”
“마음에 드네. 운영진이 바라는 것도 그래.”
“그래요? 오히려 반대일 줄 알았는데?”
“저번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우린 깽판 치는 유저를 늘 꿈꿔왔어. 정확히는 비범한 유저 말이지. 시스템이 허용하는 선 안에선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상관없어.”
“그, 그렇군요…….”
강기찬은 솔직히 아직도 자신이 불법 사용자로 등재되지 않은 게 신기했다. 물론 모든 행위는 합법이었다. 다만, 겉보기엔 불법 사용자 같았을 뿐.
‘누군가는 나를 불법 사용자로 신고했었겠지?’
자신 같았어도 불법 사용자로 신고했을 것이다. 아직 안 된 걸 보면 무난하게 넘어간 거지 싶었고.
“근데…, 제가 활약할 때 운영진들이 주목하면 화타님은 위험한 거 아닙니까? 들키면 휴지통행이라면서요?”
“해결법은 간단해. 네 곁에 안 데리고 다니면 되지. 네가 활약한다고 네 집까지 들쑤시거나 하진 않아. 집에서 가정부를 시켜.”
이에, NPC화타가 우렁차게 외쳤다.
“시켜만 주신다면, 이 한 몸 불사지르겠나이다!”
“너 가정부가 뭔지는 알아?”
“예?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직책이라는 건 눈치껏 알겠습니다.”
“맞아, 눈치는 있네.”
강기찬이 저 부담스러운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아… 아쉽습니다.”
“뭐가?”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화타님한테 말이지요.”
NPC화타는 세계 최고의 힐러다.
집에서 가정부로 쓰기엔 심하게 재능 낭비다.
“그렇다고 힐러로서 쓰자니 기적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이슈되고 운영진의 눈에 띌 것 같고…….”
경석이 상을 차리면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가면 쓰고 다니면 되잖아? 내가 검정 스타킹 뒤집어쓰고 다니듯이. 의술의 신답게 하얀스타킹 뒤집어쓰고 다니면 되겠네.”
“그 방법도 있긴 하지…….”
강기찬도 그 방법을 안 떠올린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보루였다.
“그것보다는 완벽하게 정체를 숨길 방법이 없으려나……?”
NPC화타가 대놓고 기적을 행하지 않는 한, 힐을 써도 들키지 않을 무언가가 절실했다.
“자, 저녁 먹으면서 생각해!”
경석이 각자의 자리에 수저를 놓았다.
“더 필요하면 말하고.”
강기찬이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먹었다.
탁!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에, 경석이 강기찬의 눈치를 살폈다.
“오, 왜? 된장찌개가 그렇게 맛이 없어?”
NPC화타도 먹더니 바로 뱉었다.
“이,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감히 강기찬님을 독살하려고 해?
다짜고짜 일어나 경석의 멱살을 잡았다.
“저 저기요! 제가 언제 독살을 시도했어요? 아닙니다!”
GM미르도 냉큼 한 입 떠서 먹었다.
“음? 맛은 더럽게 없지만, 독은 없어.”
NPC화타가 그 말을 듣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은 없습니까?”
“그래, 이거 맛이 원래 좀 그래. 우리 세계 사람들하고는 입맛이 다른 거 같더라고. 한국인들은 이걸 맛있다고 먹어.”
“아… 그렇군요.”
NPC화타가 그제야 경석을 풀어주었다.
“아, 진짜 독 안 풀었다니까…….”
경석이 강기찬을 흘겨보았다.
“나는 먹을 만해.”
강기찬이 맛이 없어서 숟가락을 놓은 게 아니란다.
경석은 어이가 없었다.
“근데 왜 먹자마자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오해를 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응? 무슨 방법?”
“화타님하고 동행할 방법이……! 그렇게 해도 운영진들에게 안 들킬 방법이 떠올랐어!”
강기찬이 GM미르에게 자문했다.
그 내용을 전해 들은 GM미르가 기분 좋게 웃었다.
“되긴 되는데, 참… 재미난 발상이네? 세계 최초야.”
강기찬이 NPC화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뜸 들이더니 나직이 말했다.
“화타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십시오. 아마 이해하기가 몹시 어려우실 수 있는데,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면 꽤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보장합니다.”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키신다면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NPC화타는 말과는 다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자정이 되었다.
