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약속은 안 지킬려고 맺는 것. 믿음은 배신의 시작이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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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오늘로 이곳에 온 게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백영기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난 직후였고, 두 번째는 내가 미국으로 쫓기듯 떠나기 직전이었다.
첫 번째 왔을 때,
백영기는 나를 바로 옆에 앉혀놓고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재훈 대표. 난 말이요, 이 대한민국의 자본 시장을 이 대표가 일하는 미국만큼, 아니 어떤 면에선 미국보다도 더 자유롭고 공정한 선진적인 시장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대통령님.”
“그런데 그럴려면 넘어야 할 장애가 너무 많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개혁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너무 강합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 시장이 후진성을 벗어나지를 못 하는 겁니다. 그 걸림돌을 모두 제거하고 내가 생각하는 개혁을 이루어 내려면 나 역시 그들만큼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이재훈 대표 같은 분께서 나를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개혁의 칼을 쥘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이 대표밖에 없소이다.”
난 백영기의 약속을 믿었고 성심껏 도왔다.
두 번째 왔을 때,
백영기는 나를 멀찍이 앉혀놓고 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재훈, 자네 말이야. 이 나라를 떠나서 숨어서 살면, 뭐 적어도 내 임기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난 자네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네. 약속하네.”
난 이 약속도 믿었고 그의 말대로 미국으로 넘어가 숨어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두 개의 약속 모두 애당초 지켜질 리 없는, 지켜질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순진하게도 두 개의 약속 모두가 지켜질 거라 믿었고, 그 순진한 믿음의 대가로 죽었다.
죽은 다음에야, 최용구의 몸속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믿는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믿음은 배신의 시작이고 그 대가는 참혹하다.
이제 세 번째 청와대 방문.
백영기는 이번엔 죽어서 다시 온 나에게 어떤 약속을 하려 할까? 뭘로 날 믿게 만들려는 걸까?
“하하하, 우리 최용구 검사는 여기 청와대가 처음이신가?”
백영기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각하. 처음입니다.”
난 고개를 45도 이상 숙이면서 대답했다. 위산이 역류해 트림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가만있어봐라. 내가 지금 얼굴을 보니까 확실히 기억이 나네. 응? 나 본 기억이 나. 우리 최용구 검사 별명이··· 후후 미안하요. 독고다이라며? 하하하”
시덥잖은 농담을 걸어오는 폼새하며, 웃어제끼는 표정 하며 어째 이리 달라진 게 없을까.
그래도 달라진 게 하나 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눈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한때는 사슴 눈을 닮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크고 총총했었고, 나도 처음에 그 눈을 보고 이 사람을 믿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웃을 때나 아닐 때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작아졌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겨지는 거라고 어떤 이가 말했다던데, 백영기에게 딱 맞는 말이다.
“모두들 앉지. 오늘 내가 기분이 참 좋구만.”
넓은 원탁에 다섯 명이 둘러앉았다.
백영기 오른쪽에 김필중, 그 옆에 나. 왼쪽엔 오민하 비서실장, 그 옆에 유선진.
유선진과 내가 옆에 앉은 셈이 됐는데, 유선진은 그게 불편한 듯 자주 내게 눈을 흘겨댔다.
“이렇게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쭉 앉아있는데 내가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있겠어? 세종대왕께서도 이 정도로 기분 좋지는 않았을 거야. 김종서, 황희, 맹사성, 장영실? 여기 모인 이 네 명만 못하지 싶은데. 안 그런가? 도승지 대감.”
오민하 비서실장을 돌아보면서 말했는데,
“황송하옵니다. 각하.”
오민하가 정말 조선시대 신하 흉내를 내면서 상체를 숙였다.
“하하하, 우리 오 실장이 이런 유머를 할 때가 다 있네.”
“특별히 준비한 것이옵니다. 각하”
“특별히 준비해? 하하하, 좋아. 나도 오늘 특별한 걸 많이 준비했지. 아마 어느 역대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이런 걸 차려놓고 아랫사람들과 만찬을 하지는 않았을 걸? 뭐 칼국수, 평양냉면 이런 거나 먹었지. 후후”
마침 음식이 들어왔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와인이다.
“아, 이거 줘봐.”
백영기가 와인 병을 양손으로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네 명에게 쭉 보여준다.
“자··· 이거··· 무슨 와인인 줄 아는 사람?”
