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1억 불이 뉘 집 애 이름인줄 알아?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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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의 중소 도시 샌 라몬 (San Ramon).
샌프란시스코 베이(Bay)를 사이에 두고, 서쪽의 길게 뻗은 반도에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IT 기업이 밀집해 있는 반면, 동쪽의 내륙에는 미국 최대의 석유 에너지 기업 쉐브론(Chevron)이 있다.
샌 라몬은 바로 이 쉐브론의 본사가 있는 도시.
석유 화학 기업인 ND 케미칼의 미주 본사도 이 때문에 샌 라몬에 자리를 잡았다.
“IT가 애플이면 석유 하면 쉐브론 아닙니까? 우리도 선진 기업이 되려면 선진 기업 옆에 있어야 합니다. 미주 본사는 캘리포니아 샌 라몬으로 정합시다.”
원종태가 전사 임원 회의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한 게 10년 전.
그 10년 동안 ND 케미칼이 선진 기업으로 발전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원종태가 캘리포니아에 날아온 횟수와 쓴 돈이 늘어난 건 확실하다. 물론 날아올 때 탄 비행기는 회사 전용기고, 쓴 돈도 회삿돈이다.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ND 케미칼 미주 본사 사장 홍병윤이 공항에 영접을 나왔다.
“홍 사장. 이렇게까지 나와줄 필요는 없는데요.”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걸로 알려진 원종태다. 홍병윤에게 존대를 한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홍병윤이 ‘댁’이라고 말한 곳은 샌 라몬 외곽에 있는 원종태의 개인 전용 저택이다. 그래도 등기는 회사 이름으로 돼있고, 재산세 등 세금도 모두 회삿돈으로 낸다.
이 저택은 항상 비어있다가, 원종태가 온다고 하면 미주 본사의 직원들이 일제히 달려가 쓸고 닦고 유리알처럼 만들어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원종태가 머무는 동안에 마실 물이다.
원종태는 어릴 때부터 대장이 민감해서 물갈이가 심했다. 물이 조금만 바뀌어도 아랫배가 뒤틀리면서 설사가 줄줄 샜는데, 그래서 지금도 먹는 물이 정해져 있다.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방방곡곡 어디를 가든 딱 그 물만 마셔야 한다.
‘블링(Bling) H2O’라는 럭셔리 미네랄 워터.
미국 테네시 주의 어떤 시골 동네에서 나는 물을 병에 정성껏 담았다는데, 750ml 한 병에 40불가량 한다. 가장 싼 게 그 정도다. 한 병에 3,000불 짜리도 있다.
가격만 비싼 게 아니라, 병도 와인병 같은 유리병에 마개도 코르크다. 상표도 일반 PET 생수병처럼 비닐을 둘러친 게 아니라, 와인처럼 라벨이 붙어있다.
라벨에는 스와로브스키에서 특별 제작한 유리 비드를 촘촘히 박아 ‘bling’이라는 글씨를 만들었는데, 덕분에 라벨이 말 그대로 블링블링하다.
“이거 딱 내 스타일이야.”
원종태는 헐리우드의 배우들이 나이트클럽에서 술 대신 이걸 마신다는 뉴스를 어딘가에서 보고, 덩달아 한 번 마셔보고는 바로 꽂혀 버렸다.
언젠가 미국에 파견 나온 지 얼마 안 된 주재원이 고급 물이라고 피지(Fiji) 워터를 원종태 방에 넣어줬다가, 원종태 영접을 전담하는 임원한테 끌려가서 이단 옆차기를 얻어맞고, 24병들이 피지 워터를 모두 뒤집어쓴 채, 비 맞은 생쥐 모양으로 물을 뚝뚝 흘리면서 사무실에서 벌을 섰다는 일화가 ND 그룹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물론 이런 일화는 원종태는 모른다. 시킨 적도 없다.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인데 어찌 그런 일을 시키겠나. 다 아랫것들이 회사를 걱정하는 마음에 충성하느라고 알아서 긴 결과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30분 정도 달려 원종태의 저택에 도착했다. 집 문 앞에는 미주 본사의 미국 변호사 로버트 리가 기다리고 있다.
“어, 왔어요? 로버트 리 들어가죠. 홍 사장은 수고했어요. 안 나와도 된다니까 나와서는. 나 일정 봐서 회사 한 번 들르든가 할 테니까 그때 보죠.”
“네, 부회장님.”
공항까지 와서 집까지 모시고 왔으면 들어가서 물이라도 마시고 가라는 말 할 법한데 그런 거 없다. 그래도 집에 같이 들어가자고 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홍병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바로 90도로 절을 올리고 돌아섰다.
