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숨 쉴 틈을 주면 안 돼. 폭풍같이 몰아쳐야 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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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진의 안구가 빠르게 좌우로 요동치는 게 보였다.
‘이 두꺼운 자료 뭉치 속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얼마나 구체적인 증거가 있을까’
‘내가 연루됐거나 알고 있는 부정 비리도 과연 저 자료 더미 속에 있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빠져나갈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게 과연 통할 수나 있을까’
지금 안봉진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가득 차 있다는 걸 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번 시작해본다.
이 인간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아보기도 할 겸.
“안봉진 전무님, 준비되셨죠?”
“······”
내가 내민 서류를 내려다봤다가 나를 다시 보는 안봉진.
아무것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용쓰는 표정이 애처롭다.
“전무님. 이 서류는 보시다시피, 미국 시애틀 시가 발행한 해밀턴 엔터프라이즈의 비즈니스 라이선스입니다. 그런데 해밀턴 엔터프라이즈. 안봉진 전무님은 아까 모른다고 하셨죠?”
대답 안 한다. 아마 묵비권 행사하기로 맘을 정했나 보다.
“후후, 제가 하나둘 씩 설명해드리죠. 해밀턴 엔터프라이즈. 회사 자산이라 해 봐야 시애틀 시 한복판에 있는 아까 그 웨스턴 에머랄드 호텔 하나뿐입니다. 맞죠?”
“···”
“근데 이 비즈니스 라이선스 좀 보세요. 회사 주인이 누구로 돼있죠? ”
내가 문서에 찍힌 사람 이름을 검지 손가락으로 탁 찍으면서 물었다. 안봉진은 내 손가락 끝을 보려고도 안 한다. 대답도 당연히 안 한다.
“조나단 실버 (Jonathan Silver). 아는 분인가요?”
역시 무대답.
나는 서류 더미에서 그다음 종이를 집어와 안봉진 앞에 탁 놓았다.
조나단 실버 명의로 된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계좌 확인서다.
“미국도 금융 실명제 국가라, 법적인 본명 확인을 해야 계좌를 열어주죠. 백그라운드 체크도 당연히 하구요. 그건 미국에 오래 계셨던 전무님이니 모르실 리가 없을 거고···.”
계좌 확인서를 내려다보는 안봉진이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근데 뱅크 오브 아메리카 직원들이 참 일 잘했네요. 조나단 실버라는 사람의 국적이 여기 옆에 턱 하니 적혀있네요. 사우스 코리아.”
“어··· 저··· 그게···”
안봉진이 맘이 바뀌었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매몰차게 외면했다.
“국적 옆에는 한국 이름도 있네요. 이거 어떻게 읽죠? Byung Jin. 병··· 진. Eun이면 은? 은병진이네 한국 이름이. 이 사람의 한국 여권 번호 있는 거 보이시죠?”
“저··· 검사님.”
난 무시하고 다시 서류 더미에서 다음 종이를 집어 탁 놓았다.
여권 발행 증명서와 가족관계 증명서.
“이 여권 가짜 아닌 거는 발행 증명서가 있으니 됐고···. 이 번호 가진 은병진이 과연 누굴까? 안봉진 전무님과 제가 함께 아는 과연 그 사람일까요? 안 전무님은 당연히 동명이인이라고 하시겠죠. 과연 동명이인이 맞을지 한 번 볼까요? ”
“······”
“이 검새도 뱅크 오브 아메리카 직원만큼 일을 좀 꼼꼼하게 하는 편이라 찾아봤습니다. 가족 관계 증명서. 이 사람 아버지가... 엇? 은성표네? 은성표가 아버지인 은병진이 또 있을까요? 게다가 이 은성표는··· 여기 주민등록번호를 보니 은하 그룹 회장님이 맞네요.”
그다음 종이도 탁.
아까 그 뱅크 오브 아메리카 계좌의 거래 내역서.
“은하 테크론 미주 본사가 이 조나단 실버, 한국 이름 은병진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 계좌로 5백만 불을 송금했네요.”
그다음 종이도 탁.
또 다른 계좌 이체 내역서.
“그런데 그 5백만 불이 또 어딘가로 갔어. 어디로 갔을까? 카를로스 곤잘레스라는 사람한테 갔네. 이 사람은 누구죠?”
그다음 종이도 탁.
웨스턴 에머랄드 호텔 매매 계약서. 매도자가 카를로스 곤잘레스.
“아하! 카를로스가 이 호텔 주인이었군요. 그러면 조나단 실버, 즉 은병진이 이 호텔을 카를로스 한테서 산 거네?”
그다음 종이도 탁.
또 다른 호텔 매매 계약서. 이번엔 매도자가 조나단 실버.
“오잉? 조나단 실버, 즉 은병진이 이 호텔을 사자마자 해밀턴 엔터프라이즈에 팔았네? 근데 가격이··· 이거 뭐야? 10,000달러야? 아니 5백만 불에 산 호텔을 만불에 팔아요? 이건 그냥 줬다는 말이지. 맞죠?”
