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인 검사에 빙의했다-29화 (29/70)

〈 29화 〉 증거 서류가 폭탄보다 더 무서운 법이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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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압수 수색?”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은하 코스모스 타워 은병진 부회장 집무실.

평소 웬만해선 화를 내는 법이 없고, 예의범절이 남다르다고 알려진 은병진인데,

“아~ 쉬이~팔 쉬키들이 무슨 개조~옺같은 소리야?”

욕지거리가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 한두 번 입에 붙여봤던 게 아닌 것 같다.

“저도 놀랬습니다. 지금 수원은 난리가 났답니다. 아무런 낌새도 없었고, 통보도 전혀 없었고, 마치 군사 작전하듯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합니다.”

진성우 상무.

대학부터 로스쿨까지 모두 미국에서 마친 미국 변호사다. 로스쿨 시절 같은 대학에서 경영학 MBA를 하던 은병진의 눈에 들어 은하 그룹 비서실 법률팀에 스카우트됐다.

은하 그룹이 완전히 은병진에게 넘어오면 비서실장 1순위로 꼽힌다. 아버지 은성표에게 김상덕이 있다면 아들 은병진에게는 진성우가 있는 셈이다.

“보안 요원들은? 뭐 하고 있었대? 검새 새끼들이 들이닥쳤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었대?”

“워낙 조직적으로 달려든 모양입니다. 기습이었답니다.”

“조직적? 기습? 그런 거 대비하라고 돈을 그렇게 쳐들여서 데리고 있는 놈들 아냐?”

매년 떡대 좋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로만 보안 요원들을 채용해서, 해병대 저리 가라 할 만큼 ‘빡세게’ 굴리는 은하 그룹이다.

거기 들어가는 인건비가 얼만데 검찰 수사관들한테 손 한 번 못 쓰고 당했단 말인가.

은병진은 속이 타서 옆에 있는 물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런 일은 은병진에게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머리엔 눈곱만 한 대책이라도 하나 떠오르는 게 없다.

눈치를 보니 진성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책상물림에 머리싸움만 해본 인간··· 나랑 무슨 차이가 있겠나.’

은병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켓을 꺼내 입는다.

“삼청동 아버님께 간다. 김상덕 부회장 연락해. 같이 가자고 해.”

***

“검찰이 안 하던 짓을 하네.”

은성표가 아들과 아랫것 둘을 소파에 앉혀놓고 자신은 상석에 앉았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이야. 정치하는 늠들은 휴화산이라고 생각하면 돼. 언제 어느 때 폭발할지 알 수 없거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은병진에게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김상덕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 부회장. 큰집에 연락은 넣어봤나? 뭐 별로 건질 건 없었겠지만···.”

“네, 회장님. 모든 핫라인이 끊겼습니다.”

김상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김 부회장. 자네나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저놈들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다는 것만 빼면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야. 여기··· 이 젊은 친구들은 처음이기도 하고 전혀 예상도 못했겠지만.”

은성표가 관자놀이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서 말했다.

평소 편두통이 있어서 생긴 버릇인데, 저러고 나면 꼭 비상한 아이디어가 나오곤 했다.

“거기~ 진성우라고 했나?”

자신의 이름이 하늘 같은 회장님 입에서 나오자 진성우는 깜놀이다. 안 그래도 잡힌 각을 더 확실하게 잡으면서 대답한다.

“네, 회장님.”

“자네 미국에서 법 공부했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그럼 토론 같은 거 많이 해봤겠구만.”

“토론이면··· 예, 수업이 다 토론이었습니다.”

“그래, 토론에서 이기는 최후의 방법이 뭐라고 배웠나?”

“네? 아··· 그건··· 저··· 논리··· 상대 논리의 허점···”

은성표가 진성우를 보고 씩 웃더니 김상덕에게 고개를 돌린다.

“후후, 이 젊은 친구, 답을 모르네. 미국 대학 근처에도 못 가본 우리 늙은 김 부회장이 오히려 답을 잘 알 것 같네. 이봐, 늙은이. 대답해봐. 토론에서 이기는 최후의 방법이 뭔가?”

김상덕이 씩 웃으면서 답한다.

“인신공격입니다.”

“하하하. 역시 김 부회장, 정답일세. 근데 토론이든 전쟁이든 이기는 방법은 별로 안 다를 거 같은데. 김 부회장 내 말이 맞나?”

김상덕이 싱긋이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후후, 자, 우리 김 부회장이 정답을 말했으니 정답대로 해야겠지? 인신공격. 유식한 말로 하면, 메시지가 안 되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준비는 이미 돼있겠지?”

“네. 회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1차 타겟은 어딘가? 여기 젊은 친구들도 알 건 알아야 하니까.”

“당연히 적의 중심부입니다. 사실 전 저 놈들도 우리 중심부를 먼저 칠 거라 예상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김상덕은 은병진을 슬쩍 쳐다봤다. 김상덕이 말한 ‘중심부’란 은병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크론 수원 본사를 쳤습니다. 우리한테는 변방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원래 우리 스타일대로 중심부터 바로 칠 생각입니다.”

