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도대체 끄나풀이 누구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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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하고는···.”
김필중이 수원 법원 사거리에 있는 삼계탕집에서 사법고시 동기인 현성식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잊어버려. 어쩌겠어? 이미 지난 일인데.”
현성식은 수원 지법 부장 판사다
“맘대로 안되다. 너 알다시피 내가 이런 일에 물 먹은 적 없잖아.”
김필중은 사법고시도 남들보다 일찍 패스한 편이다.
검사 임용 뒤에도 수도권 요직을 돌았고 부장도 남들보다 일찍 달았다. 사법고시 동기들 중에 단연 선두 주자였고, 지금도 검찰 조직의 꽃이라 불리는 특수 라인의 좌장 격이다.
그런데 이번 청와대 인사에서 밀렸다.
대통령의 호위 무사로서 이번엔 반드시 민정 수석이 될 거라고 봤었다.
“황상철 비서실장? 헛, 좀 어처구니가 없다. 아니 많이 없다. 어처구니가.”
황상철.
김필중과 사법 연수원 동기지만 나이는 세 살이나 많아,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르지만, 속으로는 별로 형으로 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급도 빠르지 않았고, 보직도 주로 지방의 지청을 전전하는 별 볼일 없는 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천지검 공안부장으로 발령이 난 뒤 승승장구, 검사장도 김필중보다 일찍 달았다.
“상철이 형은 느지막이 장가 잘 갔네. 처가가 빼팅 쎄게 때렸다는 거 아니냐. 그거 아니었으면 상철이 형이 인천지검 공안부장 갈 수 있었겠어? 그런데 이번엔 비서실장까지. 후후 그 집안 빼팅 때린 거 열 배 백 배 회수하겠네.”
“그렇겠네. 어느 집안인지 몰라도 사위 하나 잘 뒀네. 도승지 사위를 뒀으니.”
김필중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소주를 거칠게 털어 넣었다.
“아니 벌써부터 공안 쪽이 저렇게 힘을 받으면··· 좀 답답하긴 하다.”
정권 초중반은 재벌이나 고위직 수사를 맡는 특수 쪽이 ‘대목’이다. 신생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의 대상은 언제나 특수부의 ‘먹잇감’인 재벌 아니면 고위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권 후반으로 갈수록 공안이 힘을 받는다. 정치의 계절이 되기 때문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서실장에 민정 수석까지 공안 라인이 꿰찬다는 것은 김필중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유선진 선배··· 농간이지?”
현성식이 김필중 눈치를 살피면서 슬그머니 물었다. ‘농간’이라는 단어 선택은 좀 과했나 싶어 뱉어놓고 뜨끔했다. 술기운이 오르니 어휘 선택도 잘 안 된다.
“흥! 그렇겠지. 지가 비서실장 하면 내가 민정 수석 갈 거고 그럼 지는 핫바지 되는 거 뻔하니까 민정 수석에 눌러앉은 거지. 거꾸로 지 말 잘 듣는 상철이 형을 지 위에다 박고. 과연··· 제갈공명이라 불릴 만 해. 후후후”
“공안 애들 설치면 우리 법원 쪽도 피곤한데. 다루는 사건이 정치 쪽이라 그런지 그 놈들은 엄청 정치적이야.”
“풉, 그렇겠지. 도둑놈 잡으려다가 도둑놈 된다잖아. 후후, 그나저나 우리 특수 쪽은 이제 서서히 저무는가 보다. 성식아”
김필중이 연신 소주를 들이부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요즘은 젊은 애들도 특수보다는 금조(금융조세 조사)를 선호한다며? 특수가 종로면 금조는 테헤란로라고···”
현성식의 말에 김필중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뜻이지.”
주가 조작이나 비자금 조성에 동원되는 금융 탈세 기법이 갈수록 글로벌에 복잡해지니, 그걸 잡는 금조가 각광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과거 특수부가 전담했던 재벌과 고관대작의 범죄도 금조 쪽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다.
“거 중앙 지검 금조에 한재민이라고 알지?”
현성식이 물었다.
“알지. 거기 에이스잖아.”
“엄청나다던데.”
“맞아. 일 잘해. 스마트하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주변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라고.”
“후후, 원래 잘 나가는 검사 주변엔 말들이 많지. 시기 질투가 얽히니까. 야! 특히 니들 판사들은 조그만 것만 있어도 우리 검사들 까고 퍼뜨리고 하잖아? 후후.”