난 단 번에 알아봤다. 그 와인, 백영기와 나에겐 인연이 깊은 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요, 페트뤼스(Petrus)라는 프랑스 최고급 와인이요.”
백영기가 혼자만 안다는 듯 잔뜩 뻐기면서 말했다.
페트뤼스.
3년 전 백영기가 아직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싱가포르에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난 백영기에게 이 와인을 대접했었다.
“후보님. 페트뤼스 와인입니다.”
“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페트뤼스요?”
“네, 후보님. 존 F 케네디의 와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요.”
“오~ 이걸 마시고 케네디 같은 대통령이 되라는 뜻이오?”
“그런 뜻도 있습니다만,”
“아니 이재훈 대표. 그것보다 더 좋은 뜻이 있습니까?”
“후보님, 아시다시피 보르도의 모든 와인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AOC라고 합니다만···”
“아, 나도 들어 알고 있소. 이 페트뤼스는 그랑 크뤼 와인입니까? 최고급이니까.”
“아닙니다. 후보님. 이 와인에는 등급이 없습니다.”
“없다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고급으로 알고 있는데.”
“후보님. 애초 나폴레옹이 보르도 와인에 등급을 정할 때 페트뤼스는 등급 제도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었다고 하지요.”
“거부를 해요?”
“이 와인은 보르도의 그 어떤 와인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요.”
“아,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겠다라··· 오~”
“제가 이 와인을 후보님께 대접해드리는 이유는 후보님께서도 이 와인과 같이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시라는 의미에서 입니다.”
“아! 그런 큰 뜻이! 이 대표, 내 이 대표의 그 뜻을 꼭 가슴에 새기겠소.”
바로 그 와인을 지금 백영기가 들고 아는 척을 하고 있다.
“후후, 다들 와인을 잘들 모르시나 보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지. 이거 한 번 맛을 들이면 다른 건 와인 같지가 않아. 다 소주야 소주.”
“아~ 그래요? 빨리 한 번 맛보고 싶습니다. 각하.”
오민하가 딸랑거렸다.
“후후, 이 와인은 말이야, 나폴레옹이 보르도 와인의 등급을 정할 때 말이야··· 제도에 포함되는 거 자체를 거부한······.”
백영기가 3년 전 내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읊어대고 있다.
그래, 내가 해준 말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만들어준 돈도 그대로 갖고 있겠지. 조금만 기다려라. 모조리 뺏아주겠다.
“자~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 특별한 와인을 우리 최용구 검사한테 가장 먼저 따라주겠네. 자~ 최 검사. 이리 와. 허허허.”
“네? 아, 각하! 감사합니다.”
나는 놀라는 척을 하며 내 앞에 있는 와인잔을 들고 백영기 옆으로 뛰어갔다.
내게 와인을 따라주면서 백영기가 말했다.
“내가 이 와인을 최 검사한테 가장 먼저 따라주는 이유가 뭔거 같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각하를 모시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허허, 그런 뜻만이 있는 건 아니고. 내 말했잖아. 이 와인은 비교되는 거 자체를 거부한 와인이라고. 우리 최용구 검사도 그런 검사, 다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퀄리티를 가진 그런 검사가 되라는 뜻으로 주는 거야. 알겠어?”
그래, 백영기. 내가 해준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구나.
또 누구에게 이 말을 써먹고 또 써먹었니? 그렇게 써먹어놓고 필요가 없어지면 또 얼마나 쉽게 씹던 껌 뱉듯 뱉아버렸니?
“아, 그렇게 큰 뜻이··· 각하의 이렇게 큰 뜻을 꼭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각하.”
3년 전에 백영기도 이렇게 말했었지. 나도 그대로 답해줬다.
와인을 받아 들고 내 자리로 돌아오는 중에 유선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내게 불편한 시선을 줬던 유선진의 눈빛이 백영기에게서 와인을 받아온 이후 더욱 싸늘해져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술이 몇 순배 돈 후, 백영기가 벌게진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이번 사건, 거 은하 테크론 사건 말이야. 그건 우리나라 재벌들의 거버넌스(Governance). 즉 지배구조··· 응? 그 후진적이고 낡아빠진 지배구조가 저 하이에나 같은 외국 놈들 공격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난 생각해. 김필중 검사장은 어때? 내 말이 맞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각하.”
김필중도 술이 올라서 얼굴이 벌갰지만, 주먹 쥔 양손을 무릎 위에 공손히 얹은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저기 최 검사 생각은 어떤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각하.”
