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후후, 회장님, 좋은 거래였습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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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리~’
또 아침 7시도 안 된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설마 또 박정철이?
스마트폰 화면을 보니 역시나였다.
“이 새끼가 또 왜?”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자고 있는 민석이가 깰까 봐 조심조심.
이제 정말 자상한 ‘아빠’가 다 됐다.
침실에서 나오니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던 아내가 나를 보고 생긋이 웃어준다. 내손에 전화기는 아직 울려대고 있다.
지난번엔 전화를 받고 베란다로 나가면서, 아내에게는 허공 키스만 날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받지 않고 폰은 소파에 던져버리면서 아내에게 진짜 키스를 하러 뛰어갔다.
“어머, 으··· 읍!”
기습 공격이었지만 이제 아내는 익숙해졌다. 내 입술과 혀를 금방 잘 받아들인다.
폰은 소파 위에서 계속 드르륵 거리고 있지만, 난 일부러 키스를 오래 끌었다.
“전··· 화··· 어떡··· 해?”
아내가 잠시 입술을 떼고 물었지만, 난 대답 대신 아내를 더 끌어당기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음···”
내 입술과 혀에 막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이런 건 언제나 좋다.
지금까지 겪어봤던 수 많은 여자들 중에 어떤 여자도 나를 흥분시키면서도 동시에 이런 포근함을 준 적이 없다.
이 여자··· 내가 사랑하게 된 걸까.
‘딩동, 딩동’
이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어머, 하아~ 지금 시간··· 하~ 누가··· 휴~”
아내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현관문으로 가려다가, 옷매무새가 많이 흐트러져 있다는 걸 깨닫고 멈춰 섰다.
“어머, 이걸 어째? 옷이···”
내게 눈을 흘겼는데,
“내가 갈게.”
아내를 향해 싱긋 웃어주면서 현관문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분명 박정철일 것이다. 내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이번엔 아예 못 참고 직접 올라온 것이겠지.
난 인상을 쓰면서 문을 열었다.
“누구시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 박정철이 맞긴 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엉거 주춤 서 있는 박정철 앞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안녕하신가? 최용구 검사. 나 은성표라고 하네.”
“어머!”
난 놀라지 않았지만, 내 뒤에서 어깨너머로 ‘누가 왔나’ 현관문 밖을 보던 아내가 놀랐다.
TV에 자주 등장하는 은하 그룹 회장의 얼굴. 아내도 알아봤다.
은성표가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박정철 자네는 밖에서 기다려.”
같이 들어오려 하던 박정철이 머쓱해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난 박정철을 쳐다보지도 않고 매정하게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이거 이른 아침부터 죄송하게 됐습니다. 늙은이가 새벽잠이 없는데다가 남편분이 하도 바쁘셔서 이 늙은이가 도통 만날 시간을 잡을 수가 없더군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사하는 은성표의 표정과 몸짓은 그냥 뒷산 약수터 할아버지다.
“아··· 네··· 저···”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를 괜찮다는 눈짓으로 안정시킨 뒤, 은성표를 데리고 책상 방으로 들어갔다.
“음··· 집이 참 아늑하고 좋구만. 애가 몇인가? 최 검사?”
“하나입니다.”
“몇 살인고?”
“여섯 살입니다.”
“애 하나 키우면서 살기에는 딱 좋은 집이구만. 이거··· 20평 정도 되나?”
“정확하시군요.”
은성표 삼청동 집의 방 하나보다 작은 크기일 테지.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집 바깥은 물론이고 방 바깥에도 나오지 않는 걸로 유명한 은성표다. 그런 은성표가 내 집에까지 찾아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들놈을 감방에 처넣어놓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애비가 어딨겠나? 그래서 왔지.”
“오신다고 뭐 달라질 건 없습니다. 회장님.”
“이미 지나간 과거야 달라질래야 달라질 수 없겠지. 난 미래를 이야기하러 온 걸세.”
말하는 자세.
짧은 문장 속에 핵심 단어를 강조하는 인토네이션.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한두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은성표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아들 은병진과는 클래스가 달랐다.
나도 자연스레 긴장감이 올라갔다.
“미래라면 회장님의 소환 여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이미···.”
“이 늙은이를 소환하고 구속하는 게 어찌 미래에 대한 이야기겠나? 내가 미랜가? 내 나이 벌써 80이 넘었는데···.”
한 방 먹었다. 초장부터 쎄게 나온다.
