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내 친구 재벌 회장 열일하시는구만. 웰던이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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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표를 뒤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은 박정철은 느낌이 싸했다.
회장이 최용구와 너무 오래 있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10분이면 떡을 칠 거라 생각했었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있다가 나왔다.
도대체 회장님이 최용구 그 독고다이 새끼하고 무슨 이야기를 이리 오랫동안 나눈 걸까?
게다가 차에 타기 전에 회장님이 베란다 위의 최용구와 주고받은 미소는 뭐지?
“회장님, 댁으로 모실까요?”
“아냐. 상덕이, 상덕이에게 가.”
박정철은 깜짝 놀랐다. 귀를 의심했다. 지금 김상덕에게 가자는 건가?
룸미러로 은성표를 보면서 물었다.
“사··· 상덕이라면···”
“상덕이 몰라? 김상덕, 김상덕 부회장 말이야. 벌써 이름도 잊었어?”
은성표 역시 룸미러에 비친 박정철의 눈을 보면서 쏘아붙였다.
“아,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불길한 직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다.
박정철은 자신에게 재떨이를 던졌던 김상덕을 다시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손이 운전을 하는 건지 발이 제대로 움직이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박정철, 자네 말이야.”
은성표가 뒷좌석에서 구두를 벗은 발로 박정철의 운전석 시트를 툭 차면서 말했다.
“네, 회장님”
“김필중하고 친하지? 수원지검장 말이야.”
“네?”
김필중이면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박박 기어야 했던 악연 중의 악연이다.
“대답이 그게 뭐야? 친해, 안 친해? 자네 우리 그룹의 검찰 담당이라며?”
“그게 저··· 김필중 검사장 하고는 지난번 기술 유출 사건 때 충돌을 좀 심하게 한 적이 있어서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닌···”
“그럼 좋게 만들어.”
“네?”
“뭐가 자꾸 네네야? 만들라면 만드는 거지.”
“······”
“자네한테 시킬 일이 있어. 중요한 일이야.”
“아, 그렇습니까? 회장님 그런데 저··· 어떤 일인지···”
“그건 상덕이 만나서 이야기할 거야. 자네 마지막 목숨줄이 걸린 일이라는 거 정도만 알아둬. 잘해야 할 거야.”
재떨이 던졌던 김상덕을 만나러 가는 것만 해도 손과 발이 벌벌 떨릴 지경인데,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던 김필중하고 친하게 지내라는 회장 지시까지. 그것도 마지막 목숨줄이 걸린 일이라니.
설상가상도 이 정도면 눈사태다.
운전을 하는 박정철의 등골에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
“아니, 이거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은 다들 왜 이러는 겁니까?”
은하 테크론 압수 수색 서류들을 사건별로 분류 정리하던 정화용이 투덜거렸다.
“어떤 것들인데요?”
일을 돕던 박수미가 정화용에게 바짝 다가서면서 물었다.
정화용은 이쁘고 일 잘하는 박수미가 이렇게 다가서면서 뭘 물어올 때가 좋다.
선배로서 아는 척할 수 있어서 좋고, 약간의 정의감을 과시할 수 있어서 더 좋고. 박수미한테서 나는 향긋한 향수 냄새는 덤이고.
“아니, 박수미 씨, 이것 보세요. 은하 테크론이면 전자 회사 아닙니까? 핸드폰, 테레비 뭐 이런 거 만드는···.”
“네, 그런데요?”
“아니, 핸드폰 만드는 회사가 인도네시아 팜 오일 농장에 투자는 왜 하는 겁니까? 이거 이거 냄새가 아주 심하게 안 납니까?”
“어머 어머, 정말 그러네요. 저는 아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었는데··· 역시 정 계장님은 이런 걸 콕콕 찝어내시는 걸 보면··· 저 이런 거 좀 배우고 싶어요.”
정화용의 얼굴을 빤히 보고 말하면서 생긋 웃는 박수미를 보는 순간 정화용은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렸다.
“하하하, 뭐··· 검찰청 수사 계장 짬밥이 그냥 먹는 짬밥이 아니니깐 뭐··· 하하하”
이놈의 중년 남성의 가슴이란, 날이 갈수록 얄팍해지는 것 같다. 젊은 여자의 이런 생긋 웃는 미소 하나에도 이렇게 쿵쾅거리다니.
‘조심해야 한다. 직장 내 성희롱 이런 거 다 이런 것에서부터 출발한댔어. 마음을 다잡자.’
