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까짓 거 술 한 잔 못 따르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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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의 한 오래된 아파트 단지.
지하철 역에서 나온 한 50대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로 향한다.
단지로 들어가 남자가 향한 곳은 지하 주차장.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 앱에 적어둔 위치를 한 번 확인한다.
‘섹션 C 28번’
종종걸음으로 뛰어내려 가니, 약속한 위치에 은색 소나타 승용차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소나타를 발견하자 남자는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서 오세요.”
운전석에 앉아 남자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는 여자.
남자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 자신의 소나타 승용차를 찾아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네. 가시죠.”
남자는 짧게 대꾸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둘이 탄 소나타 승용차는 아파트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소나타는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오산까지 내려가 이마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둘은 수원에서 오산까지 오는 동안 한 마디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끼익~’
여자가 주차 브레이크를 걸고 조수석에 앉은 50대 남성에게 이제야 말을 건다.
“저 처음 뵙죠? 윤선경이라고 합니다.”
윤선경.
최용구에 의해 구속돼 재판받고 있는, 한때 차세대 유력 주자였던 정수명의 언론 홍보 담당 보좌관이었던 사람.
“반갑습니다. 박정철이라고 합니다.”
“일이 일이니만큼... 이렇게 복잡하고 구차하게 모시게 됐네요. 보안이 중요하니까요.”
윤선경이 생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웃으니 눈이 보이지 않는다. 웃어도 저 정돈데 만약 인상을 쓰면 얼마나 보기 싫을까··· 박정철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한 명이 더 오기로 했으··· 아! 저기 오네요.”
윤선경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차창 너머로 가리킨 남자는 조준호다.
하얀색 라우드 티 위에 검정 가죽 재킷을 입었다. 앞머리가 길어서 계속 흘러내렸는데, 오른손으로 머리를 연신 뒤로 젖히면서 윤선경과 박정철이 앉아있는 차로 걸어왔다.
“아이고. 시간 딱 맞춰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박정철 전무님? 전 조준호라고 합니다.”
조준호가 뒷좌석 문을 열고 타면서 말했다.
“이거 좀 좋은 자리에서 맛있는 식사나 하면서 모셔야 하는 건데 보안이 보안인 만큼 이렇게 됐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무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박정철이 갤갤거리는 가래 끓는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처럼 정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이 정도 불편함은 다 감수하고 살아야죠. 전 뭐 이런 건 저의 운명이다 생각합니다. 나중에 볕 들 날이 반드시 올 거니까요. 안 그래? 누나?”
조준호가 운전석에 앉은 윤선경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그럼. 볕 들 날 오지. 여기 우리 박정철 전무님 같이 정의로운 분이 계시는데 볕만 들겠어? 화창한 봄날이 오지. 자, 그럼 전무님 시작하시죠.”
윤선경이 스마트폰에서 녹음 앱을 켰다.
“전무님, 녹음해도 되겠죠?”
“네, 상관없습니다.”
“저 조준호도 켜겠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백업은 항상 필요한 법이죠.”
“자~ 제보하실 내용은 뭔가요?”
윤선경이 물었다.
박정철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흠흠, 청와대 민정 수석 유선진과 은하 그룹에 얽힌 내용입니다.”
박정철은 윤선경을 흘끗 본다.
“근데 제 목소리가 그냥 나가는 건 아니죠?”
“음성 변조 처리할 겁니다. 걱정 마시고요. 긴장도 좀 푸시고.”
“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하 테크론 사건 말입니다. 사실 그거 은하 그룹의 총수 일가가 회사 경영권을 은병진 부회장한테 승계하기 위해서 만든 사건입니다. 은하 그룹은 정부 도움이 필요했··· 구체적으로는 국민연금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도움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돈 3천만 불을 합법을 위장해서 미국에 있는 대통령 둘째 아들 백승환에게 보내려고 했습니다.”