집에 들어가 소파에 앉자마자, ‘블링 H2O’를 마시면서 원종태가 물었다.
“이번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죠?”
“네. 부회장님. 백승철 부사장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고 일을 진행했습니다.”
‘백승철’ 이름 석자를 듣자 원종태는 물맛이 갑자기 쓰다. 블링 H2O인데도 배가 살살 아프면서 설사가 나오려 한다.
“언젭니까? 그쪽 만나는 게.”
“모레 오전으로 정했습니다.”
“그쪽 배경은 좀 조사해봤습니까?”
“네, 부회장님. 원고인 노준태 뒤에 있는 엑소더스 펀드라는 투자 회사의 파트너인 심덕환이라는 인물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지난번 은하 테크론 사건 기억나십니까?”
“은하 테크론 회사 분할 말입니까? 외국계 액티비스트들이 반대해서 못 한 거?”
원종태는 피식 웃었다. 은하 그룹 바보들, 그런 것도 깔끔하게 처리를 못 하나.
“그때 은하 테크론에서 기술 유출범으로 찍었던 사람이랍니다.”
“그래요?”
“엑소더스 펀드는 만만찮은 상대입니다. 저희 변호사들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모레 오전 미팅에 빈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음··· 거 심덕환은 혼자 온답니까?”
“네. 그렇다고 합니다.”
“알았어요.”
원종태는 아까 마신 블링 H2O가 옛날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씁쓸했다.
***
“안녕하십니까? 심덕환이라고 합니다.”
원종태 자택에 심덕환이 왔다. 둘은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배석한 사람은 없다. 그게 심덕환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심덕환 파트너님.”
“반갑습니다. 부회장님.”
심덕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말투와 표정에서 미국 주류 사회 엘리트의 교양 있는 분위기가 풍긴다. 원종태는 살짝 빈정이 상했다.
‘니까짓 게 미국 산다고 뻐겨? 아무리 미국 살아도 한국계인 한, 너는 아랫것이고 나는 대한민국의 재벌 오너야. 종자가 다르다고’
원종태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턱 기대고 다리를 꼬고 눈은 아래로 내리 깔았다.
“심덕환 씨, 원고를 지원한다고 들었소. 이유가 뭐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판 따위 소용없다. 지금은 협상을 하러 왔으니까.
“난 미국 법은 잘 모르지만, 제 3자가 남의 소송에 그리 들어와서 지원해도 되는 건가?”
“원고인 노준태 씨가 대표로 있던 말레이시아의 ‘칼리만탄 에쿼티’를 제가 파트너로 있는 엑소더스 펀드가 인수했습니다. 인수와 동시에 칼리만탄 에쿼티가 갖고 있던 법적 권리와 의무는 자동으로 승계됐습니다. 문제가 되는 계약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제 3자 지원이 아니라 원고로서 소송 당사자입니다.”
이 놈 봐라?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어? 아직 재벌의 무서운 맛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원종태는 목소리를 조금 높인다.
“배상 금액이 너무 터무니없잖아요? 이 사건... 한국 검찰은 약식 기소로 그쳤고, 법원도 벌금만 부과한, 아주 경미한 사건이란 말이요. 근데 1억 불이 뭐요? 1억 불이.”
지금 원종태가 믿을 건 이거뿐이다. 한국 사법 당국의 결정.
심덕환이 받아친다.
“이 소송은 범죄에 벌을 주는 형사 소송이 아니라, 피해를 배상하는 민사 소송입니다. 귀사의 불법 행위가 공중과 사회에 끼친 영향이 심각한지 경미한지는 한국 사법 당국의 관심사이지 이번 소송과는 무관합니다. 민사 소송은 피해자가 배상을 주장하는 피해 액수가 적정하게 산정됐는지만을 따지면 되는 겁니다.”
“지금 그래서, 그 액수가 적정하다고 주장하는 거요?”
원종태가 소파 등받이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그건 캘리포니아 재판부가 따져볼 일이지, 부회장님과 제가 여기서 다툴 일은 아니지요.”
차분한 심덕환. 얼굴의 웃음끼도 그대로다.
원종태는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 옆에서 누가 거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으니 답답하다. 배석 없이 단 둘이 보자고 하길래 자신 있게 그러겠다고 했다.