정화용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흠흠··· 박수미 씨, 저기 저쪽에 있는··· 내가 파란 딱지 붙여 놓은 서류 좀 갖고 와 보세요.”
정화용은 벌떡 일어나 다른 서류 더미로 갔다.
“네~!”
용수철 튀기듯 발딱 일어나 정화용이 지시한 서류철을 들고 오는 박수미.
또 이렇게 털털하게 일 잘하는 박수미를 보니 아까까지 쿵쾅거리던 가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정화용은 이런 자신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저씨 개저씨 되는 거 순간이야··· 그 반대도 순간이고.’
“검사님···”
“네. 계장님”
“이거 사건들 쭉 보니까요··· 해외에 법인이니 페이퍼 컴퍼니니 만들어서 투자를 빙자해서 돈 빼돌리는 거··· 은하 그룹만 이런 짓 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럼요?”
“ND 그룹도 엄청 하지 않겠습니까? ND 그룹은 석유에 화학에 자원 개발을 하니까 전자 산업이 주력인 은하 그룹보다 훨씬 이런 걸 하기가···”
내가 씩 웃었는데, 그걸 보더니 정화용이 정색을 하며 말을 멈췄다.
ND 그룹에는 ‘그분’이 계신다는 걸 내 웃음을 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은 거다.
검찰 내에서 함부로 거론해서는 안 되는 ‘그분’.
ND 그룹의 법무팀장 백승철 부사장. 대통령의 첫째 아들.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는데 박수미가 생긋 웃으면서 정화용 앞에 끼어들었다.
“정 계장님, 근데 ND 그룹은 왜 ND예요?”
박수미는 눈치도 빠르다. 정화용은 얼른 박수미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주제를 바꿨다.
“어~ 그거? ND그룹의 옛날 이름이 구룡(九龍) 그룹이었거든. 용 아홉 마리.”
“용이요? 정말요? 그럼 ND가 나인 드래곤의 약자예요?”
“그렇지. 한 20년 됐나? 이름을 영문으로 바꾼 지. 글로벌하게 한다고.”
“어머, 설마 했었는데 정말이었군요. 으휴~~ 촌시러워라. 호호호.”
박수미는 웃는 것도 호탕하다. 손으로 입을 가린다든가 하는 거 없다.
정화용은 몸을 박수미 쪽으로 돌리고 썰을 본격적으로 풀어대기 시작한다.
“ND 그룹 창업주가 원영철이잖아. 70도 안 돼서 죽었지. 지금 회장 원종우의 아버지지. 원영철 그 양반이 젊었을 때 인천에서 조그마한 오파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을 꿨대. 아홉 마리 용이 승천을 했다는 거야. 그래서 회사 이름을 구룡 상회로 바꿨대.”
“어머나, 정말 재벌들이 그렇게 회사 이름을 짓는구나.”
박수미가 두 손을 한데 모으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정화용은 박수미의 리액션에 고무돼 더 신이 났다.
“그런데 말이야, 회사 이름을 구룡 상회로 바꾼 뒤에 정말 거짓말처럼 돈빨이 붙더라는 거야. 남들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데 원영철 회장은 앞으로 넘어져도 돈밭에서 굴렀다는 거 아냐. 건드리는 족족 따블 따따블이 되고, 손을 떼면 전부 쪽박이더라는 거야.”
“어머~ 좋았겠다. 나도 그런 꿈 한 번 꿔봤으면. 아홉 마리까지도 필요 없고 한 마리라도.”
“용까지는 아니라도 좋아. 난 구렁이라도 한 마리 나왔으면 좋겠다. 여하튼 그래서 아직도 원종우 회장 원종태 부회장 형제는 구룡 터널 옆에 산다는 거 아냐. 절대 안 떠난대. 그 동네를. 동네 이름 좋다고.”
“구룡 터널? 내곡동요?”
“그렇지. 사는 동네만 그런 게 아냐. ND 그룹은 투자를 할 때도 있잖아? 투자 금액이 항상 9로 끝나야 돼. 이번에 거 저~기 브라질에 철광석 회사 하나 인수했는데 비딩 한 금액이 얼마였는지 알아?”
“얼마였는데요?”
“9억 9천9백9십9만 9천9백9십9달러.”
“엥?”
“10억 불에서 딱 1달러 뺀 거지. 9자로 만들려고.”
“정말요?”
“응, 맞아. 숫자를 그렇게 안 만들어가면 원종우 원종태 오너 형제가 승인을 안 해준대.”
