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단순한 투신 자살 사건이 아냐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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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갓 넘은 시간, 서울 목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안녕하세요.”
40대 후반의 한 사내가 아파트 현관 앞을 지나면서 경비에게 인사를 했다.
사내는 짙은 쥐색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조금 풀어헤쳤는데 많이 피곤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걸어올 때까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도 몰아 쉬곤 했는데, 경비를 보자 애써 웃는 낯을 지어 보였다.
“아이고, 오늘도 늦으시네요. 맨날 야근이신가 봐요.”
경비도 이 사내를 잘 안다. 항상 자정 근처 늦은 시간에 퇴근하면서도, 야근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 인사를 빠뜨리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 몸 생각하시면서 일하세요. 맨날 이렇게 늦으시니···.”
“네, 저도 저지만, 어르신께서 고생이 많으세요. 이 밤 중에. 눈 좀 붙이시고 일하세요.”
“허허, 네, 그러지요. 어여 들어가서 쉬세요. 어여~”
사내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현관으로 들어갔고, 경비는 사내가 엘리베이터 타는 거까지 보고 초소로 들어갔다.
인건비 절약하느라고 경비 숫자를 확 줄인 탓에 요즘은 정말 일이 많아졌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앉아서 잠시 쉴 시간도 찾아먹기가 힘들다. 그래도 안 짤리고 붙어 있는 게 어딘가. 같이 일하다가 짤린 박 영감은 폐지 줍고 있다고 들었는데.
경비는 오늘 아침에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에서 주워다 놓은 작은 티 테이블을 의자 앞으로 땡겨와, 그 위에 다리를 얹었다.
“어휴~ 다리야. 한결 낫네. 한 30분이라도 눈 좀 붙이자.”
좀 자보려고 자세를 잡았는데 의자 등받이가 너무 낮다. 머리가 등받이에 붙지 않고 뒤로 홱 넘어가는 바람에, 의자 뒤에 있는 창문으로 아파트 건물이 거꾸로 보였다.
“에이, 이러고 자다가 목 부러지겠···”
순간, 창문 밖으로 시커먼 사람 형체 같은 것이 아파트 건물에서 떨어지는 게 보였다. 머리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본 탓에 그 떨어지는 시커먼 형체가 눈 속으로 확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엉? 뭐야 저거?”
섬뜩한 기분에 소름이 쫙 끼쳤다.
‘쿵’
헛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꽤 컸다. 뭔가 딱딱하고 무게도 제법 나가는 게 떨어진 게 틀림없다. 초소에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뭐지?”
으스스하고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 돌았지만, 마냥 의자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리 나이 든 영감이라지만 경비는 경비 아닌가.
초소 문을 박차고 나와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헉! 이··· 이건··· 으악~”
경비가 발견한 건 아까 자기에게 안녕하냐고 인사하고 올라갔던 그 40대 사내다.
바닥엔 피가 흥건했고, 눈의 흰자만 까뒤집혀진 40대 사내는 이미 숨을 쉬지 않았다.
***
“어머, 오랜만이에요. 검사님.”
드래곤 호텔에서 원종태를 만나고 검사실로 돌아온 내 앞에 웬 키 큰 여자가 서서 인사를 한다. 블랙 스키니 진을 입어서 더 늘씬해 보인다.
“누구···”
“어머, 검사님. 저 몰라보시는 거예요? 어머··· 섭섭해라.”
“박··· 수미 씨?”
수원 지검 시절, 펑퍼짐한 면바지와 헐렁한 남방에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고 화장 안 한 맨 얼굴로 뛰어다니던 박수미였다.
그런데 지금 나 앞에 서서 생긋이 웃고 있는 박수미는 웨이브를 조금 넣은 긴 머리를 오른쪽으로 모아 가슴 앞으로 늘어뜨리고, 스키니 진 위에 몸에 착 달라붙는 블라우스를 입었다. 화장도 세련되게 해서 얼굴이 반들반들하다.
나는 이런 박수미의 달라진 모습 때문에 낯설기도 했지만, 얼마 전 한재민이 했던 말 때문에 더더욱 께름칙했다.
‘박수미··· 이 여자··· 도대체 정체가 뭐야?’
찝찝한 생각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박수미 씨. 바로 못 알아봐서 미안해요. 오랜만이네요.”
