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적의 적은 친구로 만들어야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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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 관저.
“하하, 황상철 비서실장, 어서 와. 반갑네, 반가워.”
백영기가 과장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황상철을 맞았다.
웃음이 과장된 건 못 미더운 마음이 반가움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황상철에게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는데, 엄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완전히 가렸다. 손 끝만 잡으라는 뜻이다.
“네, 각하.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황상철이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면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어 백영기의 손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급하게 놓았다.
“자자, 새 식구가 오니 청와대 분위기도 확 살아나는 것 같구만. 더 젊어졌어. 하하. 다들 여기 앉지. 민정, 민정도 거기 앉아.”
유선진이 백영기의 오른쪽 소파에, 황상철은 유선진 맞은편에 앉았다.
백영기가 당연히 먼저 앉았고, 황상철은 유선진이 앉을 때까지 빳빳하게 서서 기다린다.
백영기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하여튼 검찰 새끼들이란··· 조폭이랑 뭐가 달라?’
유선진은 황상철의 검찰 7년 선배.
황상철이 검사 생활을 시작한 풋풋했던 30년 전부터 선배로서 군기를 잡아왔던 사람이다.
검사 동일체의 원칙과 철저한 상명하복.
대한민국 검사라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을 이 두 원칙을 30년 넘게 받들면서 살아온 황상철에게 백영기를 보고 90도 인사하는 것이 조건반사라면, 유선진한테 바짝 엎드리는 것은 무조건 반사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정이 사람을 잘 골랐어. 내가 보니까 내 퇴임할 때까지 도승지로 딱 느낌이 와”
백영기의 이 말을 듣고 유선진이 황상철을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 황상철은 고개를 조아렸는데 백영기에게 조아리는 건지 유선진에게 조아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황상철은 일사불란한 국정 장악을 위해 유선진 혼자서 청와대를 확 틀어쥐고 가라는 의미로 선택한 카드다.
말이 비서실장이지 총무반장 정도랄까.
“그래 우리 황 실장은 공안 쪽에서 잔뼈가 굵은 그쪽 통이라고 하더구만.”
“네, 그렇습니다. 각하.”
“민정이랑 케미가 잘 맞겠어.”
이 말을 하면서 유선진을 향해 눈을 찡긋 하는 백영기. 이제 여기 청와대는 유선진의 판이 됐다는 걸 확인해주는 백영기의 눈짓.
“민정 수석과 보조를 잘 맞춰 각하의 집권 후반기 흐트러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내 듣기로 우리 황 실장이 장인이···”
백영기가 이 말을 하면서 유선진을 쳐다봤다. 유선진이 바로 의미를 캐치했다.
“아이에스 디벨럽먼트라고, 중견 부동산 개발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분입니다.”
“아~ 그래? 성함이···.”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이번엔 황상철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정 씨에 인 자 수 자, 정인수 회장입니다.”
“정인수. 정인수 회장? 어어어 나 알지 알아. 이번에 거··· 서해 해상도시 프로젝트 기공식에서 봤었지. 조순건 인천 시장하고는 막역한 사이인 거 같던데~?”
백영기가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말꼬리를 일부러 더 슬쩍 올렸다. 작은 눈을 더 작게 뜨기도 했다.
황상철은 백영기의 금테 안경 너머 작은 눈에 한 번 더 놀라고, 마지막 문장에서 일부러 끌어올려진 말투에 가슴이 철렁했다.
‘니 장인 관리 잘해.’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천 시장 조순건은 정수명이 제거된 후, 여권의 차기 주자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황상철의 장인 정인수는 조순건이 인천의 구의회 의원을 할 때부터 후원을 하며 공을 들여왔고, 조순건이 인천 시장이 되고 대선 주자로까지 부상하면서 그동안 들였던 공이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별 볼일 없이 지방 형사부만 전전하던 평검사 황상철이 급부상해 검찰 공안부의 핵심인 인천 지검장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장인 정인수와 인천 시장 조순건의 콤비네이션 덕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공안은 인천의 황상철. 특수는 수원의 김필중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은 김필중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기도 했고.
백영기 정권 후반기 조순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당연히 조순건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데, 조순건이 세 과시를 위해 기획한 행사가 백영기가 말한 ‘서해 해상도시 프로젝트 기공식’이었다.
황상철의 장인 정인수는 그 행사에서 당연히 조순건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백영기가 ‘막역한 사이’라고 빈정대듯 말한 건 그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유선진이 황상철을 보고 눈짓을 했다.