“나 그럴 줄 알았어. 개~ 새끼들”
조준호가 끼어드는 바람에 박정철은 멈칫했다.
“그거 누가 기획한 거죠? 그걸 지금 폭로하시려는 거 맞죠?”
윤선경이 말했다.
“네, 그걸 처음부터 지시하고 주도한 인물은 청와대 민정 수석 유선진이었습니다.”
“이것도 나 그럴 줄 알았어. 유선진 그 검사 새끼. 하여튼 검찰 놈들이 다 해처먹어.”
조준호가 다시 끼어들었고, 윤선경이 질문을 이어갔다.
“좋아요. 청와대는 민정 수석 유선진이었고, 손바닥도 맞닿아야 소리가 나는 거잖아요? 은하 그룹 쪽에서는 누가 유선진 민정 수석의 카운터 파트였습니까?”
“은성표 회장의 가신인 김상덕 부회장입니다. 처음부터 유선진 민정 수석과 함께 기획했었는데 일이 틀어지자, 실무를 맡았던 저에게 모든 걸 뒤집어 씌웠습니다.”
“청와대 쪽은 어땠나요? 거기도 실무자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박정철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그쪽도 비서관 한 명이 경고를 먹고 퇴직 조치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니까 박정철 님은... 아 성함은 삐~ 처리할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실무자로서 반대도 많이 했습니다. 이건 정의롭지 못하다. 권력과 금력이 결탁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회사에도 안 좋다··· 그랬는데··· 사실 저 같은 봉급쟁이가 위에서 시키는데 어떻게 안 할 수 있었겠어요? 목구멍이 포도청··· 그런데 결국 저만 이렇게 됐습니다.”
“그걸 처음부터 기획하고 추진했던 자들은 다 잘 먹고 잘 살구요. 그죠?”
“네.”
“이렇다니까. 이놈의 세상이.”
조준호가 이를 갈면서 차 문짝을 주먹으로 탕 쳤다.
“박정철 님, 그래서 이렇게 제보하시기로 결심하신 거군요?”
윤선경이 그윽한 눈빛에 웃음을 담아서 박정철을 바라봤다.
박정철은 흠칫했다.
윤선경이 분명 웃고 있는 거 같은데 왠지 무서웠다. 눈빛을 피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저··· 저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봉급쟁이긴 하지만,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하나 억울한 것도 억울한 거지만, 우리 사회에 권력과 금력의 더러운 결탁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박정철이 윤선경과 조준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리고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렸다.
“정수명 부총리 님 같은 분은 감방에서 고생하고 계시고, 유선진 같은 자들은 아직 권력을 쥐고 흔들고··· 이건 아니죠.”
“아! 역시 정수명 장관님 지지자셨군요. 어쩐지 정의와 이 사회를 위하시는 마음이 남다르다 싶더라니. 호호호”
윤선경은 활짝 웃으면서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고,
“역시 나 그럴 줄 알았어. 박정철 전무님 우리 하이 파이브!”
조준호는 거의 앞좌석까지 상체를 들이밀고 박정철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잘하셨습니다. 박정철 님은 재벌과 권력의 결탁을 폭로한 의인이십니다.”
“의인이지 의인. 이런 형들 아직 많다니까. 이 세상 아직 살만해! 박정철 전무님. 나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아··· 네··· 허허허”
“고마워요~. 박 전무님.”
윤선경이 박정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웬 여자의 손이 이리 나무토막 같을까.
박정철은 얼른 손을 뺐다.
“전 그럼 이제 그만···”
“네, 그러세요. 그런데 가시는 길은 아세요? 저희들이 태워드리면 좋은데··· 혹시나 해서.”
“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 가는 방법 잘 압니다. 오산에는 예전 제가 다니던 회사 물류센터가 있어서요.”
박정철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웬 여자 손이...”