내가 악수를 청하려고 손을 반쯤 올렸는데, 박수미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검사님.”
내 손을 잡은 박수미의 악력이 강했다. 손만 세게 잡은 게 아니라, 아예 팔을 자기 쪽으로 세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얼른 손을 뺐다.
‘이 여자가···’
당황하는 나를 보고 생긋이 웃는 박수미의 표정이 여간 불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박수미 옆에 선 정화용은 교생 선생을 처음 본 중학생 마냥 싱글벙글이다. 원래 좋아했던 사람인데 이전보다 더 이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말해 뭐하겠나.
“검사님. 박수미 씨가 취직했대요. 요~ 앞에 있는...”
“조그만 투자 자문사예요. 검사님.”
박수미가 정화용의 말을 중간에 짜르고 말했다. 생글생글 웃는 표정은 그대로다.
“그래요? 잘 됐네요. 아, 정 계장님, 오랜만에 봤으니까 박수미 씨하고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같이 하세요.”
“검사님은요? 같이 가세요. 오랜만에 보는데··· 네?”
박수미가 얼굴을 내게 확 들이밀면서 말했다. 거의 내 얼굴에 닿을 뻔했다.
“네? 아... 전 바빠서요···”
난 어떻게 해서든 이 당황스럽고 불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어~이, 죽는 소리 곡소리 나는 검찰청 건물에서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새 나오길래, 어딘가 했더니 독고다이 최용구 검사 방이었구만.”
송대기였다.
“엇! 부장님.”
구세주가 이렇게 반가울까.
“독고다이 수원 촌놈, 서울 오더니 때깔이 훤해졌네.”
“때깔이야 부장님도 마찬가진데요? 하하. 아, 정 계장님 박수미 씨하고 같이 나가보세요. 박수미 씨는 반가웠습니다. 부장님, 내실로 드시죠.”
나는 얼른 송대기를 데리고 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으이그~ 검사님은 여전하시네요. 냉랭~ 해요. 호호호.”
박수미가 내실 문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서울로 올라오셨잖아. 여기 분위기가 수원보다는 쎄니까 긴장하시는 거지. 그래도 알잖아? 평소에 우리 최용구 검사님 친절하신 거. 자자, 박수미 씨, 검사님 말씀대로 우리 둘이 나가서 식사나 같이 하자고.”
정화용 얼굴엔 웃음끼가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씩 곁눈질로 박수미의 쭉 빠진 다리와 잘록한 허리도 훔쳐본다. 이렇게 잘 빠진 몸매였었나?
“호호호, 뭐 전도유망한 검사님이시니까 용서해 드려야죠. 괜찮아요.”
“응? 용서? 하하. 그래, 그래.”
또 한 번 슬쩍 박수미의 허리 밑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정화용.
“계장님. 검사님 말씀대로 우리끼리 나가요. 검사님은 실패고, 계장님이나 꼬셔서 맛있는 거 먹어야겠네요. 아세요? 저요~ 새 직장에서 월급 마~안이 받거든요. 제가 살께요.”
“뭐라고? 박수미 씨가 산다고? 야~ 그래, 그래. 나가, 나가자고. 하하하.”
둘은 오래 사귄 친구처럼 잡담을 주고받으면서 검사실을 나갔다.
박수미는 나가면서 내실 창문을 한 번 돌아봤는데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어쩐 일이세요? 부장님.”
내실로 들어온 나는 종이 커피를 타서 송대기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송대기는 이번 검찰 정기 인사에서 송대기도 서울로 이동했다.
서울 남부 지검 형사 6부장.
여의도 증권가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어서 서로 오고 싶어 안달하는 자리다. 비록 공안이나 특수 같은 인지 부서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송대기가 제법 괜찮은 영전을 한 셈이다.
“김필중 민정 수석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넌 후배 복 지지리도 없는 놈이니 아예 후배 덕 볼 생각은 하지 말고 후배를 아예 잘 모시고 살라고. 그래서 우리 독고다이 최용구 후배님한테 문안 인사드리러 왔지. 하하.”
별로 재미없는 송대기의 농담에 나는 대꾸할 생각하지 않고 싱긋이 웃고 말았다.
