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지금은 웃어준다. 하지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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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들어온 뉴습니다.”
H-TV 8시 뉴스 하대석 앵커다.
“은하 테크론이 그룹 지배 구조 개편안의 핵심으로 평가받던 회사 분할 후 은하 로지텍과의 합병 계획을 철회한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관련 소식 경제부 송선미 기자가 심층 취재했습니다. 송 기자!”
“네, 송선미입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은하 테크론이면 우리나라 최대 기업 중의 하나인데··· 회사의 분할과 합병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를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이랬다 저랬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숨겨진 속사정이 있는 겁니까?”
“가장 큰 이유를 꼽는다면 역시 주총 표대결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표대결에서 승산이 없다? 애초 무난히 통과될 거라고 보지 않았던가요?”
“회사 분할 계획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랬습니다만, 미국의 행동주의 펀드인 엑소더스 펀드가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표대결에 나선 이후 기류가 급변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은하 테크론은 외국인 주주들의 지분율이 48%가 넘는데요, 이들 외국인 주주들의 상당수가 엑소더스 펀드 쪽으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외국인들이 왜 그랬던 건가요?"
"아무래도 엑소더스 펀드가 제기한 회사 분할 후 은하 로지텍과의 합병 비율에 대한 문제제기가 외국인 주주들의 마음을 바꾸게 한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뿐만 아니라, 엑소더스 펀드가 은하 테크론에 대해 미국에서 클라스 액션, 이른바 주주 대표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주주 대표 소송이라면 어떤 내용인가요?"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그것도 외국인 주주들을 돌아서게 한 큰 요인이었다는 전언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은하 그룹이 계획을 철회한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총수 일가와 계열사 지분을 합한, 이른바 우호 지분을 모두 합해도 30% 남짓에 불과했던 은하 그룹으로서는 이런 외국인 주주들의 급선회는 주총 표대결에서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아니 국민 연금 지분도 10% 정도 있었잖아요? 총수 우호 지분과 합치면 40%는 되는데 그럼 이번 표대결, 해볼 만한 싸움 아니었을까요?”
“그게 문제였다고 합니다. 국민 연금 측에서 예상외로 이번 회사 분할안에 반대 의견을 낼 것으로 알려지면서 은하 그룹에서는 승산이 없을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고 합니다.”
“국민 연금에서 반대를요? 거기는 왜 또···”
“그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아마도 정부 최고위층의 정무적 판단이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엑소더스 펀드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요. 펀드의 대표가 간단한 입장 표명을 했다구요?”
“네, 엑소더스 펀드의 대표로 있는 그레이엄 슈타인버그 씨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 자본시장에 대해 이해도를 높이게 됐으며, 앞으로도 한국 자본시장과 기업 지배구조의 선진화에 기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음··· 뭐 명분은 거창합니다만··· 이번에 돈도 많이 벌었다면서요?”
“네, 엑소더스 펀드가 은하 테크론의 지분을 취득하기 시작한 시점을 넉넉 잡아 한 달 전으로 본다 해도 최소 100% 정도의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추산하고 있습니다.”
“최소 100%요? 두 배란 말입니까? 한 달도 안 돼서 그 정도를 벌었다구요? 대단하군요.”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의 취약한 지배 구조가 단기 차익을 노리는 해외 자본에게는 그만큼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는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네, 여기까지 듣죠. 경제부 송선미 기자였습니다.”
***
서울 시내 은하 그룹 소유 스카이 호텔의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
대통령 백영기. 양 옆에 비서실장 오민하와 민정 수석 유선진.
은하 그룹 회장 은성표. 그 옆에 회장실 부회장 김상덕.
다섯이 셋 둘 편을 갈라 앉아있다.
“우리 그룹 일로 번잡스럽게 해 드려 송구하게 됐습니다. 각하.”
은성표가 먼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은하 그룹 일은 우리 정부도 돕고 싶었습니다. 아쉽게 됐습니다. 회장님”
백영기가 말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뜻은 ‘내 아들한테 보내기로 한 돈 그거 안 줬으니 우리 정부도 안 해준 거야.’라는 뜻이다.
