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다 좋은데 좀 고쳐야 할 게 있다.”
NPC화타의 말에 피노키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예요??”
“3,000레벨에서 1,000레벨까지 내리는 건 과하다.”
“…….”
역시.
피노키오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
‘강기찬 용사님이 말씀해주신 대목이다…….’
강기찬이 쓴 대본이라도 읽은 것 마냥, NPC화타가 똑같이 말했다. 심지어 1,000이라는 숫자까지도.
“그럼요?”
“레벨 2,000으로 내리는 거로 하지.”
NPC화타는 3,000레벨에서 2,000레벨로 내리겠다는 거다.
강기찬 쪽에서 제시한 2,000레벨이 아니라 1,000레벨만 손해 보겠다는 의미.
생존한 뒤의 상황까지도 고려한 것이다.
‘레벨이 너무 많이 떨어지면 복구하기 힘들 테니까… 그래도 1,000레벨 정도면 나도 손해를 감수할 만하지, 살 수 있잖아.’
NPC화타가 당당하게 외쳤다.
“강기찬보고 2,000레벨까지 올라오라고 해라!”
“흥! 개소리 즐!”
“아니, 이 녀석이 말버릇이 그게 뭐냐!”
피노키오도 쉽사리 물러서진 않았다.
강기찬이 시켰던 대로.
아니, 조금 다르게.
“개소리라닛! 이 자식아! 그럼, 나보고 2,000레벨이나 손실을 보란 말이냐?”
“…….”
“물론 강기찬이 내 목숨줄을 쥐고 있지. 하지만, 그 녀석도 내 도움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서로 좋게좋게 하자고.”
“노노. 그건 그쪽 생각이고요.”
“왜?”
“레벨이 떨어지는 건 쉬워도 올라가는 건 졸라 어렵잖아요?”
“지금 강기찬 레벨이 몇인데?”
“55요.”
“레벨이 55라고?”
NPC화타가 어이없어했다.
“용사의 레벨이 55라니,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단 말이야?”
55레벨 용사는 풋내기 중의 풋내기다.
‘그런 애송이가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NPC화타가 움찔하는 걸 보고선 피노키오는 기회라 여겼다. 주장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55레벨에서 2,000레벨까지 한 달 안에? 될까요?”
“으흠…….”
NPC화타가 대답하지 않아도 답은 나와 있다.
55레벨에서 2,000레벨까지 한 달 안에?
절대로 불가능했다.
‘내가 일생을 바쳐 3,000레벨을 찍었거늘, 아무리 내가 힐러라서 성장 속도가 느리고, 용사는 버프를 많이 받아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한 달은 무리지, 무리야…….’
과도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한 수 물러나야 하나…….’
한 수 물러나야 하나 갈등했다.
강기찬이 자신의 레벨을 넘지 못해 소환을 못 쓴다면 큰일 아닌가.
‘어쩔 수 없지.’
결심했다.
한 수 물러나기로.
‘탈출 못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NPC화타가 타협점을 제시했다.
“좋다, 1,500레벨은 어떠냐?”
“한 번 물어보고 올게요.”
피노키오는 이쯤하고 물러서기로 했다.
강기찬이 말하기를…….
- 주도권을 챙겼다 싶으면 그쯤하고 물러서. 똥줄 타게 해야지.
…이랬기 때문이었다.
“무, 물어보고 온다고?”
“결정권을 제가 쥐고 있는 건 아닌지라…….”
“그, 그래.”
NPC화타는 다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물어보고 온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불안해서.
‘반드시 돌아올 거란 건 알지만…….’
그때였다.
피노키오가 지나가는 소리로 혼잣말했다.
“한 달 안에 1,500레벨을 어떻게 올리지? 갑질이 심하네, 강기찬 용사님한테 그냥 다리 포기하라고 해야겠다.”
그래서일까.
“저… 1,000레벨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전하거라!”
NPC화타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완전한 항복 선언.
‘하… 어쩔 수 없지, 이 기회를 날릴 수는 없으니…….’
