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한 번 혼을 내고 나면 더 충성스런 개가 되는 법이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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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철에게 술을 따르면서 ‘영광’이라니. 닭살이 돋았지만 이 정도야 감수해야지.
내 ‘닭살 멘트’의 효과는 바로 올라왔다. 박정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아이고. 최용구 검사님. 감사합니다. 진작에 이런 자리 가졌어야 했는데. 하하하.”
술이 몇 순배 돌았고, 셋 다 얼굴이 벌게졌을 때 김필중이 말했다.
“어이, 독고다이. 여기 정철이가 오늘 멀리 오산까지 가서 정의의 사도들을 만나고 왔어.”
박정철이 ‘정의의 사도’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조준호 기자 만나고 오셨다구요? 윤선경은요?”
내가 중간에 끊고 들어갔다.
“엇? 최 검사님. 딱 아시네요. 하하하.”
“어이 독고다이, 잘 들어. 며칠 안 있어서 ‘정의의 사도’들이 움직여줄 거야. 거기 맞춰서 김상덕 부회장이 우리 청에 출두해줄 거고. 그다음은 독고다이, 니가 맡아.”
“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정철이 박수를 막 쳐댄다.
“야~ 이런 걸 두고 척하면 삼천리라고 하는 거군요. 역시 김필중 검사장 - 최용구 검사 콤비는 알아줘야 합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 없네요. 최 검사님 이거··· 드십시오. 죽여줍니다.”
박정철이 방어회 위에 명란 젓을 조금 얹어서 내 앞에 살포시 놓아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 검사님. 우리 김필중 형님 민정 수석 만들어드려야죠. 그래야 우리 최 검사님도 쭉쭉 올라가시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국가에도 좋은 일이죠.”
난 뜨는 김에 한 술 정도가 아니라 몇 술이나 더 떠줬다.
“구··· 국가? 하하하, 맞습니다. 국가를 위하는 일이죠. 역시 우리 최 검사님. 최곱니다.”
박정철이 얹어준 방어회를 씹어 삼키고 난 뒤,
“지검장님, 전 그럼 김상덕 부회장 조사 준비를 해야겠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사실 밸이 꼬여서 더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간다고? 술 좀 했는데 일 할 수 있겠어?”
“소주 글라스로 석 잔 먹고도 안 자고 일했습니다.”
“하하하, 그랬지. 그래 나가봐.”
방을 나오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이 들렸다.
먼저 김필중이 하는 말.
“우리 정철이. 내가 느지막이 동생 하나 잘 뒀어. 자~ 이거 더 먹어.”
그걸 받아 박정철이 하는 말.
“어이구 우리 형님. 전 형님의 영원한 쫄로 살겠습니다. 이거 드십시오.”
후후후, 웃기는 인간들.
저러다가 돌아서면 바로 등 뒤에 칼을 꽂겠지.
난 택시를 잡아타고 수원지청으로 향했다.
유선진의 등에 꽂을 칼이나 갈아야겠다.
***
“안녕하세요. 전국의 정의를 사랑하시는 유튜버, 구독자 여러분. 윤선경 TV의 윤선경입니다. 오늘은 예고해드린 바와 같이, 요즘 잘 나가는 유튜브 채널이죠? 조준호의 ‘정의는 살아야 한다’와 합동 방송을 진행합니다. 자··· 제 옆에 조준호 기자 와 있습니다. 안녕~~ 하세요~~”
“어휴~ 누나, 너무 가볍게 하는 거 아냐? 안 어울려~”
“아, 요즘 유튜브에서는 이런 게 대세입니다~.”
“대세는 대센데 누나하고는 안 어울린다니까~~ 그냥 평소대로 해~~ 히히히.”
“자 우리가 이렇게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가 아니죠~~ 우리가 역사적인 합동 방송을 하게 된 이유가 있잖아요? 지금 시청자 여러분께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댓글창이 난리가 났어요. 호호호. 동접자가 벌써 2만입니다. 2만. 그럼 본격적으로 방송,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네~~ 또 은하 그룹입니다. 요즘 은하 그룹이 뉴스에 안 나오는 날이 없어요.”
“맞아, 맞아. 아~ 증말. 누나, 나 근데 정말 이 회사가 좋은 일 했다고 뉴스에 나오는 거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 맨날 안 좋은 거밖에 없어. 도대체 이 회사 뭐하는 회산지.”