그다음 종이도 탁.
‘해밀턴 엔터프라이즈’ 연간 사업 보고서.
“아니 호텔 하나밖에 없는 회사가 돈도 많이 벌었네요. 이익률이 세상에 50프로가 넘네. 도대체 이 웨스턴 에머랄드라는 호텔이 어떤 호텔이길래 이렇게 수익성이 좋을까요?”
그다음 종이도 탁.
웨스턴 에머랄드 호텔 고객 명단.
“앗! 이거 뭐죠? 호텔 고객이 왜 이래? 거의 다 한국 사람이잖아요?”
난 종이 위에 찍힌 깨알 같은 명단에서 뭔가 열심히 찾아 검지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찍은 채로 안봉진을 빤히 쳐다본다.
“와~ 여기 전무님 이름도 있네요? 안봉진. 어이구~ 여러 번도 오셨네. 시애틀에 일이 많으셨나 봐요?”
그다음 종이도 탁.
웨스턴 에머랄드 호텔 매출 내역서.
“그런데 전무님. 이 호텔 숙박료가 1박에 세상에, 이게 도대체 얼마예요? 500불이야?”
난 엄청 놀란 표정으로 안봉진을 쳐다봤다. 이제 안봉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 한다.
“가만있어봐. 500불은 아무것도 아니네요? 1,000불도 있어. 앗, 2,000불짜리도? 세상에 아니 이렇게 비쌉니까? 시애틀 이 동네 숙박료가? 아무리 은하 테크론이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이라지만 아니 직원이 출장 와서 이렇게 비싼 방에서 자요?”
그다음 종이도 탁.
고객 별 숙박료 정산 내역서.
“엇! 근데 이건 또 뭐죠? 숙박료가 전부 비싼 건 또 아니잖아요. 한국 사람한테만 비싸게 받았네~~ 외국 사람은··· 뭐 별로 없기도 하지만. 1박에 200불 정돈데. 100불짜리도 있네. 한국 사람들한테만 어휴~ 바가지를 씌워도 너무 씌우셨네.”
쉴 새 없이 빠르게 몰아치는 최용구의 폭풍 심문법.
최용구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정화용이 심문 들어가기 전에 미리 세심하게 짜둔 심문 시나리오에 맞춰 서류들을 차곡차곡 순서대로 정리해뒀다.
덕분에 난 서류 내용을 보느라고 스피드를 떨어뜨리는 일 없이, 안봉진 앞에 탁탁 서류를 놓으면서 쉴 새 없이 몰아칠 수 있었다.
안봉진 앞엔 내가 놓은 서류가 쭉 널려있고 안봉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한숨만 몰아쉰다.
최용구. 인육 먹은 조폭도 잡았다더니. 폭풍 심문법, 인정한다.
“전무님, 왜요? 이제 그만할까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난 책상 위 서류 더미를 탁탁 치면서 말했다. 아직 반의 반도 안 줄었다.
“전무님 이 영화 대사 아시죠? I can do this all day.”
캡틴 아메리카가 하면 멋지길래 싶어서 나도 해봤다. 근데 괜히 했다 싶었다. 이미 자포자기해버린 안봉진에게 내 이런 썰렁한 농담 따위가 귀에 들어왔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안봉진 전무님, 잠시 쉬실래요? 갈 길이 먼데.”
나도 상대가 반응이 없으니 좀 피곤했다. 등받이에 등을 척 기대면서 말했다.
근데 안봉진이 뭔가 결심한 듯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말을 시작한다.
“검사님. 제 설명 좀 들어보십시오.”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나도 다시 흥미가 생겼다. 다시 기댔던 등을 앞으로 일으켰다.
“그 미주 본사의 5백만 불 대출 건은···”
“대출요?”
이 무슨 소리?
“네. 그건 당시 미주 본사에서 은병진 부회장님한테 대출을 한 거였습니다.”
안봉진이 이 방에 들어온 이후 가장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거 한 번 해보자는 건가?
“헐··· 대출이었다?”
“네. 빌려간 거였습니다.”
“안봉진 전무님. 당시 은병진 씨는 미주 본사 직원이었죠? 입사한 지 1~2년 된?”
“네.”
“슈퍼 울트라 초고속 승진해서 지금은 부회장님이 되셨고요? 뭐 그건 회사 인사 방침이 그랬거나 은병진 님이 워낙 출중하셨거나··· 그럴 수 있죠. 네네.”
“검사님 그건 잘 아시면서~ 회장님 후계자시니까 당연히 승진을 그렇게 하신 거죠~”
어쭈, 내게 싱긋이 비웃음 날리면서 가르치려고까지?
빈정이 상했다. 조금 느슨하게 해주니까 바로 이렇게 기어오른다.