이쯤 되면 주도권이 아니라 결정권이 넘어간 거다.
피노키오는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예, 만수무강하세요!”
NPC화타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만수무강…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 * *
버려진 세계 - 허수아비 논밭으로 돌아가는 길.
피노키오는 몇 시간 전, 강기찬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 화타가 흥정하려 들 수도 있어. 처음엔 세게 불러. 1,000레벨까지 떨어뜨려달라고.
- 네? 1,000레벨까지나요? 과연 해줄까요? 3,000레벨에서 1,000레벨이면 2,000레벨이나 떨어뜨리는 건데…….
- 아니, 안 해줘도 상관없어.
강기찬은 NPC화타가 1,000레벨까지 안 떨어뜨려 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NPC화타의 레벨을 2,000까지 떨어뜨리는 게 목표여서.
- 내가 2,000레벨 찍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현재 강기찬의 본 계정 레벨은 999다.
한 달 안에 2,000레벨?
찍을 수 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강기찬이라면.
- 오히려 NPC화타가 3,000레벨에서 1,000레벨로 내리는 게 불가능하지.
반면, NPC화타가 한 달 안에 1,000레벨로 못 내린다.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 시간상, 불가능해.
사망 후, 일정 시간이 지나고 부활하는데 이럴 경우, 안 쉬어도 한 달에 3,000레벨에서 1,000레벨로 떨어지는 건 불가능하다.
여러모로 2,000레벨이 적정선인 셈.
그런데도 1,000레벨까지 떨어뜨리라고 요구한 것은…
- 처음엔 일부러 세게 나가는 거지. 1,000레벨로 내려 달라! 그러면 화타가 곤란해할 거란 말이야.
- 그다음에 2,000레벨로 내려 달라! 하면 좀 괜찮을 거야. 덜 손해 보는 것 같으니까.
…바로 역치를 낮추기 위함이었다.
똑같은 2,000레벨.
하나, 차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2,000레벨이냐, 협상 끝에 2,000레벨이냐는.
협상 끝에 2,000레벨이면 결과에 승복하기가 더 쉽다.
그리고 심리적인 빚을 지울 수 있다.
- …그걸로 끝이 아니야.
- 끝이 아니라고요?
강기찬은‘고작’ 2,000레벨을 기준선으로 맞추기 위해 이런 연출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 그거야 그냥 노골적으로 요구해도 받아낼 수 있는 거고…….
2,000레벨을 기준선으로 맞추는 건 쉬웠다.
객관적으로 더 절박한 건 NPC화타이기에.
이쪽에서 못하겠다고 하면 어쩔 건가.
결국에는 한 수 접어줄 터.
강기찬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 * *
“어떻게 됐어?”
피노키오가 복귀하자마자 강기찬이 물었다.
“말씀해주신 대로 되던데요? 너무 신기해서 놀랐잖아요! 레벨 올리기 힘들면 1,000레벨까지 내려준다던데요?”
“그래? 특별히 2,000레벨로 해준다고 그래.”
“예, 그렇게 전하지요!”
“하… 근데 솔직히 2,000레벨은 너무 높은 거 아니야?”
“맞죠, 크크큭.”
피노키오는 강기찬이 장난치는 걸 알기에 웃어 보였다.
“좀 도와달라고 해.”
“어떻게 도와달라고 할까요?”
“양심이 있으면 가진 거 다 내놓아야지.”
“맞아요! 강기찬 용사님이 화타님 손해 덜 보시게 하려고 무리해서 2,000레벨 찍겠다는데 설마 안 도와줄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려고 내가 너 시켜서 협상 놀이까지 한 건데.”
바로 이게 강기찬의 목적이었다.
자신이 양보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로 인해 NPC화타가 도움을 주게 만들고자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나한테 미안해할 거야.’
그는 NPC화타의 성격을 잘 알았다.
홈페이지의 NPC소개에 설정집까지 수십 번 읽었으니.
* * *
피노키오가 NPC화타와 협상을 마치고 돌아왔고.