“외국인 주주들이 그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각하.”
은성표가 말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뜻은 ‘니 아들한테 돈 주려다가 더 독한 놈들한테 몇 배로 뜯기게 생겼는데 어떻게 주냐?’라는 뜻이다.
“일이 이렇게 돼버리는 바람에, 미국에 있는 각하 둘째 아드님께서 곤란하게 됐습니다.”
비서실장 오민하가 눈을 부라리고 말했다.
지금부터는 아랫것들끼리의 싸움 시간.
윗사람에게 충성심과 전투력을 보여야 하는 시간이므로 점잖은 가식 따위는 내려놓아야 하는 타임이다.
“시장의 의사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 사업하는 사람들은 시장의 흐름대로 가야 합니다.”
김상덕이 나섰다.
“시장의 의사요? 참나, 재벌이 언제부터 시장 친화적이었다고 이러십니까?”
유선진이 김상덕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정부는 무시하고 시장은 존중해야 된다 이겁니까?”
오민하가 유선진과 경쟁하듯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오 실장님. 무슨 말씀을 그리 심하게 하십니까? 저희가 언제 정부를 무시한다고···”
김상덕이 항변을 하려했는데,
“콜록콜록”
백영기가 갑자기 기침을 해대는 바람에 김상덕이 말을 멈춰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은성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는데, 대답은 오민하가 했다.
“원래 기관지가 안 좋으십니다. 게다가 이 일로 걱정이 많으셔서 더 악화된 거죠.”
“콜록콜록”
백영기는 아예 상체를 90도 정도 틀어 나머지 세 명을 외면했다.
“흥! ND 그룹 같았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민하가 은성표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ND 그룹은 은하 그룹의 반세기 넘는 경쟁사인 데다가, 백영기의 큰아들 백승철이 법무팀장으로 있는 회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민하의 이 말은 은성표를 감정적으로 자극하면서도, 백영기에게 딸랑거리기 위한 말이다.
“저희 은하 그룹은 아드님이 계신 캘리포니아에 계열사 법인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지시를 해서 아드님께서 지내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콜록콜록··· 콜록콜록···”
백영기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바람에 은성표는 말을 멈춰야 했다.
백영기는 급기야 입을 손수건으로 막고 일어섰다. 손을 들어 좌우로 저었는데, 이 뜻을 알아먹은 오민하가 백영기를 부축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차 준비시켜. 떠나신다. 지금 바로.”
오민하가 손에 들고 있던 소형 워키토키에다 대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백영기와 오민하가 탔는데, 은성표도 따라서 타려고 하자 백영기가 손을 흔들어 타지 말라는 신호를 했다.
은성표는 움찔하며 문 앞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위로 치켜뜬 눈으로 은성표를 노려보는 백영기의 눈매가 매서웠다.
은성표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보다는 백영기의 눈빛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백영기 일행이 내려간 후, 은성표가 숙였던 상체를 서서히 들면서 옆에 서 있는 김상덕에게 물었다.
“이번 일··· 청와대 비서관 놈하고 같이 기술 유출 사건 꾸민 놈 어떻게 됐어?”
“아··· 박정철 전무라고···”
“이름 안 물었어. 어떻게 처리했어?”
“근신 중···”
“근신?”
“네. 바로 해직 조치해서 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직 조치? 흥! 아냐 다시 들여와. 내 바로 옆에 배치해.”
“네?”
김상덕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저 백영기 자식이 하고 가는 꼴 못 봤나? 저거 선전 포고야. 우리 은하 그룹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 나 여기까지 오면서 저런 놈 한두 번 봤겠나? 권력을 쥔 놈들이란 좌든 우든 빨갱이든 군바리든 다 똑같았어. 전쟁을 앞두고 장수를 짜를 수는 없지. 박정철이 한 번 실수했던 놈이야. 오히려 그런 놈을 데려다 전쟁을 시켜야 더 목숨 걸고 싸우는 법이지. 데리고 와. 내 옆에 딱 둬. 박정철이 그놈, 내가 요긴하게 쓸 거야.”
이미 닫힌 지 오래인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보는 은성표의 눈빛. 김상덕은 소름이 끼쳤다.