“새끼~ 우리가 뭘···”
“그래 한재민이 주변에 뭔 말들이 도는데?”
“야망이 엄청나다고.”
“하하, 야망이야, 뭐. 검사가 야망이 있어야지. 대통령이라도 하겠대?”
“대통령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파고 다닌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김필중은 순식간에 술이 확 깼다.
“이번에 은병진 부회장 구속시켰지? 너네 수원 지검에서.”
“응, 그랬지.”
“근데 그거 시작은 너희들이 한 거 아니잖아. 중앙지검에서 하다가 넘어온 거지?”
“그···랬지.”
“넘어간 이유가 뭔지 알아? 그게 파다 보면 결국 VIP 하고 연결될 있겠다 싶어서 그만 덮자고 했었는데 한재민이가 한사코 더 파야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거 아니냐. 그래서 넘긴 거래. 너희 쪽에 은하 그룹 스폰서 받는 놈 있었지? 이철규라고. 그놈한테.”
“아··· 그··· 랬었구만.”
김필중의 눈이 현성식을 떠나 멀리 허공을 향했다.
‘이재훈이가 정말 살아있는 건가. 혹시 이재훈이 끄나풀이··· 한재민인 건가. 그럼 최용구 그 독고다이 새끼는 뭐지? 이재훈이를 분명 죽였다고 했는데. 그럼 혹시 둘 다야?’
***
“최용구 검사? 별명이 독고다이라면서요? 반갑습니다.”
한재민이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난 손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놓았다.
“여기 앉죠.”
“네.”
한재민과 나, 둘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한재민.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2년 만인 24살 약관의 나이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소년 급제’ 케이스.
나이만 어린 게 아니다. 데리고 일해 본 간부 검사들은 하나 같이 한재민의 능력에 혀를 내두른다 했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단 하루 만에 핵심을 파악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원투쓰리 옵션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 간부 검사 앞에 탁 펴놓고 이렇게 말하는 걸로 유명하다.
“세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1번은 이게 좋고 저게 나쁩니다. 2번은 이게 장점이고 저게 단점입니다. 3번을 하시면 이런 이점이 있지만, 저런 위험이 있습니다. 1번을 취하시는 게 가장 좋다고 판단됩니다. 이유는 이러저러합니다.”
아랫사람이 답을 딱 정해서 갖고 오는데 어떤 간부인들 싫어하겠나.
‘멋지게 컸구나. 한재민.’
오랜만에 보는 한재민이 난 대견했다.
“반갑습니다. 한재민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난 지금 최용구의 몸에 들어와 있는 신세. 깍듯하게 선배 대접을 했다.
“내 말을 많이 들어요? 누구한테요?”
“권성훈 선배가 많이 이야기했었습니다.”
“아~ 성훈이 형이 거기 있죠? 하하하. 그럼 뭐 좋은 이야기 안 했을 텐데. 후후후”
한재민은 권성훈과 사법연수원 동기지만 나이는 여섯 살이나 적다.
“성훈이 형이 선배세요? 그럼 최 프로는 나보다 3년 후배네요.”
“그렇습니다.”
3년 후배라···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재민이 넌 학부에 입학한 풋내기였었는데···.
“최 프로, 은하 테크론 사건 잘하고 있더군요. 특히 압수수색 이야기 듣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전격적으로 털다니. 후후후. 군사 작전하듯 털었다고 하더군요.”
“네. 제 별명이 그래서 독고다이인가 봅니다.”
“하하하. 그런가 보군요. 은병진 부회장도 구속했더군요. 대단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선배님을 찾아뵙게 됐습니다. 자문을 좀 구하려구요.”
“자문요? 후후, 알고 있겠지만, 은하 그룹 사건 원래 내 꺼였습니다.”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나도 압수 수색··· 뭐 나는 최 프로처럼 그렇게 군사 작전하듯 그렇게는 못 했겠지만. 후후 여하튼 나는 압수 수색은 고사하고 은 씨 일가 사람 한 명 소환 조사도 못해보고 뺏겨버렸죠.”
뺏겨버려?
권성훈 말로는 한재민이 은하 그룹 장학생이라 수작을 걸어 넘긴 거라 했었는데.
