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새로운 리더십은 도둑같이 찾아온다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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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청와대 대통령 관저.
백영기가 김필중을 불러놓고 울그락불그락 열이 제대로 받았다.
“ND 그룹 저놈들이 내 아들 승철이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봐, 필중이 내 말이 틀려?”
백영기는 과거 유선진에게는 ‘민정’이라고 불었었는데, 지금 김필중에게는 바로 ‘필중이’라고 부른다. 권력자가 편하게 생각하고 그만큼 가깝게 여긴다는 것. 김필중도 그게 좋다.
“딴 곳도 아니고 두바이, 두바이로 보냈다는 거 아냐? 거기가 어디야? 세계 어느 곳 안 가 본 곳 없는 나도 이 한 평생 살면서 거기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퍼스트 클라스 승무원들이 이쁘다는 거 말고는···.”
양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떤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필중이. 응?”
은하 그룹 은성표가 둘째 아들 백승환에게 돈을 안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백영기는 당시 민정 수석 유선진과 비서실장 오민하를 불러놓고 은하 그룹 총수 은성표를 바로 자기 앞에 무릎 꿇려야겠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지금 ND 그룹을 놓고는 김필중에게 ‘어떻게 해야겠냐’고 묻고 있다.
항상 질문 속에 답이 있는 법.
“제가 한 번 만나보고 저쪽의 진의를 들어보겠습니다.”
“진의를?”
“뭔가 불편한 게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오해가 있으면 풀고···”
“어, 그래, 필중이가 나서 준다면 내가 안심이 되지.”
말로만이 아니라 표정에서도 드러나는 백영기의 ‘안심’. 역시 ND 그룹은 백영기에게 은하 그룹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뜻이다.
“각하, 원종태 부회장을 만나기 전에 제게 혹시 해주실 말씀이라도···”
“응? 무슨 말이야?”
“음··· 제가 이 자리에 오기 전에 혹시 ND 그룹과의 사이에 있으셨던 일이라든가··· 제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있지는 않았나 해서요.”
“콜록콜록”
갑자기 가래 기침을 하는 백영기. 김필중은 이것의 의미를 잘 안다.
“네, 각하. 그럼 원 부회장은 제가 바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콜록콜록”
백영기가 입을 오른손으로 가리면서, 왼손으로는 나가보라는 손짓을 한다.
유선진 같았으면 바로 크리넥스를 들고 와서 가래 뱉은 휴지를 받아갔을 텐데, ‘호위 무사’ 김필중은 그렇게까지는 안 하는 게 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종태를 직접 만나서 첫째 아들 문제를 해결 봐 준다지 않나. 그냥 내보내기로 한다.
김필중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바깥에는 비서실장 황상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필중은 가벼운 목례만 하고 황상철 앞을 지나쳐 가려했는데,
“민정 수석”
황상철이 김필중을 불러 세웠다.
“네, 실장님.”
“각하께서 무슨 일로 민정 수석을 따로 부르신 거요?”
항상 자신을 건너뛰고 권력자를 독대하는 김필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황상철이다. 이번 기회에 한 번 따져보고 싶었다. 둘은 사법 연수원 동기지만 황상철이 나이가 많아 검사 시절 사적으로 만났을 때는 형 동생 하던 사이. 비록 김필중은 속으로 한 번도 황상철을 형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긴 했다.
“별 일 아닙니다. 실장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
“그게 무슨 소리요? 비서실장인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버럭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바로 눈을 치켜뜨는 김필중의 레이저에 황상철은 움찔했다.
“궁금하신 건 각하께 직접 물어보시지요. 그럼 저는 이만.”
홱 돌아서 제 갈 길을 가는 김필중의 등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고 있는 황상철은 속에서 열불이 솟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장인 정인수 회장과 강력한 연줄이 있는 인천 시장 조순건의 차기 대선 지지율이 완만하지만 오름세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인천 시장 조순건이 여권의 대세가 될 때까지만 참는다. 그때가 되면 저 오만방자한 김필중 놈도 바로 무릎 꿇려버릴 테다.