“후후, 김 부회장. 실력 발휘 한 번 해봐.”

***

은성표 저택에서 나오면서 김상덕은 차를 타지 않고 혼자 걷겠다고 했다.

혼자 걷는 김상덕의 뒤를 김상덕의 승용차는 저속으로 졸졸 따라왔다.

김상덕은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비밀은 항상 밀실에서 새 나가는 법’이라고 김상덕은 생각한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일수록 김상덕은 사람들이 많은 곳을 걸으면서 대화하거나 전화했다.

— ‘아, 부회장님. 박정철 전화받았습니다.’

“전화 좀 빨리 받는 습관을 길러야겠어. 신호가 세 번이나 갔어.”

—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전화기 너머로 물 트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후후, 바쁜가 보군.”

박정철이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회장님께서 자네 지난번 실수 만회할 기회를 주셨어.”

— ‘아! 회장님 은혜 평생··· ’

전화기 너머로 젊은 여자의 코맹맹이 목소리가 들린다.

“앞으로 내 전화는 앵앵거리는 계집은 떼놓고 받도록 하게. 영 거슬리는구만.”

— ‘아! 죄송합니다. 주의하겠···’

“회장님 말씀만 전하고 끊겠네. 메시지가 딸리면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하셨네. 그럼 보던 재미 마저 보시고. 옆에 앵앵거리는 계집 때문에 통화를 못 하겠군.”

— ‘네, 부회장님. 명심···’

통화를 마치자 김상덕은 멈춰 섰고 승용차가 옆에 와 섰다.

“댁으로 모실까요?”

김상덕이 차 뒷좌석에 오르자 기사가 물었다.

“아냐, 판교로 가. 오늘은 목소리 앵앵거리는 에밀리가 보고 싶구만.”

***

수원 지방 검찰청 조사실.

압수 수색 현장에서 데리고 온 안봉진과 단 둘이 있다.

난 서류 파일 하나를 들고 30도 정도 삐딱하게 앉았다. 일부러 안봉진을 쳐다보지는 않고 파일 속 서류만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질문을 한다.

“안봉진 전무님, 재무 담당이면 하시는 일이···.”

뻔하지. 그걸 왜 물어보나 싶었는지 안봉진이 눈만 꿈뻑꿈뻑한다.

“매년 사업 보고서나 분기 보고서 작성해서 주주들이 열람할 수 있게 공시하는 것도 재무 담당 임원 책임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업보고서에는 회사의 목적 사업이 뭐다, 그 사업이 어떤 거다 이런 설명도 들어가죠?”

“네, 당연합니다.”

“목적 사업은 정관에 명시돼 있죠? 정관이면 나라로 치면 헌법 같은 거고.”

“네, 그렇습니다.”

“은하 테크론 정관에 명시된 목적 사업은 뭐죠?”

“헛 뭐 그건 워낙 많으니까 일일이 제가 다 기억할 수는 없구요, 검사님.”

안봉진도 대기업 전무쯤 되면 닳고 닳은 사람.

아까는 전격적인 압수 수색때문에 놀라고 당황해서 검찰청 조사실에 끌려오다시피 해서 왔지만, 이제는 정신을 차린 거 같다.

대답하는 폼새가 내 조사에 호락호락 넘어갈 기세는 아니다.

“기억나는 건 뭐죠?”

“허허, 뭐 은하 테크론이니까··· 전자 기기 제조업, 수출 및 판매 사업. 그런 거겠죠.”

“그렇죠. 주로 IT 분야죠.”

“네, 맞습니다.”

“전무님은 회사의 모든 현금 흐름에 대해서 책임이 있으시죠. 재무 담당이시니까.”

“네, 맞습니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내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어 안봉진을 째려봤다.

움찔하는 안봉진.

“물, 거기 물 한 잔 드시고 대답하세요.”

“네? 깜짝이야. 목 마르면 마시겠습니다. 지금은 뭐.”

엇쭈, 이러면서 씩 웃는다.

이제 압수 수색의 충격에서 벗어나 완전히 여유를 찾았다는 뜻이다.

본 게임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무님, 은하 테크론 미주 본사가 시애틀에 있군요.”

“그렇습니다.”

“여기 꽤 오래 계셨네요. 10년 전에 가셨으니··· 8년이나 계셨군요. 귀국하신 지는 2년···”

“거기 미주 본사, 제가 만든 거니까요.”

“오~ 그래요?”

“네. 차장 때 회장님 지시를 직접 받고 가서 회사 설립부터 셋업까지 다 해놓고 왔습니다.”

큰일을 해내고 왔다는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근데 그거 만든 이유는 뭡니까?”

이렇게 질문해놓고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미주 본사를 왜 만들었냐니.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을 공략하고 선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만들었겠지. 안 그렇습니까?”

“네, 그렇죠.”

