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뭐든 타이밍이 중요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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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호텔 펜트하우스.
“씨바··· 백영기 뒤 닦아준 것도 본전도 못 건지고 다 털리고 왔는데 이제 그 꼬붕 새끼 김필중이 뒤 닦아주게 생긴 거야? 아··· 이 놈의 대한민국인지 개한민국인지에서 기업해 먹고 살기 정말 빡시군 빡세.”
원종태는 옆에 있는 물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삼다수다.
미국을 갔다 온 이후로 블링인지 빨랑인지 하는 물은 한 병도 빠짐없이 눈앞에서 안 보이게 치우라고 지시했다. 닭똥 냄새가 난다나 뭐래나.
‘아, 형님 생각은 어떠실까?’
원종태는 벌떡 일어나 친형 원종우가 이미 와 있는 옆방으로 갔다.
***
“김필중이 사람을 보냈단 말이지? 지 앞길을 닦으려고?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구만. 가만히 잘 있던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는 거 같구만.”
ND 그룹 회장 원종우가 소파로 나오면서 말했다.
원종태의 두 살 위 친형 원종우.
ND 그룹 창업주인 원영철이 70도 안 돼 죽었을 때, 큰아들 원종우의 나이 겨우 30대 초반이었다. 원종태는 갓 20대 딱지를 뗐었고.
급작스런 총수의 사망으로 당시 ND 그룹은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갖고 있던 지분은 모두 원종우에게만 갔다. 둘째 셋째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원종우는 그 점을 늘 동생 원종태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금 동생 몫의 지분을 넘겨주자니 회사가 커져버려 증여세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대신 원종우는 대주주로서 자문 역할만 하고, 회사 경영의 대부분은 동생에게 맡기고 있다.
현재 ND 그룹에 부회장은 원종태 말고는 없다.
조만간 봉급쟁이 사장 중에 누군가가 나이가 차서 부회장을 달아야 한다고 징징대면, 수석 부회장 직을 만들어 동생에게 줄 생각이다.
“내 안 그래도 큰집에 연락을 넣어봤는데···”
‘큰집’이란 청와대를 말한다. 원종우의 오랜 말버릇이다.
“아! 형님께서 벌써 움직이셨군요.”
원종태는 1억 불을 엑소더스 펀드에게 뜯기고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승철을 불러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뜯긴 돈을 정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하늘같이 모시는 형님께서도 움직이셨다고 한다. 원종태는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청와대에서 답이 왔나요?”
그런데··· 원종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만다.
“당분간 연락 넣지 말라네. 흥! 백영기 그 인간, 한 번 주머니에 들어가면 단 돈 1원이라도 다시 나오는 법이 없는 인간이잖나. 만나줄 리가 없지.”
형님이 저래 말씀하시니 원종태도 맥이 탁 빠진다. 자동으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네요.”
“허허, 동생. 뭐 그 정도로 의기소침하시나. 이미 지난 일이야. 대책을 만들어야지.”
“대책요?”
“날아간 돈 1억 불은 잊어버리자고. 우리 ND 그룹이 뭐 1억 불 정도 없어진다고 망할 회사는 아니잖나? 문제는··· 앞으로지.”
역시 형님이시다. 이렇게 침착하실 수가. 원종태는 이번엔 자동으로 입이 벌어졌다.
“그래, 동생. 아까 제 발로 찾아온 그 검사 놈이 뭐라고 했다고?”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하더군요.”
“응? 하하. 그런 말을 하고 갔어?”
“네. 지난번에 검찰 들어갔을 때 조사했던 검사 놈이었습니다.”
“그때가 수원 지검이었나?”
“네, 형님”
“그럼 그때부터 김필중이 꼬붕이었겠구만. 오래된 꼬붕을 보내서 길을 닦으려고 한 거구만.”
“맞습니다. 형님.”
“음··· 김필중이가 벌써부터 대권 잡을 준비를 한다라··· 민정 수석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후후, 누가 승질 급한 경상도 촌놈 아니랄까 봐.”
원종우가 관자놀이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서 말했다. 평소 편두통이 있어서 생긴 버릇인데, 저러고 나면 꼭 비상한 아이디어가 나오곤 했다. 원종태는 또 그걸 기대한다.
“동생. 돌아가신 아버님하고 은하 그룹의 은성표하고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이 뭐였나?”