최용구 말이 맞다. 사람 하나 골로 보낼려고 맘 먹었으면 피곤하다고 중간에 그만 두면 안 된다. 끝을 봐야 한다.
“그러시겠죠. 재벌들이 하시는 일 그건 내 취미가 아니구요. 알 바도 아니고.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룹 부회장쯤 되시는 분이, 회장님의 후계자까지 되시는 분이 회사에서 빌려간 돈 이자는 내고 계시는지 그게 궁금하다는 말입니다. 회사에서 은병진 부회장한테 대출금 이자는 받고 계시나요?”
“그건 말이죠, 검사님.”
말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바로 찔러 들어간다.
“그건 압색에서 나오는 서류들 보면 알 거고. 차용증은 있나요? 없죠? 있을 리가 있나.”
“아··· 차용증은··· 그때 아마 스킵했던 거로···.”
“스킵요? 풉! 이쯤에서 우리 중간 정산해봅시다. 사실 중간도 아니지. 아직 갈 길이 한참 더 남았으니까. 은병진은 시애틀 미주 본사에서 5백만 불을 꺼내서 호텔을 샀어요. 대출했다는 건, 말도 안 되구요. 차용증도 없고 이자도 안 내고 상환 계획도 없는데 뭐. 그냥 빼내 쓴 거지. 제 말 맞죠? 전무님.”
“그게 저··· 검사님··· 돈을 벌면 상환하기로···”
“돈을 벌면? 지금 엄청 벌고 있잖아요? 근데 왜 상환 안 하죠? 아니지, 이것도 사실 돈을 벌고 있는 게 아니라, 회삿돈을 빼내고 있는 거지. 미국 출장 오는 임직원들 모두 이 호텔로 몰고 바가지요금 물리는 수법으로. 맞죠?”
안봉진이 또 고개를 푹 숙인다. 아까 모드로 다시 돌아갔다. 한 번 개겨보려다가 본전도 못 챙겼다. 그래도 개기려고 맘 먹었다는 자체가 벌 받을 일이지. 난 계속 몰아친다.
“출장 오는 임직원들이야 바가지인 줄 모르지. 아니, 알 필요도 없지. 어차피 돈은 회사에서 출장 경비로 나가는 거니까. 이쯤 되면 뭐 직원들 일부러라도 시애틀 출장 마구마구 보내시겠네. 혹시 여름휴가도 여기로 가라고 밀어내지 않나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거 옛날에 영화도 있었는데. 누구 나오는 영화더라?”
난 책상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탁 괴고 손 위에 얼굴을 얹었다.
“거 배우가 이러고 있는데. 잠이 안 와서.”
난 이 자세로 한동안 안봉진을 빤히 쳐다본 후, 툭 던지듯 말했다.
“은병진 부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회사 임직원입니다. 맞죠?”
“네.”
“회사 임직원이 회삿돈을 빼내서 자기 이익을 취하는 거. 그거... 전문 용어로 뭐라고 하죠?”
“···”
“대답 안 하시네. 근데 외환거래법은 지켰나? 지켰을 리가. 그건 뭐 공소시효가 3년이라 벌써 끝났으니 잊어버립시다. 제가 질문한 거나 대답해보세요. 전무님. 다시 물어드려요?”
난 중요한 부분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끊어서 묻는다.
“회. 사. 직. 원. 이 회. 삿. 돈.으로 자. 기. 이. 익. 땡기는 거. 전문 용어로··· 뭐죠?”
안봉진은 나의 말이 한 자 한 자 끊어질 때마다 흠칫흠칫 한다.
그때, 조사실 문이 열리면서 정화용이 들어왔다. 나 옆에 탁 서더니 말한다.
“검사님, 은하 테크론 본사 압수 수색 완료했습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으셨죠? 압수 수색 완료됐답니다. 전무님, 이제 여기서 제가 말한 거 증빙할 서류들이 마구마구 쏟아질 겁니다.”
보고하는 정화용은 돌아보지 않고 안봉진을 계속 내려보면서 말한다.
“근데 아까 내가 두 번이나 물어본 거 왜 대답 안 하실까? 이 검새가 검사스럽지 않아서 그러시나? 그럼 뭐 이 검새가 대답을 대신해드릴 수밖에. 제가 말해 드리죠. 그 전문 용어”
안봉진 얼굴빛이 흙빛이 됐다.
“업무상 횡령”
그러고는 정화용에게 차갑게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안봉진을 내려보면서.
“정화용 계장. 이 자, 구속해. 업무상 횡령 혐의. 증거 인멸 우려 충분해.”
일부러 반말로 세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은하 그룹 회장 은성표”
‘주인’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자, 안봉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거기다 은성표 아들 은병진. 둘 다 출금 쳐. 아들은 소환하고. 피의자 자격. 죄명은 동일. 업무상 횡령. 더 추가될 수도 있고.”
나는 벌벌 떠는 안봉진을 뒤로하고 조사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