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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검사에 빙의했다-57화 (57/70)

〈 57화 〉 호위무사가 돼주는 대가, 호위무사로 만드는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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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최용구. 나 정말 이번에 신경 많이 썼다. 인마 나 누구한테도 이렇게 신경 써서 배려해준 적 없다고, 알아?”

권성훈의 차 안.

권성훈은 운전 중이고 난 일부러 뒷좌석에 앉았다. 권성훈은 뒷좌석에 앉은 나를 룸미러로 연신 흘겨보면서 말을 했다.

“야! 드래곤 호텔 꼭대기 펜트하우스는 나도 한 번도 안 가본 곳이야. 내가 ND 그룹 장학생으로 일한 지가 벌써 십수 년인데도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라고. 너 이 시키··· 원종태 부회장이 특별히 배려해서 널 거기로 부른 건데··· 그거 다 내 덕이라고 알아. 알겠어?”

권성훈이 목청 높여 말했지만, 난 차창 밖 한강이나 바라볼 뿐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다. 권성훈은 열불이 솟구쳤지만 어쩔 수가 없다.

‘으··· 그놈의 동영상만 아니라면···.’

권성훈은 자기 신세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후배한테 약점을 잡혀서 전전긍긍하는 지경까지 돼 버리다니.

더군다나 지금 최용구를 데리고 가고, 아니 모시고 가고 있는 드래곤 호텔은 박수미와 뒹굴었던 바로 그 호텔이라 더 속이 쓰렸다.

박수미.

그날 그냥 저녁만 먹었어야 했다.

한강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드래곤 호텔의 칵테일 바가 죽여준다고 꼬시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칵테일 바까지는 갔더라도 박수미가 쭉 뻗은 하얀 다리를 척 꼬고 앉지만 않았어도 호텔 방까지 올라가지는 않았을 거다.

아니, 호텔 방까지는 갔다 해도 그 팬티, 박수미의 그 빨간색 팬티만 아니었다면···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이제 여기 드래곤 호텔에 다 온 거 아닌가요?”

권성훈은 내가 이렇게 말해주는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박수미의 빨간 팬티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권성훈의 차는 드래곤 호텔 정문을 지나 건물 뒤쪽 지하로 들어갔는데,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지하주차장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검은 양복을 입은 시큐리티 요원들이 권성훈 차의 번호판을 확인하고 들여보냈다.

지하 주차장은 차 10대 정도만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거기엔 이미 벤츠 S클래스와 BMW 8 시리즈 다섯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 두 대는 컨버터블. 캘리포니아라면 사족을 못 쓰는 원종태 취향이 드러났다. 이럴 거면 그냥 캘리포니아 가서 살지 왜 한국에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내리시죠.”

시큐리티 요원 한 명이 차문을 열면서 말했다.

내가 내리자 운전석의 권성훈도 같이 내렸는데,

“기사님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지금 바로 차 빼서 돌아가세요.”

시큐리티 요원이 권성훈을 보면서 말했고,

“뭐··· 뭐? 기사?”

졸지에 기사 취급을 받은 대한민국 검사 권성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시큐리티 요원의 안내를 받아 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권성훈은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 한 채 차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

“최용구 검사, 우리 초면이 아니죠.”

내가 드래곤 호텔 최상층에 있는 펜트하우스 방에 들어섰을 때, 원종태는 기다란 소파에 앉은 채로 나를 맞았다. 인사를 하면서도 일어서지도 않았다.

유치한 재벌 놈, 이런 식으로 내 기를 죽이려 한다니.

난 아무 대답하지 않고 원종태가 앉아있는 소파 옆에 저벅저벅 걸어가 앉았다.

“그래, 어쩐 일로 우리 바쁘신 대한민국 검사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원종태가 비스듬히 기댔던 몸을 쓰윽 일으키면서 내게 물었다.

“최근 미국에 갔다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대한민국 검사께서 일개 재벌 부회장의 동선 추적까지 하고 계신 줄은 몰랐군요.”

원종태가 이 말을 하면서 다시 몸을 비스듬히 눕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국이 됐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 불쾌한 일이셨나 보군요.”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원종태. 그저 나를 계속 째려보고만 있다.