“네? 음... 그건···”
“은성표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절대 한 놈에게 올인하지 않지. 하지만 아버님은 정반대셨어. 투자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불가근불가원 따위 했다가는 양쪽에서 다 얻어터진다는 생각이셨지. 대신 아버님께서는 말을 잘 갈아타셨어. 타이밍이 환상적이셨지. 한 놈에게 올인하셨다가 단물 다 빠졌다 싶은 생각이 드시면 빠르게 딴 놈으로 갈아타셨지. 그거 다 대성공이었어. 그 덕분에 우리 ND 그룹이 이렇게 튼튼하게 있는 거고. 은성표? 후후, 그 영감은 타이밍 잡는 건 우리 아버님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지. 은성표 그 영감 타이밍을 못 잡으니까 불가근불가원이니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다 담지 않는다는 둥 개소리를 하면서 지 무능력을 합리화한 거지.”
죽은 아버지 옛날 이야기까지 꺼내는 형님 원종우의 일장 연설 앞에서 원종태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손을 살포시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 앞에서도 이런 자세는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타이밍··· 지금이 아닐까? 어때? 동생 생각은···”
답을 줘야지, 물으면 어떡해? 원종태는 형님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후후, 동생, 백가 놈 아직 데리고 있지? 법무팀 부사장인가? 아직?”
백가 놈?
원종태는 잠시 헷갈렸다. ‘법무팀 부사장’이라는 말을 했으니 백영기 아들 백승철을 말하는 건데 지금까지 원종우는 한 번도 백승철을 가리켜 이렇게 지칭했던 적이 없다.
“예··· 아직···.”
“그놈 짤라.”
“네?”
아무리 그래도 현역 대통령 아들을 짜르자니. 원종태는 무릎 위에 얹은 손에 긴장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뭘 그렇게 놀라? 동생, 지금이 타이밍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제일 좋은 꺼리 아닌가? 더군다나 어차피 그 백가 놈 그놈 애비 때문에 데리고 있는 건데 이제 점점 이용 가치도 없어지고 있잖아? 이번에 1억 불 뜯기는데도 아무 도움 안 됐잖아. 이용가치 떨어지고 있는 놈, 마지막으로 타이밍 잡는데 한 번 써먹어보자고. 아~ 짜르기 보다는 저~어기 멀리 어디로 보내버려. 험악한 데로. 그게 낫겠어. 그래 놓고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고.”
험악한 데라면··· 원종태는 어딘지 대충 감이 잡혔다.
“저··· 하지만 대통령이야 볼 것도 없이 길길이 날뛰···”
“아니, 아니. 그 애비 놈이 어떻게 나오냐를 보자는 게 아니라 김필중 말이야.”
“아···”
“우리를 때리려고 김필중이 나서면 아직 갈아탈 타이밍이 아닌 거고, 슬슬 무마하고 넘어가면 확실히 갈아탈 타이밍인 거지. 후후”
***
“야! 독고다이. 니 지금 내 말 듣고 있냐?”
송대기가 큰 눈알을 부라리면 큰소리쳤다.
“아, 네. 부장님. 잠시 딴생각을···.”
“시키~ 내 밑에서 있다가 옮겨간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빠져가지고··· 왜? 전태기가 자살했다고 하니까 좀 찝찝하냐?”
“음··· 뭐··· 그런 건 아니고···”
“야! 일단 죽은 전태기는 일단 제쳐놓고 지금부터 내 말 좀 들어봐. 이건 그냥 내 추론이고 추측일 뿐이긴 한데···”
송대기가 나한테 내밀었던 사건 파일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이 회사 이름 말이야··· 괴상한 이름··· 드라코(Draco)···”
“네.”
“이게 무슨 뜻이냐?”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지 않았다.
“드라코면 드래곤··· 용(龍)이겠네요.”
“맞아. 근데 거기 회사 주주 명부에 있는 외국인 투자자 회사 이름은 뭐냐?”
송대기가 사건 파일을 들춰 회사 이름에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바실리스크(Basilisk) 에쿼티 인베스트먼트··· 바실리스크?”
난 송대기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뭔가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바실리스크. 이건 또 뭐냐?”