“좋은 것도 있었죠. 얼마 전 은성표 회장이 경영권 세습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신문 방송들 엄청 칭찬하던데요?”
윤선경은 유튜브 방송이라도 게스트에게 존대를 하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는데, 조준호는 오른 다리를 왼쪽 무릎에 얹어 발을 털털 털고 오른팔은 의자 등받이에 척 얹었다.
“참네. 하여튼 언론들 은하 그룹 빨아주는 거 보면. 그게 어디 칭찬할 일이야? 세습 안 한다고 언제 그랬어? 은성표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 시장이 수용하는 방안이 나올 때까지 안 하겠다. 시장이 수용하는 방안? 그게 뭔데? 그거 지들이 정하기 나름이잖아? 이렇게 전제를 달고 안 한다고 말하는 거는 짱보고 있다가 나중에 한다는 말이야. 한두 번 속나? 지금 이 방송 보시는 정의를 사랑하시는 구독자 여러분. 그러실 리 없겠지만, 저~얼대, 절대 그런 말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알았죠? 저 재벌 빨아주는 신문 방송도 딱! 끊으시구요. 뉴스와 시사는 윤선경 TV, 조준호의 정의는 살아야 한다. 이 두 개만 보면 돼요~~”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자 그럼 빨리 본론 들어가야죠? 동접자 수가 지금 5만을 향해 가고 있어요~. 오늘 본론 뭡니까? 조준호 기자, 은하 그룹이 또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은하 테크론 기술 유출 사건, 정확하게 6개월 전 일인데, 은하 그룹이 은성표 아들 은병진한테 경영권 승계하려고 은하 테크론 분할을 계획했단 말이야. 근데 그 계획이 잘 진행되게 만든다는 조건으로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대통령의 아들, 첫짼가? 둘짼가?”
“둘째지 둘째. 이름은 백승환”
“맞아. 그 백승환한테 거액을 주기 위해 기술 유출을 조작한 거지. 돈 주는 거 하고 기술 유출 조작이 어떻게 연결되냐? 잘 들어. 복잡한 거 아니니까.”
조준호가 자세를 바로 잡고 데스크 앞으로 상체를 당겨 앉았다.
“우선 대통령 아들 백승환이 미국에 스타트업 회사를 하나 만들어. 뭐 조그마한 기술이 있는 회사이긴 해. 미국엔 그런 회사들 많으니까. 다음에 은하 테크론이 그 대통령 아들 회사하고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데, 계약 내용에 기술 유출 사건이 발생하면 배상한다고 딱···”
“아하, 그래 놓고 기술 유출인 것처럼 꾸며서 선량한 사람 인생 망쳐서 잡아넣고 돈은 대통령 아들한테 보내기로 한 거로군요?”
“뭐 선량한 사람은 아니고··· 그 사람도 보니까 별로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더라구.”
조준호는 심덕환에게 수원 검찰청 앞 길거리에서 까였던 게 기억 나 인상을 썼다.
“여하튼 그때 유출범으로 지목됐던 분이 무죄 석방됐고 흐지부지 덮였었는데요.”
“그게 흐지부지 덮였던 이유가 최고 권력층이 깊숙이 개입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조준호는 촉이 딱 왔었단 말이야. 그래서 쉬지 않고 탐장 취재를 해왔었다 이 말이지. 거 기억하실 분 계실 거야. 내가 이 사건 처음 났을 때 H-TV 나갔었잖아. 누나 기억나지?”
윤선경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줬다.
“그때 내가 하대석 앵커한테 이야기했잖아. 이거 분명히 최고위 층하고 연결된 게 틀림없다고. 그런데 하대석 그 양반도 이제 맛이 갔어.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그뿐이야? 이 놈의 나라 신문 방송 중에 한 놈도 내 말을 받아 쓰는 놈이 없더라고. 한심해.”
“자~ 근데 그때 하고 지금 하고 달라진 게 있죠? 뭔가요 그게”
“달라진 거 있지. 그때는 내 촉 밖에 없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물증이 있다는 거~ 이 모든 걸 증언해준 분이 계시다~~ 이 말씀. 자자 누나~ 더 말하지 말고 그거 빨리 틀어 빨리~”
“그래 그래. 지금 동접자 7만을 향해 가는데요··· 이 시점에서··· 자~~ 나갑니다~~”
오산에서 만나 녹음한 박정철의 목소리가 변조된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물론 박정철의 이름 부분에서는 ‘삐’ 처리가 됐다.