***
“엑소더스 펀드? 또 그놈들이야?”
김필중이 삼청동 안가로 강민철을 불러놓고 묻고 있다.
“네, 수석님. 미국 현지에서 민사소송을 걸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원종태 부회장이 직접 캘리포니아 현지로 날아갔고···”
“직접? 원종태가 현지로?”
김필중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회사를 상대로 걸려온 민사 소송 문제로 오너가 직접 현지로 날아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서 무슨 일이 있었대?”
“민사 소송이 진행되지는 않은 걸로 봐서 양자 간에 합의가 있었던 거 같은데···”
“합의? 내용은 모르지?”
“네. 그것까지는 파악이 안 되···”
“알았어. 원종태는 언제 시간 된대? 내가 가? 그놈이 와?”
“그게 저···”
“흥! 나보고 오라고 배짱을 내미는 모양이군. 알았어. 나가봐”
강민철이 90도 인사를 하고 나가자 김필중이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부회장님. 김필중입니다.”
— ‘아이고, 민정 수석께서 어인 일로··· 허허허’
“만나야겠습니다. 제가 갈까요? 여기로 오시겠습니까?”
— ‘수석께서 보자고 하시는데 제가 가야겠지요?’
“우리 쪽에서 연락을 드렸을 때 시간이 안 된다고 하셨다면서요?”
— ‘어이쿠, 그럴 리가 있습니까? 뭔가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나 봅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지요. 삼청동 안가에 계시지요? 수석님 편하신 시간이 언제신지···’
“지금 바로 오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 ‘네, 그럼 좀 있다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김필중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올라왔다.
수조 원의 재산을 주무르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도 오라고 하면 바로 튀어오게 할 수 있는 이 힘. 지금껏 살면서 온갖 단맛 나는 걸 다 먹어봤지만 이 권력질의 단맛만 한 게 없다.
갑자기 박수미의 빨간 팬티 생각이 났다.
요즘 이 년은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연락도 안 되는 거야?
***
“부장님 말씀하신 대로 박수미를 만났습니다.”
내가 한재민 앞에 빳빳이 서서 말했는데, 한재민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싱긋이 웃는다.
“그랬어? 말 잘 듣네. 독고다이.”
“박수미가 메일로 쏘아준 자료도 봤습니다.”
“그래? 뭐였어?”
난 스마트폰을 열어 한재민에게 내밀었다. 한재민은 내 폰을 받아 들지는 않고 목만 쑥 빼서 폰 스크린에 뜬 걸 보더니,
“하하하, 이걸 줬어? 역시 박수미 강단 있네.”
웃기만 한다.
“박수미와 부장님. 어떤 관계십니까?”
“어떤 관계? 왜 뭐 대단한 관계는 아니고. 그리고 그건 최용구 니가 지금 신경 쓸 게 아냐. 지금 해야 할 일에나 집중해.”
“지금 해야 할 일이라면···”
“최용구. 잘 들어.”
내가 방에 들어온 이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요리조리 돌리기만 하고 있던 한재민이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나도 긴장했다. 무슨 말이 나오려는 걸까.
“김필중 안 잡을 거야?”
“···”
“지금 니나 나나 타겟은 김필중인 거 같은데···”
“···”
“최용구 니가 김필중을 잡으려는 이유는 내가 알 바 아니야. 내가 김필중을 잡으려는 이유도 넌 알 필요 없어.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중요한 건 니나 나나 지금 해야 할 일은 김필중이라는 사실 아냐? 내가 박수미와 무슨 관계냐고? 그건 나중에 다 알게 될 곁가지야. 불차가 불난 집에 불 끄러 가는데 교통사고 났다고 그거 처리하고 가나? 넌 너대로 김필중 잡아. 난 나대로 잡을 테니. 오케이?”