강기찬은 그 즉시 테스트서버로 가기로 했다.
[레전드스토리 테스트서버에 로그인했습니다.]
[레전드스토리 테스트서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위치 : 진시황릉 앞마당]
[남은 시간] 00시 59분 59초.
[레벨] 2,019
[직업] 네크로맨서
강기찬이 들어오자마자,
“왔네!”
NPC네크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때, 너 못 봐서 아쉽더라.”
“아… 저번에 말씀해주셨던 게…….”
저번 접속 때 NPC네크가 지구로 온다고 했었다. 그 후, 이벤트 당일이 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NPC들이 전직을 위해 현실로 출장 오지 않았었나.
NPC네크 역시 왔었던 모양.
“뭐, 저는 이미 전직했었으니까, 만날 수가 없었죠.”
“뭐 그렇긴 하지. 우리도 자유의 몸은 아니었으니까. 아, 그때 진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 네크로맨서로 전직한 용사가 있나요?”
“있겠냐?”
“아, 전직 퀘스트 내용은 그대로죠?”
“어… 나는 그냥 홍보차 간 거지. 애초에 전직할 용사가 있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어. 네가 별종인 거라니까.”
“하하…….”
“근데 좀 큰일이 생겼어.”
“뭔데요?”
“너도 알 건데? 지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번에 히든 & 스페셜 클래스 전직한 용사를 암살하고 다닌다는…….”
강기찬도 피해자가 될 뻔했던 그 사건에 관해 얘기했다.
객관적으로 정당방위 섞인 가해자로 변했지만.
“왜 그러는 건지…….”
“경쟁자 제거죠. 세계에서 몇 없는 직업이라서 누리는 혜택을 독점하고 싶으니까. 그러려면 초장에 잡아야 하는 거니까요.”
“너는 별일 없었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네크로맨서.
강기찬을 염려하는 건 당연했다.
“저는 뭐, 여기서 전직해서 표적이 안 된 건가 봅니다. 보아하니 현장에서 대기했다가 색출해서 처리하던데.”
“운이 좋네.”
“뭐, 그렇죠.”
“그래도 조심해, 알아보니까 꼭 이번에 히든 & 스페셜 클래스 전직한 용사만 노리는 게 아니더라.”
“그렇습니까?”
“기왕 혼란이 일어난 김에 레벨이 좀 낮은 히든 & 스페셜 클래스 용사도 제거하고 있다더라고… 게네들도 레벨하고 쪽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인가 봐…….”
“…….”
NPC네크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강기찬은 그 걱정만큼은 덜어주고자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히든 & 스페셜 클래스 용사 중에 저보다 안전한 용사는 없을 겁니다.”
아무렴, 운영자가 집 지키고 있는 유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나.
“왜 안전하다고 자신하는데?”
“그건 말씀드리기가…….”
“나는 말할 수 있어, 네가 걱정되는 이유, 너 레벨 낮잖아.”
테스트서버 계정, 네크로맨서 레벨 2,019.
객관적으로 아주 낮은 레벨임은 틀림없었다.
“너희 나라에서 네 레벨은 완전 하층민이라던데?”
한국 유저 평균 레벨이 5,500이었다.
강기찬이 반박을 못 하자 기세를 타고 더 밀어붙였다.
“막말로 그 잡것들 배후에 한국 랭킹 1위가 있다고 생각해 봐. 그래도 안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어?”
“흐흐…….”
“왜 바보 같이 웃어?”
강기찬은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비유를 들어도 이렇게 절묘한 비유를 들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시 안전할 수밖에 없지 않나.
간신히 웃음을 집어넣고선 말했다.
“만약에 그 잡것들 배후에 한국 랭킹 1위가 있다면, 저보다 안전한 용사는 없을 겁니다.”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그 랭킹 1위, 지금 제가 장악한 공간에 있습니다…….’
그랬기에,
“에휴, 말을 말자. 너 같은 애들을 안전불감증이라고 하더라.”
NPC네크는 이 주제로 대화를 포기했다.
“그나저나…….”
그녀의 시선이 강기찬의 옆으로 향했다.
“이분은 누구야?”
강기찬은 테스트서버에 혼자 온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