“검사로서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뭐 검사 생활 자존심으로 하는 거 아니지만. 여하튼 그래서 사건이 수원 지검으로 넘어간 뒤에도 난 계속해서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어요.”
“그러셨군요.”
“근데 처음엔 아무런 진행이 안 되고 있더라구요. 왜 그랬었죠?”
“아, 그땐 제 담당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최근에 배당을 새롭게 받았던 지라.”
“그래요? 최 프로 전에는 담당이 누구였는데요?”
“권성훈 선배···”
“성훈이 형요? 하하하. 그랬군요. 그럼 뭐 이해가 되네. 하하하. 그건 그렇고, 최 프로께서는 저한테 뭐가 궁금하셔서 오신 건가요?”
한재민이 검은 뿔테 안경을 위로 살짝 밀어 올리면서 물었다. 반짝거리는 눈매가 예전 대학생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선 사건을 저희 수원 지검으로 넘기시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재벌 사건은 중앙 지검 금조부에서 맡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일부에서는 그래서 한재민 검사님께서···”
“은하 그룹 장학생이다?”
“아··· 네.”
“후후, 그런 말 돌만 하죠. 전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잠깐만요.”
한재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책상 뒤에 있는 캐비넷으로 갔다.
거기서 분홍 보자기에 싼 사건 서류 더미를 꺼내 들고 오더니 내 앞에 턱 놓았다.
“최 프로가 방금 물어본 거··· 후후 중앙 지검 간부들이 은하 그룹과 연결된 거 있는 거 아니냐라는 궁금증일 테고···”
한재민이 분홍 보자기를 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둘러싸고 돌고 있는 ‘은하 그룹 장학생’이네 뭐네 하는 소문 도는 것도 마찬가진데··· 나는 그런 거에 이러쿵저러쿵 대답하고 변명하고 후후, 그럴 생각 없습니다. 다 쓸데없는 짓이요. 최 프로, 그냥 이거나 드릴 테니 가져가 보세요.”
한재민이 방금 풀어낸 분홍 보자기 속의 서류 더미를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말했다.
“이게 다 뭔가요?”
“내가 그동안 은하 그룹 비자금 관련해서 내사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보면 알겠지만, 은하 그룹만 있는 건 아니에요. 재벌들만 있는 것도 아니구요. 이 사건이 왜 수원 지검으로 넘어갔느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넘어온 거냐는 최 프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 이 서류 더미 속에 차고 넘치게 있습니다.”
이 말만 듣고도 난 서류 더미 속에 있는 내용이 무엇일지 차고 넘치게 알 수 있었다.
은하 그룹만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은 곧 ND 그룹도 있다는 말일 것이고,
재벌들만 있는 것 아니라는 말은 곧 백영기 파일도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는 서류 한 장 보여준 적 없습니다. 최 프로가 은하 테크론을 그렇게 전격적으로 압수 수색을 하고, 은병진 부회장을 구속 수사하는 걸 보고 믿어도 되겠다 싶어서 이 서류들 다 주는 겁니다.”
“네···”
“검사 선배로서 하는 말이지만···”
“···”
“사건 수사하다 보면 직선으로 갈 일보다는 구불구불 가야 할 일이 훨씬 많을 거고, 가다가 푹 쉬었다 가야 하는 일도 많을 겁니다. 이 사건은 특히나 더··· 후후, 윗사람들 체면 살려줘야 할 일도 많을 거고. 뭐 나도 그래서 이 사건 수원 지검에다가 넘긴 거지만. 이 서류 더미 검토해보면 최 프로도 감이 오겠지만··· 힘이 들 겁니다. 수사해 나가기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더 할 이야기 있나요?”
“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선배님.”
사건과 별개로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요? 뭔가요?”
한재민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 한재민이 의아한 듯 안경을 슬쩍 위로 올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사건을 혼자 내사를 하고 계셨다고 하셨는데··· 이 사건에 굳이 그렇게 하셨어야 할 이유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혹시··· 개인적인 어떤 이유라도···”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질문을 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한재민이 씩 웃더니,
“후후, 뭐··· 검사로서의 책임감··· 그거 때문만은 아니다···라고만··· 대답하죠.”
이 말만으로도 난 가슴이 시렸다.
한재민.
니가 아직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그럼 여기까지 할까요?”
한재민이 벌떡 일어나면서 다시 악수를 청했다.
한재민과 나는 처음과 달리 상대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