“은병진 부회장 이야기라면 드릴 말씀이 없습···”
“이 세상에 미래가 병진이 그놈뿐이던가? 최 검사 자네도 젊고 패기 넘치는 사람이니 이 세상의 미래가 아니던가? 난 자네 이야기를 하고 싶네만.”
이 양반 봐라? 또 한 방 먹었다.
게다가 내 이야기를 하시겠다라?
난 싱긋이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면서 뒤로 젖혔다.
은성표도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난 말일세. 대통령을 여러 명 상대해봤어. 거 축구 잘하는 대머리부터 시작해서 후후, 지금 저 백영기는 그 대머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세. 아! 미안하네. 자네 앞에서는 각하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대통령님이라고 해야 되나?”
난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했다.
“그냥 백영기라고 하지. 난 그 자 대통령 취임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거든.”
“제 이야기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랬지. 자네 이야기. 난 길게 말하는 거 싫어해. 단도직입이지 언제나. 백영기 임기 2년도 안 남았고, 자네는 최소 10년은 넘게 검사로 살아야 되는데. 아까 아들이 몇 살이랬지? 여섯 살? 그럼 10년만 해서는 안 되겠군. 20년은 해야 아들 대학은 졸업시킬 수 있겠군.”
“그래서요?”
“자네가 백영기에게 이렇게 올인을 해서야··· 자네 미래가 온전할 수 있겠나? 아, 왜 당신 미래 걱정을 내가 하냐라고 묻지는 말게.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거래를 하자는 거니까. 걱정은 오지랖이겠지만 거래는 나 같은 장사꾼한테는 일상이잖나.”
“거래라구요? 검사에게 거래를 거시는 건 부전자전인가 봅니다. 지난번엔 아들 은병진 부회장이 검찰 조사실에서 저한테 거래를 걸어왔었는데요.”
“오~ 그놈이 그랬었나?”
“성사 근처에도 못 갔었죠.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걸 하려고 해서요. 아버님인 회장님께서는 어떠실지 한 번 볼까요? 그럼?”
“후후, 그놈이 그랬었나 보군. 못난 놈. 그러니 감빵에 쳐갇혔지. 둘러서 말하지 않겠네. 자네 대한민국 최강 은하 그룹의 법무팀장으로 오지 않겠나? 내 직속으로.”
“푸하하!”
아무리 그래도 80이 넘은 어르신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거였지만, 하도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실망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강 재벌 그룹의 회장이라는 자가 제안하는 거래라는 것이 고작 자기 밑에 들어와서 고급 봉급쟁이 머슴이 되라는 거라니.
최용구가 나를 죽일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돈을 주겠으니 살려달라 했을 때 최용구는 권력 앞에 돈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돈 주겠다는 내가 증명하고 있다고 했었다. 지금 은성표도 그때 내가 최용구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하고 있다.
내 큰 웃음에 당황한 기색을 짓는 은성표를 향해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에 잔뜩 비웃음이 묻어 나오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회장님. 이거 정말 실망인데요? 아드님이 하신 제안보다 더 형편없는··· 하하 죄송합니다. 이렇게 밖에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하하하. 적어도 회장님이시라면 제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하실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이건 뭐··· 정말 아닌 거 같습니다.”
“아니, 자네 같은 신출내기 검사를 우리 은하 그룹이 스카우트하겠다는 것이네. 이 제안이 어째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모두가 입사하고 싶어 하는 재벌 그룹에 회장으로 오래 있다 보니 자기 회사가 이 세상의 중심이나 되는 듯 착각하고 있는 건가?
착각은 자유니 그러라고 하고,
“회장님, 제가 역제안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회장님의 그 제안보다는 훨씬 좋은 거래가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자네가 제안을?”
“네. 들어보시겠습니까?”
“음···”
“은하 그룹이 가지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페이퍼 컴퍼니.”
은성표의 눈꺼풀이 사르르 떨린다.
“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세탁돼서 입금되는 계좌가 두 개가 있죠?”
“···”
“하나는 은병진 부회장의 계좌. 또 하나는 백영기 대통령에게 가는 계좌.”
“그렇네만···”
“그중에 은병진 부회장의 계좌를 까지 말아 달라··· 이게 회장님이 원하시는 거죠? 좋습니다. 은병진 부회장 계좌, 안 까겠습니다. 대신 그 대가로 백영기 대통령의 계좌를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계좌 번호, 은행명, 라우팅(Routing) 넘버까지 전부 다.”
“뭐. 뭐라고? 자··· 자네···.”
“후후, 이 정도는 돼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걸 거부하기 힘든 제안일 거라고 어떻게 자신 하나?”