“큰 민사 소송을 당하실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해결은 하셨는지요?”

“알고 싶은 게 뭐요?”

원종태 목소리가 높아졌다. 심덕환에게 뜯긴 1억 불 생각에 열불이 치솟는 듯 보였다. 아, 1억 불이 아니라 거기서 1불 뺀 금액이지.

“알고 싶은 건 없습니다. 다 알고 있으니까요.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원종태가 다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워 앉는다.

“나한테 알려주고 싶은 게 있다?”

원종태 목젖이 침을 삼키느라 꿈틀 하는 게 보였다. 그래도 대한민국 검사가 직접 와서 뭔가 알려주겠다는데 구미가 안 당길 수가 없었을 거다.

“이번에 미국 갔다 오신 이유는 에마스(Emas) 때문이셨죠? ND 케미칼 주가 조작으로 버신 돈세탁하시는데 썼던 말레이시아 페이퍼 컴퍼니.”

“그걸 왜 또 지금 이야기하는 거요? 지난번 조사 때 다 끝난 거잖소? 약식 기소까지 했고.”

약식 기소를 말할 때 원종태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 약식 기소 때문에 미국까지 날아가서 1억 불을 뜯기고 왔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제게 조사받기 전에 권성훈 검사가 부회장님께 넘겨준 수사 자료에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원종태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다.

“에마스에 대한 자료밖에 없었겠지만···”

난 준비해 간 서류가 들어있는 노란색 대봉투를 원종태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뭐요?”

“말레이시아 페이퍼 컴퍼니. 에마스 하나만이 아니잖습니까? 페라크(Perak), 강사(Gangsa). 그것들과 연결된 ND 그룹의 다른 계열사. ND 코퍼레이션, ND 벤처캐피탈에 대한 수사 자료입니다.”

‘수사 자료’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내가 검사 최용구로서가 아니라, 죽기 전 이재훈일 때부터 알고 있던 걸 정리한 것이니까.

원종태는 얼른 내가 내민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내본다.

서류와 나를 번갈아 보는 원종태의 동공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권성훈 검사는 에마스 말고는 드릴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것만 가져가라고 제가 미끼를 던진 거였으니까요.”

“미··· 미끼?”

“네. 미끼요. 사실 부회장님 입장에서는 나머지 두 개, 특히 강사(Gangsa)에 신경이 더 쓰이는 것 아니십니까? 강사를 통해 세탁된 돈은 ND 벤처캐피탈이고 벤처캐피탈의 대주주는 아마··· 부회장님의 아드님이신 원휘준 상무죠?”

재벌이든, 검사든, 저잣거리에 필부든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야 똑같겠지. 아끼는 마음이 크다는 말은 동시에 거기가 약점이라는 말이기도 할 테고.

“그··· 그래서요? 이걸 나한테 다 주는 이유가 뭐요? 혹시··· 이··· 이것도 미끼요?”

원종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내가 던진 미끼에 걸려 1억 불을 날리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원종태와 같이 돈을 가진 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아니 무서워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지금 원종태는 대한민국 검사 최용구가 무서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민 자료가 가지고 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가 무서워 떨고 있는 것이다.

그래, 저 무서워 떨고 있는 재벌 놈에게 내가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단서를 하나 던져줘 보자.

“부회장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 아시나요?”

두려워 떨고 있던 원종태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예상했던 바다.

“꽃이 피면 열흘을 안 간다는 말인데, 부회장님은 그러면 그 꽃을 언제 꺾어야 될까요?”

여전히 원종태는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눈만 꿈뻑꿈뻑한다.

“부회장님, 저라면 그 꽃. 열흘밖에 못 간다는 거 알고 있다면 저는 그 꽃을 딱 6일 됐을 때 꺾겠습니다. 피크를 지나자마자 바로 꺾어야지요. 그래야 값어치도 제일 많이 나갈 테지만 뭣보다 다른 꽃으로 갈아타기도 제일 좋을 타이밍이고. 안 그렇습니까?”

원종태의 떨리던 눈이 차츰 안정되는 게 보였다. 마른 입술을 손으로 슥슥 닦았는데 입가에 옅지만 미소도 살짝 엉겼다.