***
청와대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
백영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침을 멈췄다.
“은성표 저 노인 그냥 둬선 안 되겠어.”
“맞습니다. 각하.”
오민하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까 나한테 하는 거 봤지? 시장 어쩌고 하는 거.”
“고약한 노인네입니다. 각하”
조수석에 앉은 유선진이 뒤를 돌아보면서 질세라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왔다고 씨부리는 거야. 감히 최고 권력자인 내 앞에서.”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각하.”
오민하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저 노인 끌어내려야겠어. 내 임기 끝나기 전에. 저 노인 아들놈 은병진이도 지 애비 회사 물려받지 못하게 만들어야겠어.”
“그러시죠. 각하. 각하께서는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저 유선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선진이 완전히 뒤로 돌린 상체를 백영기에게 꾸뻑 숙이면서 말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빌면서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우리 부자 회사 물려주고 물려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꼬라지를 내 꼭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어.”
충성 경쟁을 하던 오민하와 유선진도 여기서는 더 뭐라 말하지 못했다.
백영기가 대통령이 된 후 이런 살기 넘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이 정도에서 막은 것도 김필중이라 했나?”
“네, 그렇습니다.”
“김필중이 밑에는 누가 했어? 내가 아는 놈이야?”
“최용구라고··· 기억하실는지요.”
“최용구? 어··· 거 지난번 정수명이하고 그 꼬붕들도 한방에 날려버렸던 그 친구 아냐?”
“네, 맞습니다. 각하.”
최용구라는 이름은 백영기에게 벌써 세 번째다.
정치 자금 대주고 부총리까지 시켜놨더니 자기 정치나 하면서 기어오르려 했던 정수명이를 날린 것도 최용구.
이번에 아들 녀석한테 어설프게 돈 보내려다가 정권을 휘청거리게 할 뻔한 사건을 이 정도에서 막은 것도 최용구.
그리고 훨씬 이전에 이재훈이를 미국까지 날아가 처리하고 온 놈도 최용구.
어째 아주 요긴할 때마다 탁탁 등장하는 이름 석 자다.
“최용구라는 그 친구 호감이 가. 나 얼굴 한 번 봤으면 좋겠어. 민정! 김필중이한테 연락해서 최용구하고 둘이 청와대 들어오라고 해. 내일 당장 보자고 해.”
“네, 각하.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은 저리 하지만 유선진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김필중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경쟁심과 경계심을 감추지를 못한다.
저렇게 속마음을 감추지 못해서 어떻게 민정 수석을 하는지 백영기는 유선진의 저런 모습이 영 맘에 안 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재밌기도 하다.
모름지기 저 유선진이나 김필중 같은 아랫것들은 서로 경계하면서 싸우게 만들어야 된다. 그래야 윗사람에게 기어오르지 않고 서로 경쟁에서 이겨보겠다고 윗사람이 시킨 일에 더 목숨 걸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
“오! 자네가 최용구 검사인가? 반갑네.”
김필중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왔다.
백영기가 나를 반긴다.
이게 얼마 만인가. 백영기의 저 구역질 나는 상판때기를 보는 게.
작고 옆으로 찢어진 눈, 앞으로 툭 튀어나온 턱, 양 옆으로 벗겨진 M자 이마.
백영기 당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악수를 하자고 내민 백영기의 손을 잡았는데 바로 잡아당겨 모가지를 비틀고 싶었다.
“내가 우리 최용구 검사한테 빚을 많이 진 거 같아. 허허허”
빚을 많이 졌다고?
후후, 잘 알고 계시는 군. 맞다. 목숨 빚을 졌으니 빚을 보통 많이 진 게 아니지.
그게 바로 내가 백영기의 모가지를 지금 비틀지 않는 이유다.
지금 비틀어 버리면 그 많은 빚을 조금밖에 못 받는 거니까.
백영기.
너의 재산. 너의 권력. 너의 측근. 너의 지지. 너의 평판.
니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둘씩 차근차근 빼앗아주겠다.
그러니 지금은···
웃어준다.
난 백영기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90도 절을 하면서 말했다.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