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주식을 한 회사에 몰아준다고? 이 무슨 해괴한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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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밤 11시가 넘은 시간, 은하 그룹 회장 은성표의 삼청동 자택.
그룹 회장실 김상덕 부회장이 은성표의 호출을 받아서 왔다.
“어, 김 부회장.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오라고 자꾸 불러대서 미안하요.”
“별말씀을요.”
김상덕은 은하 그룹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올해로 40년째다. 임원이 되면서 20년 동안 회장실에서만 있었고, 실장이 돼서 은성표를 측근에서 보좌한지는 10년째.
은성표가 밤늦은 시간에 불러대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회장실 근무 20년 동안 은성표가 밤 말고 낮에 불러낸 적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사람들 다 깨 있는 낮 시간엔 집안 거실조차도 나가지 않는 은성표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러더구만. 밤이 스승이라고. 허허허.”
저런 말을 하는 걸로 봐서 회장도 이제 정말 늙었구나 싶었다. 밤에 불러서 미안하다는 말도 2~3년 전부터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새벽 3시 4시라도 불러내서 호통치기 일쑤였다.
“우리 김 부회장도 이렇게 보니 많이 늙었구만.”
은성표가 요즘 들어 부쩍 ‘늙음’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38년생이니 은성표도 이제 80. 아무리 좋은 것만 먹고 좋은 데만 다니는 재벌 회장이라 해도 나이 앞에는 장사 없다.
“맡겨 놓으신 일에 대해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나 보군요. 회장님.”
김상덕이 말했다. 이 밤 중에 불러댄 것은 그거 말고 이유가 없다.
“그렇지. 마음이··· 대통령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
“그 뒤에 별 다른 움직임은 없었나? 저기서?”
은성표가 청와대가 있는 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국민 연금 쪽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보고를 드리려고 했었습니다만···”
“어, 그래? 뭐라고?”
“부회장님을 직접 만나자고...”
여기서 부회장이란 은성표의 아들 은병진을 말한다. 그룹의 후계자.
“뭐야? 누가?”
“기금운용본부장이···”
은성표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이야기는 잘 됐다던가?”
“심기가 많이 불편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음···”
깊은 밤 두 노인의 대화는 두 시간 정도 더 이어졌다.
김상덕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에야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 뒤에도 한동안 은성표는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
“안녕하십니까? 최용구 검사님”
팔로 알토 출장에서 돌아와 검찰청으로 출근하는 나한테 어떤 남자가 접근해 인사를 한다.
지난번에 출근하다가 정수명 지지자들에게 계란을 맞은 이후로 이런 접근에는 경계심이 더 든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검사님, 요 며칠 안 보이시더라구요. 어디 좋은 데 휴가라도 갔다 오셨습니까? 아니면 어디 중요한 업무 상 비밀회의라도 참여하고 오셨습니까?”
빈정거리는 말투에 건들거리는 자세. 기분이 좋지 않다. 무시하고 더 빠르게 걸었다.
“아이고 이거, 왜 이렇게 빨리 걸으세요? 최용구 검사님, 저 정말 모르세요? 그럴 리 없으실 텐데··· 아니면 지금 저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이거 섭섭한데요? 이러시면 안 되는데···.”
시건방지게 들이대는 폼새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냥 늘어뜨리면 코까지 덮을 만큼 긴 머리를 중간 가르마를 타서 양 옆으로 빗어 내린 헤어 스타일하며, 색 바랜 청바지 위에 목선이 축 늘어진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베이지색 마 소재 자켓을 걸쳐 입었다.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양아치 새끼야?’
난 걷는 속도를 더 냈다.
‘검찰청 건물에 들어서면 출입문에서 제지당하겠지’
앗, 그런데 이게 웬일?
이 자식이 출입증을 턱 내밀고 건물로 따라 들어온다. 흘끗 보니 기자증이다.
‘기레기 새끼야?’
기자실에 죽치고 있는 기자들 웬만하면 다 아는데 이 자는 처음 본다.
흠칫 놀라는 나를 보고 눈치를 챘는지 씨익 웃으면서 말한다.
“최용구 검사님. 저 늘봄 신문 조준호 기잡니다. 조준호. 저 모르세요?”
조. 준. 호.
이름 석 자를 듣자 난 가던 길을 멈춰 섰다.