멍청한 재벌 놈, 이제서야 내 말을 조금 알아듣는 눈치다. 한 발짝 더 나가보기로 한다. 이번엔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숫자가 나오는 말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있죠. 아, 대한민국은 십 년이 아니라 5년이던가요? 그 5년도 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역시 숫자로 때려줘야 제대로 알아듣는다. 원종태 입가에 살짝 맺혔던 미소가 더 커졌다.

“최용구 검사? 후후, 꼭 4년 전에 날 찾아왔던 김필중을 보는 것 같구료.”

아하, 바로 이거다. 김필중이 지금 나처럼 원종태를 찾아왔었다? 이건 내가 몰랐던 사실이다. 이런 걸 캐내려고 원종태를 만나려고 한 거다.

난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나올 타이밍이니까. 제대로 들어줘야지.

“그땐 백영기가 대통령 되는 길을 닦으려고 김필중이 에마스(Emas) 자료를 들고 찾아왔었지. 지금 최용구 검사가 강사(Gangsa) 자료를 들고 날 찾아온 걸 보니 김필중이 대권을 잡겠다고 마음을 잡은 모양이군. 김필중이 백영기에게 그랬듯, 최용구 검사가 김필중의 호위 무사가 된 거요?”

난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원종태의 이 말이 뜻하는 게 뭐지?

백영기가 에마스 비자금을 김필중을 통해 막고 대통령이 됐듯이, 이제 김필중이 강사(Gangsa)의 뭔가를 최용구를 통해 막고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강사의 비자금과 김필중이 연결돼있다? 이건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벌어진 일임에 틀림없다. 난 원종태에게서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네, 부회장님. 저도 남자인 만큼 권력자의 호위 무사가 돼서 천하를 호령하는 정도의 야망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풍을 떨었다.

“후후, 야망이라, 근데 야망만 가진다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돈! 돈이 있어야 되는데··· 김필중은 호위 무사가 돼 주는 조건으로 강사(Gangsa)를 받았는데, 우리 최용구 검사는 김필중한테서 뭘 대가로 받으셨소?”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채로 있었던 의문.

왜 김필중은 나 이재훈의 죽음에 그리 집착했을까?

왜 최용구가 이재훈을 정말 죽였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한재민에게까지 그 의심을 뻗쳤던 걸까?라는 의문이 이제서야 풀렸다.

말레이시아 페이퍼컴퍼니 강사(Gangsa)는 ND 벤처캐피탈이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개발에 투자한다는 명분으로 투자한 돈을 빼돌려 세탁하는 데 썼던 회사다.

ND 케미칼 주가 조작으로 빼돌린 돈을 에마스(Emas)를 통해 백영기와 원종태가 나눠가졌듯이, ND 벤처캐피탈의 스타트업 투자 명분으로 빼돌린 돈 역시 강사(Gangsa)를 통해 백영기와 원종태가 나눠가졌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목숨 바쳐 백영기를 지키리라 맹세했다는 호위 무사 김필중.

세상사에 공짜란 없다.

대가 없이 목숨 바쳐 뭔가를 지킨다는 약속, 맹세 따위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김필중은 호위 무사가 되는 대가로 강사의 비자금을 받았고, 백영기는 강사의 비자금으로 올가미를 씌워 김필중을 호위 무사로 만들었던 거다.

난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서는 나를 올려다보며 다시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원종태를 보고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뭐요?”

“아, 그리고 제가 대가를 받은 게 있냐고 물으셨는데... 아까 말씀드렸었죠?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백영기든 김필중이든 언젠가는 꺾어야 하는 꽃이고 10년을 못 가는 권력일 텐데··· 제가 거기에 목숨을 걸고 호위 무사든 뭐든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부회장님.”

난 홱 돌아서 문 쪽으로 두세 걸음 걷다가 잠깐 멈춰 섰다. 원종태를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더 했다.

“부회장님도 꽃을 꺾으실 때는 꺾으셔야겠죠. 그 타이밍 놓치시면 나중에 괜히 떨어진 꽃잎이나 주우면서 청소를 하셔야 할 겁니다.”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펜트하우스 출입문으로 걸어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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