“다들 들으셨죠? 사건의 전모가 이렇다는 거죠. 이 녹취록에 나오는 김상덕이라는 사람은 지난번 기자 회견에서 검찰 출석해서 모든 걸 밝히겠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김상덕과 함께 일을 꾸민 청와대 쪽 사람은··· 누구?”
윤선경이 조준호를 향해 총을 쏘듯 검지 손가락을 튕기면서 물었다.
“유. 선. 진. 민정 수석.”
조준호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면서 삿대질을 했다.
“딩동댕~ 유선진 민정 수석도 검찰에 출석해서 죗값을 받으라! 오늘의 윤선경 TV, 조준호의 정의는 살아야 한다 합동 방송의 메인 주제입니다. 물론 유선진 민정 수석~~ 우리 방송을 보고 펄쩍 뛰겠죠?”
“하하, 그거야 뻔하지. 사실무근이다. 명예 훼손 소송하겠다. 길길이 날뛰겠지. 풉! 하지만 나 조준호가 누구야? 그런 거 저~언혀 안 무섭거든? 나는 소송과 재판이 일상인 사람이야. 소송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하하”
조준호가 다시 오른 다리는 왼쪽 무릎에 턱 얹고 오른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검찰 수사도 빨리 진행돼야겠죠? 우리 윤선경 TV는 이 녹음 파일을 검찰에 증거물로 제출할 용의가 만땅이라는 말씀도 드립니다~~ 와~ 동접자 8만!”
“클클클. 죽여주네. 10만도 가겠다.”
“민정 수석은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가 주요한 임무 중의 하나인데요. 그런 일을 맡은 민정 수석이 오히려 재벌 기업의 약점을 이용해서, 아니 재벌과 결탁해서 대통령 아들에게 돈을 주는 일을 기획했다? 이건 대통령한테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거든요? 조준호 기자. 유선진 수석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세요?”
“뭘 어떻게 봐? 누나도 참. 당연히···”
조준호가 등받이에 걸쳤던 오른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이거지. 이거.”
“맞아요. 더 말이 필요 없죠. 이거지, 이거.”
윤선경도 조준호를 따라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조준호 기자, 이제 우리 방송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힘차게 구호 한 번 외쳐야죠?”
둘이 같이 카메라를 빤히 보면서 오른손 주먹 쥐고 구호를 외쳤다.
“유. 선. 진. 아웃!”
***
김상덕이 검찰청에 출두했다.
포토라인에 섰는데 전국의 기자들이 다 모여든 것 같았다.
“범죄 사실을 갑자기 인정하신 이유가 뭡니까?”
“은성표 회장도 연관된 일입니까?”
“청와대와는 교감이 있었습니까?”
“유선진 민정 수석과 함께 꾸민 일이라는데 사실입니까?”
기자들이 김상덕을 둘러싸고 질문 공세와 사진 플래시로 난리가 났지만, 김상덕은 그 흔한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검찰청으로 들어왔다.
조사실에서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부회장님.”
“고생은요. 그런데 검사님. 지금 이거 다 녹음되고··· 저 바깥에서 다 보고 있는 건가요?”
난 씩 웃으면서 CC-TV와 마이크를 껐다. 김상덕도 같이 웃었다.
굳이 이런 거 켜고 있을 이유 없었다.
어차피 결론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하는 조사, 김필중도 송대기도 조사실 바깥에서 내 조사를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편하게 하세요. 부회장님.”
“먼저 최용구 검사님, 감사합니다. 회장님께 말씀 다 들었습니다. 검사님께서 회장님께 제 이야기를 해주셨다고.”
아무리 충성스런 개라도 주인이 싫어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주인이 아끼는 신발을 물어뜯는다든가, 부엌에 오줌을 싼다든가, 쓰레기통을 뒤진다든가.
주인이 혼을 내면 구석에 가서 쪼그리고 있다가 다음부터는 더 충성스런 개가 된다.
“회장님께 도움 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검사님.”
조사고 뭐고 더 할 것도 없었다.
은성표의 충성스런 개, 김상덕.
난 김상덕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다가 조사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