살인 교사 또는 모의 혐의로 정수명과 함께 잡아 처넣었어야 할 놈이었다.
순진한 천우민 교수가 몽땅 뒤집어써주는 바람에 검찰청 조사실 근처에도 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여전히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면서 기사를 써제끼고 있다. 물론 난 이놈이 쓰는 기사인지 찌라시인지 한 글자도 안 보지만.
“처음 보네요. 조준호 기자. 진작에 한 번 봤어야 했는데 말이죠.”
행간에 숨겨진 내 말의 뜻을 이 기레기 새끼, 알아들었을까.
“하하하, 인육 먹은 조폭도 시원하게 때려잡으시고, 차기 대선 유력 주자도 단 칼에 집어넣으시고 수백만 팔로워 가진 인플루엔서 교수도 깜방에 처넣으신 분 답게 역시 눈빛이 장난이 아니시군요.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 레이저에 제 얼굴이 다 타버리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태워버리고 싶다.
"나한테 무슨 볼 일 있습니까?”
‘너 같은 놈한테 취미 없으니까 꺼져’라고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둘러서 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조준호는 짝다리를 짚고 나를 올려다보면서 계속 빈정거렸다.
“아, 지금이야 뭐 볼 일 없죠. 앞으로는 마~않이 생기겠지만. 음··· 안 생겨도 생기게 해야겠죠? 제가 검사님한테 용건이 많거든요. 지난번 일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 이번에 제가 수원지검 출입 기자로 오게 됐거든요. 대한민국 최고의 검찰청이니까 당연히 제가 출입을 해야겠죠? 하하하. 오자마자 우리 최용구 검사님을 문안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는데 아쉽게도 안 계시···”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난 짝다리를 짚고 건들거리는 조준호의 말을 더 듣기 싫었다. 중간에 끊고 돌아섰다.
뒤통수에 조준호가 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걸으면서 난 씩 웃음이 나왔다.
‘조준호, 나한테 이를 갈고 있겠지. 많이 갈아봐. 정의의 사도.’
***
“검사님 오셨습니까?”
하루밖에 안 가 있었던 출장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사람인양 정화용이 나를 반긴다.
“잘 계셨어요? 가기 전에 부탁드린 은하 그룹 지배구조 있잖습니까? 그거 준비됐습니까?”
“네, 그건 일찌감치 준비돼 있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계장님. 다른 것도 좀 준비해주세요. 청와대 직원들 있죠? 높은 분들 말고. 비서관 급들... 사진 하고 명단 좀 준비해주세요.”
“청와대요?”
“네, 제가 미국에서 누구를 봤는데 혹시나 청와대 분인가 해서요.”
“청와대 사람을 미국에서요? 음··· 네 뭐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죠. 전산망 들어가면 되니까...”
정화용이 책상으로 돌아가서 주섬주섬 자료를 챙기고 PC에 접속해 문서 몇 장을 프린트해서 들고 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정화용의 작업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건 말씀하신 청와대 비서관들 사진 하고 명단이구요.”
난 정화용이 건넨 문서를 뺏듯이 받아 훑었다.
짧은 시간에 정리한 건데도 빈틈이 없고 폰트나 레이아웃도 딱 보기 좋게 뽑아왔다.
정화용은 큰 눈과 통통한 볼살 때문에 좀 헐렁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꼼꼼한 데다 순발력도 남 달라서 최용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걸 잡아주는 역할을 꽤 잘했었다.
그런데도 최용구는 정화용이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더 세게 들들 볶아댔었다.
“사람은 칭찬을 하면 반드시 선을 넘고 기어오르게 돼 있어. 그러니까 일을 잘할수록 칭찬보다는 조져야 돼.”
평소 최용구가 동료 검사들에게 정화용에 대해서 했던 말이다.
내가 최용구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변해버린 내 스타일에 처음엔 많이 헷갈리는 것 같더니 금세 적응한다. 사람 착하게 변했다 정도로 생각하겠지.
“이건 은하 그룹 지배구조 설명인데 좀 복잡하니까 제가 화이트보드에 다이어그램을 그려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검사님.”
“네, 그러시죠.”
정화용의 은하 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난 간간히 청와대 비서관들 명단 문서도 계속 훑었다. 분명 에어터치에서 봤던 그 한국 사람이 이 명단에 있을 것 같았다.