“알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한재민이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중얼거리는 말이 뒤통수를 강하게 찔렀다.
“흥! 최용구 니놈이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사람 죽여놓고도 아닌 듯 버젓이 설치는 놈. 김필중이 워낙 세니까 넌 그냥 두는 거야. 다음은 바로 너야. 개~새끼.”
순간 울컥했고, 돌아서서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재민아, 나··· 이재훈이야···.’
하지만,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문을 평소보다 더 세게 쾅 닫고 나왔다.
***
“어이고, 두 분 형제께서 모두 와 주시다니요.”
김필중이 있는 삼청동 안가에 원종태와 원종우 형제가 모두 왔다. 김필중은 전혀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원종우는 직함만 회장일 뿐 회사의 모든 일을 동생인 원종태에게 일임하고 웬만해서 앞으로 나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상은 못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재벌 그룹의 총수 형제 모두가 출동해서 자신을 보러 친히 와 줬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힘이 쎄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디귿’ 자 형태의 소파에도 김필중이 상석에, 원종태와 원종우는 각각 김필중의 양 쪽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재벌 총수 형제가 김필중을 알현하러 온 형국이다.
“두 분 형제분을 제가 뵙자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백승철 부사장은 중동에 중요한 일이 터져서 급히 파견을 좀 보낸 것입니다.”
김필중의 말을 원종우가 끊고 들어왔다. 김필중도 놀랐지만 원종태도 흠칫하는 게 보였다. 원종우가 동생보다 먼저 나서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이다.
“백승철 부사장은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들어올 예정이니 그 점은 염려치 않으셔도 된다고 각하께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수석님.”
“아··· 네···”
원종우의 예상치 못했던 주도에 김필중은 더 할 이야기도 없다. 원종태도 어리둥절 하기는 마찬가지다. 둘이 멀뚱멀뚱 눈빛을 주고받을 뿐이다.
셋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이번에도 원종우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먼저 침묵을 깨고 나왔다.
“하하, 수석님. 동생이 혼자 오게 돼 있었는데 제가 같이 따라나서서 좀 의아하셨을 줄로 압니다. 제가 이 동생을 워낙 신뢰하고 아끼는지라 저희 그룹의 일이라면 거의 모두 혼자 결정하고 움직이게 맡겨두고 있습니다만, 수석님을 뵙는다길래, 아··· 이건 그룹의 일을 너머 국가의 장래가 달린 일이다 싶어서 같이 오게 됐습니다.”
국가의 장래가 달린 일이다?
원종우를 보고 있던 김필중의 눈초리가 반짝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그룹 회장쯤 되면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계산되지 않은 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백승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부른 자리에서 ‘국가의 장래’를 운운한다?
단순한 오바가 아니라는 걸 김필중은 눈치챘다.
시종일관 김필중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원종우도 김필중이 자신의 ‘오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걸 알아챘다.
“우리 ND 그룹의 창업주이시자, 저희 형제의 선친께서 늘상 저희 두 형제를 앉혀놓고 하시던 말씀이 있지요. 새로운 리더십은 예수님처럼 밤에 도둑같이 찾아온다고.”
“허허, 회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리더십이라니요. 각하 임기가 아직 1년 가까이 남았는데···”
“1년밖에 안 남았지요. 준비하실 시간이. 결코 많지 않은 시간입니다. 수석님은 능력과 야망은 모두 가지셨는데 시간만 부족한 셈이지요.”
김필중은 이 원종우라는 자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은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만큼 저희 형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런가? 동생”
원종우가 원종태를 쳐다보고 말한 건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이다. 원종태는 흠칫 놀라면서 대답했다.
“아··· 네 형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동생, 뵐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지금 급하게 동생을 따라나선 것도 그런 이유고.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어떤 걸 도와드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건 드리고 가는 게 좋아. 지금 이 자리는 국가의 장래를 위하는 자리라는 것. 동생도 잘 알지 않나. 우리 재벌들도 국가 잘 돼야 번영할 수 있는 것이고.”