내 과장된 손사래를 보고 안봉진은 씩 웃는다.

“근데 말이죠··· 전무님. 미국 시장을 공략하고 선진 기술을 습득하려고 만든 해외 법인이···”

안봉진의 목젖이 움직인다. 침을 꼴깍 삼킨다.

“게다가 정관에 기재된 목적 사업이 전자 기기 제조업인 은하 테크론의 해외 법인이···”

안봉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집!”

안봉진의 어깨가 들썩한다.

“집은 왜 샀습니까? 주택 말입니다.”

“주택요?”

“네. 주택요. IT 회사가, 선진 기술 취득한다고 만든 해외 법인이, 해외에서 주택을 왜 사죠? 시애틀 현지에 있는 집 말입니다. 그 집 주소 불러드려요?”

“아~ 그 집요?”

“네. 가격도 5백만 불정도 되던데. 원화로 60억? 현금 흐름을 총책임지시는 분이시니 잘 아시겠네요. 이 집, 왜 샀습니까?”

“헛헛, 그게 말이죠.”

안봉진이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대답도 자신이 있는 거 같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척 기댔다.

“은병진 부회장님께서 미국 출장을 자주 가십니다. 1년에 보통 100일, 어떨 때는 그 이상 나가시니까요. 한 번 가시면 짧게 있으시지 않고 오래··· 최소 2~3주는 계시죠.”

“그러니까 은병진 부회장 전용 숙소다?”

“그렇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자주 출장 가시는데, 그때마다 호텔을 잡으면 그게 더 낭비잖아요. 남 좋은 일 시킬 필요 없죠.”

“미주 본사 사무실에서 가깝기도 하고 말이죠~”

“네! 그렇죠.”

내가 자기 말을 알아들어 주는 것 같아 반가웠는지, 안봉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집이야 사놓으면 회사 자산으로 남는 거니, 투자 차원에서도 나쁠 거 없고요.”

“맞습니다.”

“등기도 회사 이름으로 돼 있고··· 세금도 회사가 내고 있고··· 문제 될 거 없네요. 그죠?”

“네, 그렇습니다.”

“회사 자산을 부회장 전용으로 쓰든, 여러 사람이 쓰든, 그건 다 회사가 정하기 나름이니까 누가 감 놔라 배 놔라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네요. 그죠?”

“맞습니다. 네. 허허허.”

안봉진이 제법 크게 웃는다. 긴장이 완전히 사라졌다.

“네네, 뭐 그럼 집은 그렇다 치고···”

난 파일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쓱 내밀었다.

“이건 왜 사셨어요?”

“네?”

내가 내민 서류는 시애틀 한복판에 있는 ‘웨스턴 에머랄드’라는 이름의 호텔 등기 서류 복사본이다.

안봉진이 깜짝 놀란다.

“웨스턴 에머랄드 호텔. 4성급이니까 준수한 호텔이고··· 아까 이 호텔 웹사이트 가서 보니까 꼭대기에 펜트하우스도 있던데. 위치도 아까 그 집은 시 외곽에 있지만, 이 호텔은 딱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미주 본사에 더 가깝고. 그럼 이 호텔도 있는데 아까 그 집은 왜 또 필요했던 겁니까? 은병진 부회장 출장오면 이 호텔에 묵으면 되지.”

“호텔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거 승인한 적 없습니다. 우리 꺼 맞나요? 이거?”

안봉진이 등기 서류를 끌어당겨 자세히 보는 듯하더니,

“에이~ 검사님. 이 호텔이 어째서 우리 꺼에요? 호텔 소유한 회사 이름이···.”

“해밀턴 엔터프라이즈입니다.”

“해밀··· 뭐요? 이름도 참 외우기 어렵게 만들었네. 여하튼 이 회사는 금시초문···”

“풉!”

안봉진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너무 티가 나서 난 웃음이 나왔다. 보면 안봉진은 이런 거에서는 한 수 아래다. 같은 전무라도 박정철은 안 저랬는데.

“전무님. 이렇게 나오시겠다? 후후.”

난 벌떡 일어나 조사실 밖을 나갔다가, 분홍색 보자기에 싼 서류 더미를 들고 들어왔다.

“갑자기 모시고 온 게 미안해서··· 쉽게 가려했더니···”

들고 온 서류 더미를 책상 위에 턱 놓았다.

“뭐··· 할 수 없지.”

주섬주섬 보자기를 풀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안봉진의 표정이 다시 아까 압수 수색 현장 때처럼 됐다.

자신을 노려보는 나의 눈빛도 눈빛이지만,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이 서류 더미에 더 질려 버린 거 같다.

이럴 때는 서류가 폭탄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탁’

서류 더미 맨 위에 있는 종이 한 장을 안봉진 앞에 일부러 소리 나게 놓았다.

내 속의 최용구가 꿈틀대면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사람 하나 골로 보낸다고 맘먹었으면 끝을 봐야지.’

굳이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자~ 시작해볼까요?”

안봉진을 보고 싱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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