“하하하, 정말 그렇답니까?”
웃음이 나온 곳은 나였다. 정화용은 얼른 몸을 나 쪽으로 돌렸다. 사실 아까부터 나한테서 리액션이 나오길 기다렸던 것 같다.
“재밌으시죠? 검사님. 나중에 혹시 그쪽 일이 생겨서 구형 때리실 때도 9년으로 하셔야 될 거예요. 99년으로 하시든가. 아마 그러면 구형받고도 더 좋아할지도 몰라요. 하하하.”
“하하, 그렇겠군요. 참고하죠.”
둘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박수미가 스마트폰 화면에 뜬 뉴스 공지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어머, 이게 뭐야? 검사님, 계장님. 뉴스 좀 보세요. 속보예요.”
속보?
정화용도 나도 얼른 라이브 뉴스를 보려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 ‘은하 그룹 경영권 세습 포기 선언. 은성표 회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 예정’
“엥? 경영권 세습을 포기?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검사님?”
정화용이 호들갑을 떨다 못해 내 자리로 달려왔다.
“검사님. 이거··· 검사님이 은병진을 구속해버렸더니 쫄아서 그러는 걸까요?”
“글쎄요.”
“여하튼 이건 사건입니다, 사건. 역사적 사건입니다. 와~”
정화용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더니,
“어? 나온다. 나온다. 은성표···.”
정화용 말대로 은성표가 직접 기자 회견장에 나왔고, 옆에는 김상덕이 따라 나온다.
“어? 김상덕 부회장이 눈이 왜 저렇지? 안경을 원래 썼었나요? 검사님?”
“풉!”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김상덕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다시 자신을 거두어준 은성표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얼마나 울었으면 저렇게 눈이 퉁퉁 부었을까.
은성표가 연설을 시작했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졌고 은성표는 잠시 휴지를 뒀다.
— ‘저희 은하 그룹이 국민 여러분께 드린 실망과 분노에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은성표는 연단에서 내려와 90도로 인사를 했다.
다시 연단으로 돌아가 연설을 이어갔다.
— ‘저희 은하 그룹은 그동안 검찰 수사에서 밝혀졌듯이, 저의 아들이자 부회장인 은병진이 회삿돈을 횡령하고 사적으로 유용하는 등 주식회사의 대주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버젓이 저질렀습니다. 그룹 회장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애비로서 통탄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립니다.’
은성표는 또 연단에서 내려와 90도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 ‘저의 사죄만으로 국민 여러분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 은성표는 책임을 지고 그룹의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며 지금 구속돼 있는 제 아들 은병진도 부회장직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오~ 그만 둔대. 그만둬.”
정화용이 마치 국대 축구 경기를 보듯 옆에 앉은 박수미에게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했다. 의외로 박수미는 잠잠.
— ‘아울러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납득하시고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올 때까지 어떠한 경영권 승계 시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은하 그룹이 반대로 국민 여러분께 실망만 안겨드린 점, 그룹의 수장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피~ 저건 아니다. 죄책감에 못 잤겠어? 아들 걱정에 못 잤겠지. 그치? 박수미 씨?”
정화용이 다시 말을 걸었는데, 박수미는 여전히 조용~.
— ‘부디 제가 말씀드린 이 조치로 국민 여러분의 실망과 분노가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기를 바라오며, 이에 그치지 않고 저희 은하 그룹은 선진적인 기업 지배 구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국민 여러분 모두에게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은성표가 또 연단에서 내려와 90도 인사를 하고는 연단 뒤의 문으로 나갔다.
“우와~ 도대체 저 노인네가 90도 인사를 몇 번을 한 거야? 세 번··· 세 번 했죠?”
“잠깐만요, 정 계장님. 아직 안 끝났나 봐요.”
박수미가 정화용의 소매자락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은성표가 내려간 연단에는 김상덕이 올라와 섰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은하 그룹의 비서실 실장을 맡고 있는 김상덕 부회장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렸던 은하 테크론 기술 유출 사건의 책임을 지고 부회장을 사퇴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른 시일 안에 검찰에 출석해 사건의 전모를 상세히 밝히고 벌 받을 게 있다면 받도록 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정화용 고개가 스윽 내게로 돌았다.
“거··· 검사님. 이게 무슨···”
“김상덕 부회장 조사할 일이 생기겠네요. 준비하시죠.”
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천정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내 친구 은성표 회장, 열일 하시는구만. 웰던(Well Done)입니다.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