송대기가 물었다. 아까 드라코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바실리스크면 이것도 용이죠. 다 용이군요. 투자한 회사도, 투자받은 회사도···.”
송대기가 날 보면서 싱긋이 웃는다.
“드라코, 바실리스크, 용, 구룡, Nine Dragon, ND 그룹. 이렇게 연결시키면 내 추론이 너무 비약이 심한 거냐? 어떻냐? 독고다이 니 생각은?”
이번엔 내가 송대기를 보면서 싱긋이 웃어줬다.
정의파 검사 송대기. 맨날 형사부에서 사기꾼이나 잡고 다니던 송대기지만 이번엔 제법 괜찮은 추론을 해냈기 때문이다.
“하하, 새~끼. 니 웃는 거 보니까 내 추론이 말이 되긴 되는 모양이네. 그런데··· 여기에 김필중 수석은 어디쯤에 끼어들 거 같냐? 음··· 만약 끼어드는 게 맞다면··· 엥?”
김필중 이름 석 자에 갑자기 웃음끼가 확 사라진 내 얼굴을 보고 송대기가 말을 멈췄다.
“시키~ 정신이 나갔네. 왜? 김필중 이름이 나오니까 벌써 쫄리냐?”
쫄리냐고?
맞다. 쫄린다.
김필중이 만들어낼 상황, 김필중이 그리고 있을 계획을 생각하니 쫄렸다.
원종태를 만나기 전까지 난 김필중이 그저 백영기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각하’를 연발해대는 호위 무사에 불과한 줄 알고 있었다.
백영기를 지키기 위해 나 이재훈 죽이는 걸 지시 또는 방조했고,
차기 주자로 부상하면서 권력에 도전할 기미가 보였던 정수명도 쳐냈고,
은하 그룹도 손 봐줬고,
하지만 그게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됐다.
한심한 이재훈.
죽고 난 뒤에도 이토록 순진했었다니···.
“야, 독고다이. 무슨 말 쫌 해봐. 너 지금 무슨 생각하면서 멍 때리고 있냐?”
송대기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큰소리쳤지만, 내 생각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김필중은 송대기 같은 정의파 검사의 단순한 전략으로는 찍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백영기는 그저 정치인에 불과했고, 돈 욕심이 있기는 했지만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최소한 ‘개혁’에 대한 계획이나 비전도 있었다.
하지만 김필중은 원종태를 통해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돈 욕심도 백영기만큼 있고, 뭣보다 현재 최고의 권력기관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김필중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누구도 그 계획을 막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곰탱이’ 정의파 검사 송대기는 이런 걸 모를 거다. 김필중에게 ‘전태기 자살’ 같은 것쯤은 그냥 길거리 유기견이 독약 먹은 쥐 잡아먹고 죽었다는 정도로 끝내버릴 수 있는 사건이다.
— ‘김필중은 그 정도로 찍어낼 수 있는 인간이 아냐’
한재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박수미를 만나봐’
박수미. 아까 내 방에 찾아왔었지. 한재민 말대로 정말 어떤 비책이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저··· 부장님. 죄송한데 지금 좀 나가봐야 될 거 같습니다.”
“뭐··· 뭐? 이 시키가 지금 뭐래는 거야?”
송대기가 황당해하며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 문을 열고 있었다.
“저, 그리고 이 사건요. 하실 건가요?”
문을 반쯤 열고는 아직 앉아있는 송대기를 보고 물었다.
“야! 지금 무슨 소리야?”
“이 사건.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우리 쪽에 이첩해주세요. 그럼 전 이만···”
난 울그락불그락 하는 송대기를 내실에 남겨두고 급하게 검사실을 나왔다.
나오면서 정화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검사님. 지금 밥 다 먹고 청으로 돌아가는 길···’
“박수미 씨는요? 옆에 아직 있어요?”
— ‘박수미 씨요? 어, 방금 전에 헤어졌··· 아··· 아직 저기 있네. 박수미 씨! 잠깐 이리 와봐.’
“지금 어디죠? 제가 가죠.”
— ‘네? 아··· 여기 청 앞에 다 왔는데···’
난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화용 옆에는 박수미가 스키니 진을 입은 긴 다리를 쭉 내밀고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나를 보고 생긋이 웃고 있는 박수미 얼굴이 마치 100배 줌 카메라로 땡긴 듯 크게 내 눈에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