강기찬에게 바로 보고했다.
“2,000레벨로 합의했어요.”
“어떤 반응이던데?”
“화타님이 무척 고마워했어요.”
“고맙겠지. 3,000레벨에서 1,000레벨이 아닌 2,000레벨로, 무려 1,000레벨이나 손해를 줄여주었으니까.”
“맞아요, 큰 빚을 졌다고 했어요.”
강기찬이야 처음부터 2,000레벨로 맞출 계획인 걸, NPC화타는 모르니 강기찬이 자비를 베푼 거로 볼 수밖에 없다.
비록 레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올리는 거지만, 한 달 안에 그만큼 올리는 게 무리하는 거라는 걸 잘 알 테니까.
물론 999레벨에서 2,000레벨이 아니라 55레벨에서 2,000레벨까지 올리는 거로 착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또 고생한다고 했어요.”
“말로만?”
“에이, 당연히 아니죠.”
피노키오가 보따리를 내밀었다.
레전드스토리 본사로 출발할 때 메고 갔던 보따리였다.
그땐 허름했던 보따리가 빵빵하게 차 있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
“역시, 밑바닥에서 2,000레벨까지 올리는 내 노고를 알아주는구나.”
“보따리 까볼까요?”
“어! 기대되네.”
피노키오가 서둘러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마자 강기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0) 즉시 부활 물약(x1)
(1) 생명력 자연 회복량 10배 증가 물약(x42)
(2) 체력 자연 회복량 10배 증가 물약(x29)
(3) 활력 자연 회복량 10배 증가 물약(x31)
(4) 생명력 1,000,000 회복 물약(x31)
(5) 체력 10% 급속 회복 물약(x38)
(6) 생명력 10% 급속 회복 물약(x14)
(7) 활력 10% 급속 회복 물약(x22)
(8) 체력 100% 회복 물약(x1)
(9) 생명력 100% 회복 물약(x1)
(10) 활력 100% 회복 물약(x1)
(11) 최저 30% 생명력 보장 물약(x1)
(12) 최저 30% 체력 보장 물약(x1)
(13) 최저 30% 활력 보장 물약(x1)
“와…….”
강기찬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게 다 얼마야…….”
랭킹 1위도 이만한 양은 없을 터.
하긴, 돈을 주고 사려 해도 구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니.
몇몇 개는 구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못 구한다.
“이 정도면 성의를 보인 거네.”
“예, 레벨업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암, 그래야지! 다음에 꼭 전해줘. 고맙다고.”
“예!”
사실 저것들은 NPC화타의 헬 난이도 퀘스트를 클리어했을 시 받는 보상이다. 일명 명품 힐러 물약 세트. 그걸 받았으니 고마울 수밖에.
‘가끔은 땀 흘리지 않고 수확물을 얻는 행복도 있어야지. 소소하구먼.’
강기찬이 흐뭇해하는 사이,
‘10초 남았네.’
나갈 시간이 되었다.
[로그아웃합니다.]
[로그아웃할 시, 남은 시간이 정지됩니다.]
[오늘 안에 재접속 시, 남은 시간을 마저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강기찬은 로그아웃했다.
현실에 나오니 텅 빈 허수아비 논밭이 그를 반겼다.
이벤트가 끝나서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슬슬 나가볼까.’
바로 나가진 않았다.
‘이대로 나가면 경석 쪽에서도 시끄러워질 테니.’
형식상, 허수아비 논밭에 자신과 경석이 끝까지 남아 있는 거로 되어있다.
그리고 밖에선 경석의 부하들이 대기 중일 터.
만약 강기찬이 나가고 한참을 경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귀찮게 하겠지.’
귀찮게 못 하게끔 하기로 했다.
[로그아웃합니다.]
[로그인합니다.]
‘영 어색하긴 하지만…….’
강기찬이 스마트폰에 담긴 얼굴을 감상하다가 포탈을 보았다.
‘경석 일, 마무리는 지어야지.’
강기찬이, 아니 경석의 얼굴과 몸이 된 강기찬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