상대도 변호사가 아니니 법률을 모르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일 거고, 원종태는 재벌 오너인데 상대는 조그마한 투자회사 파트너라 하니, 그런 작은 회사 파트너 정도야 재벌 오너인 자기한테 푹 숙이고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쟁이 양놈도 아니고 머리 검은 한국계라는데 뭐가 무섭나 했었다.
그런데 잘못짚은 거 같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대드는 게, 겉은 교양 있는 것 같지만, 완전 아래 위도 몰라보는 전형적인 꼴통 새끼 아닌가.
“끝까지 가보겠다 이거야? 1억 불이 뉘 집 애 이름인 줄 알아?”
원종태가 얼굴이 금세 벌게져서 소리를 질렀다. 불러놓고 재벌의 권위로 적당히 달래면 고개 숙이고 ‘예예’ 할 줄 알았는데 영 아닌 거다.
이때 심덕환이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상체를 쓱 앞으로 숙인다. 양 팔꿈치를 무릎에 붙이고 양손을 깍지를 낀 채 원종태를 빤히 쳐다본다.
‘어?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경계심에 몸을 뒤로 쓱 물리는 원종태.
심덕환이 입가에 썩소를 띄면서 천천히 입을 연다.
“1억 불이 애 이름 아닌 건 나도 알지. 원종태 씨”
“뭐··· 뭐?”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씨’라고 불려본 게 언제 있었나 싶다. 눈이 튀어나오려 한다.
“왜? 내가 반말해서 기분 나쁘나? 니가 먼저 반말하니까 나도 하는 거야. 반말 듣기 싫으면 니도 나한테 존대하든가. 아님 둘 다 까든가.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한국계지만 미국 사람이라 영어가 편한데 영어에는 알다시피 존대가 없거든. 그니까 난 서로 까는 게 더 편해.”
‘~씨’도 눈이 튀어나오려 하는데 ‘니’ 라니. 원종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럼 둘 다 같이 까는 걸로 가는 건가? 오케. 아까 1억 불을 배상금이라고 말하던데, 후후 그거 배상금 아냐. 왜 아니라고 하는지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원종태는 심덕환이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뇌에 박히지도 않았다.
“ND 케미칼은 말레이시아에 에마스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노준태 씨를 통해 채권 발행해서 땡긴 돈으로 주식 사고, 그때를 맞춰서 ND 케미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가 부양하고 에마스는 최고점에서 탁 팔고 나와서 돈 벌었지. 그게 총 1억 불이야.”
주가 조작해 번 돈이 1억 불이라는 걸 알고 있다니. 원종태는 깜짝 놀랐다.
“그 1억 불로 원종태 너는 샌프란시스코에 호텔 사고, 샌디에고 건너 코로나도 섬에는 별장도 하나 장만하고, 동쪽 끝 마이애미에는 콘도도 하나 샀지. 여기 샌 라몬에 있는 쉐브론의 리튬이온 배터리 부품 회사에 투자도 했고···.”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우리 엑소더스 펀드는 한국의 재벌 회사들이 꼬불친 자료를 모으고 공개하는 데는 남다른 실력이 있는 회사야. 지난번 은하 테크론 사건 기억하지?”
원종태는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먼저 반말로 달려드는 심덕환의 기에 눌렸고, 그다음은 심덕환의 말의 내용에 겁이 났다.
심덕환 말대로 엑소더스 펀드는 은하 그룹도 굴복시킨 적 있는 회사다. 은하 그룹한테 할 수 있었다면 ND한테 못 할 이유가 없잖은가.
“우리는 아직 소송 시작도 안 했어. 그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법원에서 심리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거 다 법원에 제출할 거야. 물론 그전에 모두 공개하고. 아참, 당신 회사 주가 확인하고 왔어? 요 며칠 난리 났어. 그제는 10% 빠지더니 어제는 와~ 30% 빠지던데. 한국은 그게 하한가라며?”
“뭐라고?”
“아직 소송 시작도 안 했는데 주가가 그 정도로 빠진다··· 그럼 소송 시작하면? 주가만 빠질까? 당신들 주가 조작했다는 거 만천하에 드러나면 여기 미국에서 ND 케미칼 투자하는 투자자들 가만히 있겠어? 아, FBI도 가만히 있을까? 당신 원종태. 한국에서는 아까 약식 기소에 뭐? 벌금형? 여기는 주가 조작 같은 금융 범죄는 종신형인 거 알지?”
“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원종태 니가 분위기 파악을 하기를 원하지. 1억 불이 배상 금액이 아니라는 거, 넌 그거부터 알아야 돼. 1억 불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우리 입막음 비용이야. 알겠어?”
심덕환의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원종태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제 존대를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