박정철은 아까 윤선경에게 잡혔던 손을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나무토막에 끼었다 빠진 듯한 느낌... 빨리 지우고 싶었다.
이마트에서 나와 큰길로 나왔을 때, 박정철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신호가 한참 간 뒤에 받았다.
— ‘어, 정철이. 일은 잘 됐나? 어디야?’
“오산입니다.”
— ‘오산? 거기까지 데려갔어? 쉬키들...’
“네, 멀리 오긴 했지만, 계획했던 대로 잘 이야기했습니다.”
— ‘잘했어. 빨리 올라와. 내 정철이 좋아하는 사케 한 잔 살 테니.’
“사케요? 와~ 좋습니다. 서울 도착하면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박정철은 씩 웃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김필중 민정 수석이라 불릴 날이 얼마 안 남았군. 후후후”
박정철은 오산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
— ‘독고다이 자리에 있나?’
김필중이 내 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 ‘네, 지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지. 지금 청 앞으로 나와. 나도 내려갈 테니.’
김필중과 내가 같이 간 곳은 역삼동에 있는 고급 일식집.
영문을 몰랐지만 그냥 따라 들어갔다.
밑져 봐야 본전. 오랜만에 맛있는 스시나 배불리 먹고 나오면 되겠지.
김필중과 나는 일식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아 갔다.
방문이 열리고 들어서려는데,
“어이고 형님, 이제 오십니까? 제가 먼저 와서··· 엇?”
박정철이었다.
나도 놀랐고 박정철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난 박정철이 김필중을 보고 ‘형님’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라도 더 놀랐고, 박정철은 내가 올 거라는 걸 예상을 못해서 저러는 것이겠지.
“뭘 그리들 놀라나? 둘이 첨 보나?”
김필중이 둘을 번갈아보면서 씩 웃고는, 박정철 맞은편에 턱 앉았다.
“뭐해? 이리 와, 앉아.”
“네, 지검장님”
김필중 옆 자리에 앉으면서 머리를 굴려보니 대충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은성표 회장,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셨네.’
잠시 후 음식과 술이 들어왔는데,
“와~ 형님, 이거 어떻게 다 먹습니까? 허허허.”
박정철이 아까 날 봤을 때보다 더 눈을 크게 뜨면서 너스레를 떨어댔다.
“정철이, 오산까지 갔다 오느라고 수고했어. 자~ 한 잔 받아. 이거 좋은 거야.”
김필중이 박정철에게 사케를 따르면서 말했다.
“엇! 형님··· 이건···.”
김필중이 한 손으로 들고 따르는 사케 병을 보고 박정철이 깜짝 놀란다.
“하하, 역시 이거 아는구먼.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데.”
김필중이 술병을 박정철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알다 마다요. 쿠쿠리히메(菊理媛). 일본 황실에서 국빈 대접할 때 쓴다는···.”
박정철은 김필중에게 술을 다 따른 뒤에도 술병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일본어가 잔뜩 쓰인 라벨을 들여다본다.
“맞아. 오늘은 정철이가 나한테는 턱별한 손님인 셈이지.”
“어이고, 고맙습니다. 형님.”
형-동생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앉았으니 둘 사이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눈에 훤하게 그려졌다.
은성표에게 내가 줬던 ‘덤’이 유선진과 김필중의 좋지 않은 관계에 대한 정보였고, 그걸 잘 알아들은 은성표가 박정철에게 ‘특명’을 내렸을 것이고, 이후 둘은 한두 번 만나자마자 박정철이 호형호제를 제안했을 테고, 동생 생겨 나쁠 거 없는 김필중이 승낙했을 테고.
“자, 독고다이. 니도 한 잔 해. 아니다. 여기 박정철 전무한테 먼저 한 잔 따라.”
박정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까짓 거 술 한 잔 못 따르랴.
난 사케 병을 두 손으로 들고 정중히 박정철에게 술을 따랐다.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게 돼서 영광입니다. 전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