나도 김필중처럼 각을 잡고 말했다.
“은하 그룹 말이야. 최고 최대만을 지향한다는 그 회사가 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듣보잡 미국 놈 펀드에 당하는 거 봐. 기가 차지 않나? 안 그래? 민정?”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각하”
“그렇지. 두 말하면 잔소리지. 하지만 난 세 말 네 말이라도 하겠네. 꺼~억. 은성표 회장, 그 늙은이,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지. 사업은 참 잘하는 사람이지. 그러니 회사를 저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로 일궈냈지. 하지만 말이야. 사업을 잘하는 것과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를 잘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
일장 연설을 하는 백영기. 이것도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저 상태에서 내버려 두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혼자서 떠들어대던 백영기였다.
“왜? 왜 회사를 꼭 아들에게 물려줘야 하느냐 이 말이야. 좋은 회사를 만들었으면 또 그 회사를 상장을 해서 퍼블릭 컴퍼니로 만들었으면 대중에게 돌려줘야지. 안 그런가?”
말하는 중간중간에 듣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려고 하는 버릇까지 그대로다.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줄 거면 상장을 하지 말아야지. 상장을 했다는 의미는 회사가 주주의 것이지 총수의 것이 아니란 말인데. 안 그런가?”
풉! 그럼 백영기 당신은 왜 권력을 이용해 ‘주주의 것’인 상장 회사의 돈을 몰래 빼서 아들에게 주려고 했나?
“그래서 말인데, 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대한민국 재벌의 이 낡아빠진 거버넌스, 이 후진적인 지배 구조를 반드시 꺼~억~ 반드시 개혁해 내겠다고 마음먹었어. 내 임기 후반기의 국정 과제를 재벌 지배구조 개혁으로 삼고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꽂히려 하네. 꺼~억~”
“아! 옳으신 결정을 하셨습니다. 각하.”
김필중이 각을 잡고 말했다.
“최용구 젊은 검사 생각도 같은가?”
“당연합니다. 각하. 좋은 결정이십니다. 각하.”
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진심이었다.
대통령이 재벌을 상대로, 지배구조든 공정거래든 ‘개혁’을 하겠다고 덤벼들 땐 반드시 둘 사이에 충돌이 생기게 되고 양쪽 모두 상처를 입는다.
둘 모두에게 상처가 생긴다는 말은 곧 나한테는 더 많은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난 최용구로서 백영기의 칼이 되어 은하 그룹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고, 상처를 입힌 만큼 백영기의 신임을 얻어 백영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재훈으로서 나는 재벌의 창이 되어 백영기를 찌를 거다. 그건 그대로 백영기에 대한 복수가 된다.
그 과정에서 내 미국 계좌에 잔고가 늘어난다면 그건 보너스.
“하하하, 우리 젊은 최용구 검사까지 좋은 결정이라고 말해주니 내가 힘이 더 생기는 구만. 하하하.”
백영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잠깐 휘청하는 것 같더니 다시 중심을 잡았는데, 나머지 네 명도 모두 반사적으로 벌떡벌떡 일어나 섰다.
백영기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내 손을 콱 잡았다.
“최용구 검사. 모든 일에는 시작이 중요하고, 시작이 잘 돼야 끝이 창대한 것 아니겠나? 내 결심, 재벌의 지배 구조 개혁을 일구겠다는 이 원대한 결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재벌인 은하 그룹에서부터 시작할 거야.”
백영기가 내 손을 김필중에게로 끌어갔다. 세 사람의 손이 맞잡아졌다.
“백영기 정부의 마지막 국정 과제, 은하 그룹의 지배 구조 개혁을 위해 대통령 백영기가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오. 김필중 검사장, 최용구 검사도 이 역사적인 개혁 대장정에 선봉장이 돼주시오. 약속해주시오.”
백영기가 다시 약속을 말했다.
난 이제 안다.
어차피 이곳 청와대에서 맺어진 약속은 지키지 않기 위해 맺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지켜지지 않을 걸 알면서 약속을 한다.
가장 순진하게 그 약속을 믿는 자를 골라내 찍어내기 위해 약속을 한다.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각하!”
나도 약속했다.
“고맙소. 최용구 검사. 하하하”
백영기가 나의 약속을 듣고 웃는다.
자신은 약속을 안 지킬 거 아니까 웃는 것이다.
나 역시 이번엔 약속을 안 지킬 것이고 믿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