그걸 보고 황상철이 상체를 더 꼿꼿하게 세우고 말했다.
“아, 각하, 장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사위라는 사적인 관계를 떠나, 비서실장으로서 더욱더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각하의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거나 폐를 끼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말해놓고 유선진의 눈치를 다시 살피는 황상철. 완전히 고양이 앞에 쥐다.
“아, 아냐 아냐.”
백영기가 손을 과장되게 저었다.
“내가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고··· 허허허. 보기 좋더라는 이야기를 한 거야. 오해는 마시게. 황 실장. 허허허.”
이 말을 하면서 백영기가 다시 오른쪽에 앉은 유선진을 스윽 쳐다봤다.
유선진이 백영기를 보고 살짝 웃어준다. 그리고는 앞에 앉은 황상철에게 레이저를 쏘았다.
유선진의 레이저를 맞고 다시 상체를 꼿꼿이 세우는 황상철.
유선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제 완전히 내 세상이 왔다.’
***
“최용구 검사··· 평생을 거래만 하고 살아온 나보다 거래를 더 잘하는구먼. 허허허”
은성표의 표정이 밝았다.
이제 쓸 일이 없고 골치만 썩힐 대통령의 계좌는 넘겨주고, 경영권 세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계좌는 지켰으니 이 거래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거래를 해서 저도 기쁩니다. 회장님.”
내 표정도 밝았다.
백영기와 ND 그룹이 연결된 계좌는 내가 죽기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고, 은하 그룹과 연결된 계좌는 지금 받았으니, 이제 백영기의 해외 비자금 계좌는 모두 내 손에 있다.
이제 이걸 깠을 때 장애가 될 김필중 같은 호위 무사와 유선진 같은 제갈량, ND 그룹 같은 파트너를 백영기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
은하 그룹은 백영기의 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은하와 쌍벽을 이루는 ND 그룹은 여전히 백영기의 강력한 친구다.
적과 친구.
적의 친구라 해서 반드시 내 적이 돼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적의 적은 반드시 내 친구가 되는 게 낫다.
내가 백영기의 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은성표에게 나는 ‘적의 친구’ 일뿐이니, 은성표에게 나는 반드시 적 돼야 할 이유가 없다. 은성표는 그걸 안다.
“최 검사. 이런 거래가 앞으로도 계속 있었으면 좋겠네.”
나의 적 백영기의 적인 은성표는 반드시 ‘내 친구’가 돼야 한다. 나도 그걸 안다.
“저도 회장님과 좋은 거래를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친구가 될 ‘적의 적’ 은성표에게 선물 하나를 주고 싶었다. 물론 공짜 선물은 아니고, 내게도 이득이 되는 선물로.
“회장님, 좋은 거래는 항상 덤이 붙어야 더 좋은 거래가 되는 법 아닌가요?”
“덤? 내가 최 검사에게 아직 더 줄 게 남아있다는 말인가?”
은성표가 언젠가부터 ‘자네’라고 부르지 않고 ‘최 검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은성표의 제안을 거절하고부터다.
“아뇨. 반대입니다. 덤은 제가 드릴 겁니다. 회장님이 제 집에까지 와주셨으니까요.”
“오~ 그래? 나한테 주려는 덤이 뭔가?”
“오민하 실장을 라스베가스 부동산으로 공격하는 것.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겁니까?”
은성표의 미간이 갑자기 깊은 내 천(川) 자를 그리며 찌푸려졌다.
“김상덕 부회장을 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은하 그룹에서 청와대 오민하 비서실장을 공격하다가 생긴 일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은성표의 시선이 바닥을 향한 채로 돌아오지 않는다. 김상덕이 아직 은성표의 가슴속에 깊숙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야. 난 오민하를 잘 몰라. 그 인간 국정원 출신이잖나? 음지에서만 쭉 일하다가 백영기가 양지로 끌어낸 인간이잖나.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럼 누가···”
“박정철이, 아까 나하고 같이 왔던 그 친구. 그놈이야. 박정철 그놈이 수집한 정보로 오민하를 공격하려고 했지. 말 잘 듣는 기자놈들하고 유튜버들한테 먹일 거 먹이고 실행을 하려고 했는데, 막판에 검찰이 박정철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안 거야.”