“당연하죠. 은병진 부회장의 계좌는 앞으로도 요긴하게 쓰셔야 하는 계좌지만, 백영기 대통령의 계좌는 이제 회장님께서 용도 폐기하신 계좌니까요. 쓸 데 없는 건 저한테 주시고, 그 대가로 꼭 필요한 건 지키게 되는 제안인데··· 자칭 타칭 ‘거래의 달인’이라는 회장님이 거부하실 수 있을까요?”
“백영기 계좌가 왜 내가 쓸 일이 없을 거라고 보나?”
“그건 아까 회장님이 저한테 하셨던 말에 답이 있지요. 백영기에게 올인하지 마라.”
“뭐?”
“어디에도 올인하지 않는다. 회장님의 경영철학이죠. 그래서 회장님은 ND 그룹과는 달리 백영기 대통령에게 올인하지 않으셨죠. 임기 후반, 이제 더 이상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대통령 계좌로 비자금 안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대안으로 기술 유출 사건 만드셨죠. 계좌로 돈 보내는 건 꼬박꼬박 월급 꽂아주듯이 해야 하지만, 기술 유출 사건 조작해서 돈 보내는 건 한 번으로 끝이니까. 현명하신 결정이었습니다. 외국인 행동주의 펀드 하나가 중간에 끼어들어 일을 망치긴 했지만 말이죠. 뭐 망쳤다고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임기 후반의 대통령과 거리를 유지한다는 목표는 이루셨으니까요.”
은성표가 침을 꼴깍 삼킨다.
“음··· 좋네 그런데 병진이의 계좌가 나한테 꼭 필요할 거라고 어떻게 자신 하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내 아들에게 경영권 물려줄 수 있는데.”
“후후··· 뻥을 치시다니.”
“뭐?”
“은병진 부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은하 로지텍. 이번에 대규모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발행할 계획이더군요.”
“그··· 그건 어떻게···.”
“신주인수권부 사채. 그거 인수해야죠. 누가요? 은병진 부회장이요. 인수하자마자 채권은 바로 상환해버리고 채권에 붙어서 온 신주인수권만 남기고 말이죠. 곧이어 로지텍이 신주 발행하겠죠? 그러면 인수권 행사해서 지분 더 갖게 되고, 그 지분으로 은하 테크론 주식을 확보하면 되죠. 후후, 비록 지난번 은하 테크론 분할 합병을 통해서 경영권 승계하겠다는 계획은 무산됐지만, 이 방법을 쓰면 은병진 부회장이 테크론 지분을 확보할 수 있죠. 그런데 은병진 부회장이 신주인수권부 사채는 무슨 돈으로 사죠? 후후. 말레이시아 페이퍼컴퍼니와 연결된 은병진 부회장의 계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죠. 동시에 대통령에게 주는 계좌는 더더욱 필요 없죠. 국민연금? 이런 거 동원 안 해도 경영권 세습 가능한 방법을 찾았으니까요.”
“자··· 자네··· 아니 최용구 검사··· 정말 은하 그룹에 올 생각 없는가?”
“그건 이미 거래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은병진 부회장이 회사 물려받을 수 있게 해 주고 그 대가로 그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거래의 기본인 등가성이 전혀 없어요.”
“음··· 좋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봅세.”
“제가 대통령 계좌를 가져서 뭐할 거냐구요?”
“후후, 자네, 사람 속마음도 읽는가 보구만.”
“그것도 아까 회장님께서 이미 답을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들 이제 6살입니다. 전 롱런해야 합니다. 저 같은 공무원 검사가 롱런을 하려면···”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약점을 쥐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 거래가 성사되면 은병진 부회장도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아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고, 저도 권력자의 약점을 쥐고 롱런할 수 있게 되지요. 아~ 주 공평한 등가 거래 아닙니까?”
은성표가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고 있더니 싱긋이 웃는다.
“최 검사···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양반이군. 아깝군. 검사로 썩기는.”
이 말을 하면서 은성표는 폰을 꺼내 메모장 앱을 열어 뭔가를 찾는다.
“최 검사, 볼펜과 메모지 좀 주시오.”
“그냥 폰을 잠깐 저한테 주십시오. 요즘 세상에 그런 거 옮겨 적고 하지 않습니다.”
난 은성태의 폰을 받아 들었다.
폰 스크린에 떠 있는 건 역시 백영기의 계좌 번호와 은행 라우팅 넘버.
꼼꼼한 은성표. 역시 이런 건 직접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난 내 폰으로 은성표 폰 스크린을 사진을 찍은 뒤, 폰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후후, 회장님, 좋은 거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