“검사님, 은하 그룹 핵심 계열사는 아시다시피 바로 이 은하 테크론과 은하 모바일, 은하 텔레콤. 세 회사입니다.”
정화용이 화이트보드에 세 회사 이름을 쓰고 밑줄을 쫙 긋고 동그라미까지 슥슥 쳤다.
“이 세 회사는 잘 보세요. 검사님. 우선 테크론이 모바일을 모바일이 텔레콤을 텔레콤이 다시 테크론을 지배하는··· 이른바···.”
정화용의 동그라미가 더 커지고 복잡해졌다.
“순환 출자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서 핵심 회사가 바로 은하 테크론이죠.”
“은성표 회장 아들 은병진은 저 세 핵심 회사의 지분이 얼마나 됩니까?”
“은병진요? 풉! 한 장도 없어요.”
“한 장도 없어요?”
“네. 총수 아들 은병진은 저 핵심 3개 계열사 주식은 없구요. 대신 은하 로지텍이라는 회사의 지분을 30프로 넘게 갖고 있습니다. 이 회사 아시죠?”
“로지텍이면 핸드폰 애프터서비스하고 물류 사업하는 회사 아닙니까?”
“맞아요. 근데요, 은하 그룹이 계열사가 몇 갭니까? 수십 개가 넘잖아요? 그 많은 계열사들이 총동원돼서 이 은하 로지텍에 일감을 마구마구 몰아주는 바람에 엄청 커졌죠.”
“재벌들 다 그러듯이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젠 일감만 몰아주는 게 아니라,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은하 테크론의 주식을 이 은하 로지텍에 몰아주려고 하는 겁니다.”
“주식을 몰아준다?”
난 피식 웃어버렸다.
같은 계열사라고 일감을 몰아준다는 것도 한심한 일인데, 엄연히 주주가 있는 주식회사들이 자기 회사의 주식을 총수 아들이라는 이상한 직함의 사람을 위해 한 회사에 몰아준다니.
미국 월가에서 금융으로 잔뼈가 굵은 내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 생각해봐도 엄연한 시장 경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다.
하기사 대통령과 검사에게 더 심한 일도 당했던 내가 이 정도 일을 갖고 말이 되냐 안 되냐를 따진다는 것도 참 말이 안 되는 일 같기도 하다.
“엇?”
정화용이 준 청와대 비서관들 명단에서 엊그제 에어터치에서 봤던 사람을 찾았다. 역시나 청와대 사람이었던 거다.
“왜 그러세요? 검사님?”
“계장님. 혹시 이 사람 아시는 분이세요? 이름이··· 전태기라는 분.”
정화용이 내 검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진을 보더니,
“아~ 이분. 당연히 알죠.”
“아, 그래요?”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한 때 전국을 호령했던 대학 운동권의 탑 중의 탑 출신이고···”
내가 흡수한 최용구의 기억에는 없는 걸 보니 최용구는 운동권에는 관심이 없었나보다.
“게다가 우리 이철규 부장님 동기세요···.”
“이철규 부장님 동기요?”
“네 서울대 법학과 91학번 동기···.”
이때, 문이 덜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 쪽을 향해 앉아 있던 내가 들어오는 사람을 먼저 보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조사부장 이철규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내가 인사를 하자, 정화용도 뒤로 돌아보고 놀래서 바로 차렷 자세가 됐다.
“최용구 일하고 있었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놀랬지? 워낙 바쁘신 몸이라 이렇게 안 하면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겠더라구.”
그런데 이철규 뒤에 따라 들어온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처음 보지? 인사해. 은하 테크론 인사팀장 박정철 전무.”
눈치 빠른 정화용, 이철규 부장의 입에서 ‘은하’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화이트 보드에 써놨던 은하 그룹 지배구조 그림과 회사 이름을 싹싹 밀어 지웠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은하 테크론 박정철 전무라고 합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최용구입니다.”
박정철의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멀거리는 지렁이나 물컹대는 아메바를 잡은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환이 형, 그런 사람 아니에요. 검사님, 수사 잘해주세요’
스탠포드 대학에서 만났던 봉수용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정철, 이 인간 뭐지? 그리고 이 느낌은......’
순간 내가 흡수한 최용구의 기억이 신호를 보내왔다.
인육 먹은 조폭 손을 처음 잡았을 때 느낌이 딱 이랬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