난 속으로 씩 웃음이 나왔다. ‘그거 내가 한 겁니다. 회장님’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박정철이 그 못난 놈은 오민하 것만 들고 있었는데, 검찰은 김상덕과 오민하 것을 전부 다 들고 있었다더군. 청와대는 오민하를 잽싸게 짤랐고. 그게 무슨 뜻이었겠나? 우린 오민하를 짤랐다. 너네도 김상덕을 짤라라. 그냥 두면 은하 그룹을 공격하겠다. 이런 뜻 아니었겠나? 때문에 김상덕이도 찍혀나갈 수밖에 없었지.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상덕이한테 받은 배신감이 크기도 했고. 어떻게 그놈이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은성표는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주먹을 꽉 쥔다.
“그래서 김상덕 부회장을 내치시고 박정철을 새로 들이신 겁니까?”
슬쩍 은성표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물었다.
“아니네. 아직 완전히 들인 건 아냐. 그 자식은 아직 아니야.”
“그러시군요.”
“아니 최 검사. 나한테 덤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어떻게 덤인가?”
“은하 그룹이 대통령을 공격했는데 그게 타겟 설정도 틀렸고, 결과도 손해가 훨씬 큰 것이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타겟이 틀렸다?”
“대통령의 은하 그룹 공격하고 오민하 실장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걸 주도한 인물은 다른 사람이었고 지금도 건재합니다.”
“뭐? 누군가 그게?”
난 대답 대신 씩 웃어줬다. 은성표 정도 되면 이런 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아들을 거다.
은성표도 내 웃음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내가 손해가 더 컸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오민하 비서실장이 대통령한테 차지하는 비중과 김상덕 부회장이 회장님께 차지하는 비중은 같지 않습니다. 오민하와 김상덕을 맞바꾸신 건 등가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김상덕 부회장이 매입한 라스베가스 부동산 시가가 60억 정도였던 걸로 아는데··· 그 정도면 회장님께서도 충분히 관용할 수 있는 금액 아니었던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많이 나갔습니다.”
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과를 하기 위해서인 척했지만, 사실은 내 말을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은성표를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웃음을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 검사, 내가 진짜 타겟을 손해 안 보고 때리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하, 회장님 아까 저를 은하 그룹 법률팀으로 스카우트하겠다 하시더니 지금 정말로 저에게 컨설팅을 받으시려는 겁니까?”
“미안하네.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만. 안 들은 걸로 하시게.”
은성표가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렸는데,
“수원지검장 김필중 검사장, 아시죠?”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은성표가 고개를 나 쪽으로 홱 돌렸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표정.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린다는 냉철한 장사꾼 은성표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올라올 때도 있다니.
여하튼 난 이 장사꾼을 이용해 요즘 한참 사이가 안 좋은 호위 무사와 제갈량 중 하나를 제거해볼 요량이다.
“기··· 김필중? 아니 최 검사의 직속상관 아닌가?”
“네 맞습니다. 김필중 검사장이 오래전부터 청와대 민정 수석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아주 많이요.”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난 은성표의 두뇌가 오랜만에 빠르게 회전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게 최 검사가 내게 주는 덤인가?”
“그렇습니다.”
“덤 치고는 좀 많은 것 같은데?”
“마수 거래니까요.”
“다음번 거래에서는 나도 덤을 이 만큼 준비해야 하나?”
“그건 회장님 스타일에 달린 것이죠. 덤은 언제나 덤일 뿐이죠. 옵션.”
은성표가 씩 웃더니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나도 그랬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은성표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알았네. 출근 시간 다 되지 않았나? 나 같은 늙은이가 젊은 사람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되지.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방을 나서자, 부엌에 앉아 있던 아내가 벌떡 일어났고 은성표는 다시 동네 약수터 노인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인, 늙은이가 아침부터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근데 부인께서 상당한 미인이시군요.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는데··· 남편분이 호걸이니 부인도 당연히 미인이셔야겠죠. 부부간 금슬이 좋다 들었는데 부인을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허허허”
아내의 뽀얀 얼굴이 발갛게 됐다.
“회장님 그럼 전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내가 현관문을 열자, 박정철이 바깥에 꼿꼿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애써 내 시선을 피하는 게 웃겼다.
난 베란다에 서서 은성표를 내려다봤다.
주차장에 검은색 마이바흐 승용차로 박정철이 부리나케 뛰어가 차 뒷문을 열었다.
은성표는 박정철이 열어준 뒷문으로 타려다 말고 내가 서있는 베란다를 슬쩍 올려다봤다.
거리가 멀었지만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 띤 미소가 선명했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되는 게 낫다.
후후, 좋은 친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