“내 관할 구역이 여의도고 형사 6부가 증권 금융 사건 담당이잖아. 너네 금조처럼 큼지막한 건은 아니고, 주로 주식으로 사기 친 놈, 남의 주식 떼먹고 도망간 놈, 떼먹으려다가 안 되니까 자살한 놈··· 뭐 그런 사건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관이 있으니까, 니네 에이스 검사 한재민 부장님한테 짜웅도 할 겸, 독고다이 최용구 얼굴도 볼 겸 해서 왔지.”
송대기가 한재민 이름을 말하면서 인상을 살짝 썼다. 송대기는 체질적으로 한재민 같은 스타일과는 안 맞는다.
“음··· 부장님이 한재민 부장한테 짜웅을 하신다? 그걸 믿으라구요? 호랑이가 야채만 먹고살겠다는 말이 차라리 낫지. 그리고 제 얼굴을 보러 오셨다구요? 그건 더 말이 안 돼. 왜 오셨어요? 무슨 사건입니까? 제게 물으러 오신 게.”
“하하, 독고다이 새~끼. 서울 오더니 눈치빨 하나 쾌속으로 늘었네.”
송대기가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사건 파일을 꺼내 내게 내민다.
“이거 한 번 봐봐.”
“이게 뭔데요?”
“40대 가장이 주식하다 말아먹고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어.”
“네?”
가장이 투신했다는 말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주식하다 자살하는 사건 같은 건 개가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보고 짖었다는 말만큼이나 여의도에선 흔해빠진 일인데, 그런 일로 송대기가 여의도에서 서초동까지 친히 와서 사건 파일을 내민다는 게 놀라서 물은 거였다.
“보통 투신자살 사건이 아냐. 한 번 봐봐.”
“네.”
그래도 송대기가 보라고 주는 거니 파일을 열긴 열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파일을 넘겨보던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물었다.
“이게 회사 이름입니까?”
“어, 맞아. 이름 한 번 요란하지? 비상장이야.”
“드··· 드라코 셀 테크 매트··· 매트리얼즈? 한국 회사 맞습니까?”
“맞대. 외국인 투자도 제법 많이 유치한 유망한 기업이래.”
“뭐하는 회산데요?”
“태양광 모듈에 들어가는 밀봉재하고 백시트를 만드는 회사래.”
태양광? 뭔가 느낌이 강하게 왔다.
파일을 탁 덮고 송대기에게 물었다.
“주식 투자했다가 가장이 자살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이걸 부장님이 왜 보시는 겁니까?”
“간단해 보이지만 간단한 게 아냐. 주식을 돈을 빌려서 샀대. 그런데 빌려준 놈이 안 나와.”
“빌린 게 아니군요.”
“빌린 게 아니라면 이 주식은 어디서 났겠냐?”
“차명으로 받은 거죠.”
“빙고”
송대기가 엄지 척을 해줬다.
“그런데 말이야. 더 중요한 건... 죽은 사람 이름을 봐봐.”
“이름요?”
아까는 파일을 대충 훑어보느라 이름을 보지 않았다.
“독고다이 니가 아는 사람이야.”
“네?”
난 사건 파일을 얼른 다시 열었다. 서류들을 찬찬히 살폈는데, 내가 죽은 사람 이름을 찾기 전에 송대기가 먼저 말했다.
“전태기야.”
난 서류철에서 자동으로 눈이 떼 졌다. 내 눈은 이미 왕방울 눈 송대기보다 더 커져 있었다.
“저··· 전태기요?”
“응. 청와대 총무 비서관 하다가 은하 테크론 기술 유출 사건 때 대통령 둘째 아들 백승환이 때문에 짤린···.”
난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전태기.
왜 죽었을까. 미국에 유학 보내 놓은 딸도 있다 했는데··· 정말 자살이 맞긴 맞는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핑핑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송대기가 천천히 말을 했다.
“내가 온 이유··· 주식 때문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뭐 지금은 그냥 내 감일뿐이지만···”
“뭐죠?”
“민정 수석. 김필중 수석.”
“네?”
“죽기 며칠 전에 와이프한테 말했대. 민정 수석을 보러 간다고. 새로 민정 수석 된 분이··· 김필중 말하는 거겠지··· 김필중 민정 수석이 자기를 보자고 하는데 좋을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청와대에 엄청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었대. 그런데 김필중을 만나고 와서는 이틀 뒤에···”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난 송대기의 말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