형님께서 이렇게 청산유수셨나? 원종태는 얼떨떨했다. 하지만 평소 하늘같이 떠받들고 있는 형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알고 있는 건 최대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게 옳다. 그런데 어떤 것부터 말해야 하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하하하, 두 분께서 너무 앞서 가시는 것 아니십니까? 돈 이야기까지 이렇게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지난번에 제가 받은 것도 있고···.”
김필중이 말했는데 원종태가 화들짝 놀란다. 그건 아직 형님도 모르는 일인데···.
김필중도 원종태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말을 중간에 멈췄다.
하지만 이미 새 나온 말. 원종우가 온화한 미소를 띠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하, 우리 동생이 저보다 먼저 벌써 할 일을 했었나 보군요. 역시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옛말은 모두 틀린 말입니다. 여기 저보다 훨씬 나은 동생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
원종태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김필중과 원종우를 번갈아 보면서 말한다.
“저··· 형님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만···”
“음··· 괜찮아. 동생.”
“하하, 이거 저 때문에 우애 좋은 형제 지간에 분란이 생기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분란이라뇨. 그런 건 저희 형제 사이에 없습니다. 수석님. 여하튼 수석님,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큰 꿈을 가지시고 조만간 봉황의 날개를 뻗으시기 바랍니다.”
“허허, 이것 참··· 허허허”
김필중은 원종우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너털웃음만 크게 지을 뿐.
불꽃 튀는 싸움의 장이 될 줄 알았던 재벌 총수 형제와 민정 수석의 회합은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삼청동 안가를 나오면서 원종태가 원종우에게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형님, 미리 상의도 안 드리고 저 혼자 결정해서 죄송합니다.”
“응? 뭐 말인가? 동생?”
“음··· 저 아까··· 그··· 김필중한테 줬다는 그거···”
“아··· 뭐 그런 걸 가지고. 난 동생을 100프로 신뢰하는데 뭐. 뭘 했든 잘했어.”
형님이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원종태는 더 미안한 마음이 컸다.
“저··· 형님. 사실 아들놈 휘준이를 통해서 김필중에게 주식으로 좀 줬습니다. 차명으로요.”
“어허. 참 동생도. 그런 거 마음에 담지 말라니까.”
마음 넓으신 형님.
“그런데 형님, 아까 좀 놀랐습니다. 김필중에게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가시는 것 같아서요.”
“후후, 그랬나? 동생. 아버님께서는 늘상 베팅에 성공하셨었지. 그 이유를 아나?”
“음··· 그건···”
“아버님께서는 미래를 잘 맞추셨던 게 아니라 항상 미래를 만드셨기 때문일세. 백영기도 아버님께서 맞추신 게 아냐. 만드신 거지. 난 지금 김필중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이제 시작일 뿐이야.”
“아···”
원종태의 입에서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형님은 마음이 넓기만 하신 게 아니었다. 세상을 보시는 시야도 태평양과 같다.
“그럼 동생은 먼저 들어가 보시게. 난 좀 딴 데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네? 아, 네 형님. 그럼···”
원종우가 대기하고 있던 S클래스에 올라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원종태는 정자세를 유지하고 서 있었다.
***
오늘의 퇴근길은 유달리 피곤했다. 박수미, 한재민, 김필중··· 사건 수사를 맡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하루 종일 복잡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최용구 검사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내 앞으로 가로막고 말했다.
“뭡니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한 명이 나 쪽으로 한 발짝 내딛더니 한쪽 팔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의 뻗은 팔이 가리킨 곳엔 검은색 대형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이 승용차로 다가가 뒷문을 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안쪽을 봤는데,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인 한 명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타세요. 최용구 검사. 나 ND 그룹 원종우 회장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