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니가 들은 건 모두 거짓, 내가 얻은 건 모두 정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꿈과 낭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 대한항공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나는 바로 스탠포드 대학교로 갔다.
심덕환의 박사 과정 후배이자, 스탠포드 대학 교수인 봉수용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스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덕환이 형에게 그런 일이. 덕환이 형은 돈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봉수용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덕환이 형 인텔 다닐 때 연봉이 5백만 불이 넘었어요. 돈은 벌만큼 번 사람이란 말이에요. 근데 돈 때문에 기술을 빼돌렸다? 그것도 중국 회사에? 말도 안 돼요.”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거 아닐까요?”
내 말에 봉수용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아, 봉 교수님, 이해하세요. 수사를 하려면 뭐든 의심을 해야 하니까요.”
“이해합니다. 그런데 검사님, 덕환이 형 아버님이 외교관이었던 거 아시죠?”
“네, 압니다.”
“덕환이 형, 아버님 돌아가시고 많이 괴로워했었어요. 아버님께서 살아생전에 항상 말씀하셨대요. 국가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그런 사람이 아직도 있었나.
“덕환이 형, 아직도 천안함, 세월호 유족들, 그때 구조하러 바다 들어갔다가 희생되신 UDT 대원, 잠수부 후원하고 있어요. 덕환이 형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중국에 돈 받고 기술을 팔아요? 말도 안 돼요.”
난 좀 놀랐다. 이 말이 정말이라면 심덕환은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인텔 그만두고 은하 테크론 간 것도 순전히 애국심 때문이었어요.”
“애국심?”
“은하 테크론 가게 됐다고 좋아서 펄펄 뛰던 거 아직도 눈에 선해요. 연봉은 인텔에서 받던 거에 반도 안 됐는데. 그뿐인 줄 아세요? 인텔 경쟁사인 엔비디아는 인텔보다 두 배 더 준다고 했었어요. 엔비디아 갔으면 따따블이었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한국 가더니··· 이런 꼴이나 당하고. 돈 때문에 기술 빼돌렸다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이나 받고. 에이 진짜.···”
봉수용은 마치 자기 일인 듯 억울해했다.
“인텔에서 어떻게 했길래 연봉이 그 정도나 됐어요?”
“독보적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여기 스탠포드나 실리콘 밸리에서 반도체 좀 아는 사람이면 심덕환이라고 하면 엄지 척할 걸요?”
“은하 테크론 동료나 부하 직원은 다르게 말하던데요?”
“후후, 동료나 부하들은 엄청 시달렸을 거예요. 눈에 선해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거든요. 만족이란 게 없어요. 워커홀릭이기도 하구요.”
난 심덕환이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했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이 생각났다.
“중국 헤드헌터를 만나기도 했었다던데. 이직하려고 링크드인에 프로필도 올리구요.”
“풉! 검사님, 여기 한 번 보세요.”
봉수용이 캠퍼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서양 사람 보여요? 여기 스탠포드는 아시안이 주류예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캠퍼스에 머리 노랗고 코 큰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덕환이 형은 이런 데서 학부부터 박사까지 거의 10년을 지냈어요. 그럼 덕환이 형 친구가 어떤 사람이겠어요?”
중국 사람이거나 중국계 미국인이겠지. 그 사람들은 중국 회사에 있을 확률이 높고.
“이직하려고 링크드인(LinkedIn)했다는 말도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저 여기 교수고 직장을 옮길 생각 없어요. 그래도 링크드인 해요. 왜 하겠어요? 이직이 아니라, 내가 어디서 무슨 일 한다는 거 친구한테 알리기 위해서예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은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맞는 말이다. 나도 이재훈 일 때 링크드인 했었다. 난 내 투자 회사를 갖고 있었으니 직장 옮길 일이 생길 수조차 없었는데도 그랬다.
“검사님. 수사 잘해주세요. 우리 덕환이 형 절대 그럴 사람 아니에요. 제가 웬만해선 검사나 기자 만나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아서...”
“봉수용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혹시나 다음에 또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덕환이 형 관련된 거라면 얼마든지요.”
***
스탠포드에서 봉수용을 만난 뒤 나는 바로 멘로파크에 있는 에어터치로 갔다.
은하 테크론이 최근에 기술 라이센스 계약을 맺은 회사.
내가 죽기 전에 백영기 둘째 아들 백승환에게 만들어준 회사.
“어서 오십시오. 에어터치(AirTouch)의 CFO 세르게이라고 합니다.”
배 둘레가 키만큼은 될 것 같은 백인 남자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제네시스 캐피탈의 스티브 리입니다.”
나는 스티브 리라고 소개했다. 직업도 벤처 캐피탈 회사 대표라고 속였다.
대한민국 검사가 만나 달라고 하면 세르게이가 만나줄 리 만무하니까.
사실 100프로 속였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죽지 않았다면, 최용구의 몸속에 빙의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그게 내 직업일 테니까. 제네시스 캐피탈은 내가 만들어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 오랫동안 운용했던 벤처투자 회사다.
난 이번에도 내가 회원으로 있는 투자자 비공개 커뮤니티 Cash Nexus를 써먹었다.
회사 방문 및 CFO 미팅 요청을 할 때 그 커뮤니티에 레퍼런스 체크를 하라고 했다.
‘와튼 스쿨 경제학 박사, JP Morgan 펀드 매니저,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 캐피탈인 제네시스 캐피탈 설립 및 운영’
이런 레퍼런스를 받고 세르게이가 미팅 승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세르게이도 레퍼런스 체크를 해 준 투자자 커뮤니티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고···.
“좀 늦었습니다. 차가 막혀서요.”
사실 차 막히지 않았다. 이런 미팅은 보통 10분 정도 상대를 기다리게 해야 한다. 돈을 가진 벤처 캐피탈이 스타트업에게는 갑 중의 갑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에어터치 같은 스타트업에게는 제네시스 캐피탈 같은 회사의 투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회사 이름이 좋군요. 에어터치라···”
“에어는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죠.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바가 바로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는 기술을 가지자는 의미에서 입니다. CEO께서 지은신 걸로 압니다.”
풉!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 회사 이름 내가 지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날 공기가 좋길래 그렇게 지은 것일 뿐이다.
“마침 저기 지나가시는군요. 빨간색 상의를 입으신 분. CEO 제프리 백”
세르게이가 앉아있는 회의실 옆 복도로 두 명의 남자가 지나가는 게 창문을 통해 보였다.
제프리 백.
작은 눈, 조금 벗겨진 이마, 앞으로 조금 튀어나온 윗입술에 짙은 눈썹.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저렇게 닮을 수가.
백승환을 잠시라도 보니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테이블 아래 내 두 손은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제프리 백도 한국계인데, 스티브도 한국계신가요?”
“아뇨, 저는 중국계입니다.”
백승환과 조금이라도 엮이는 게 싫어서 그냥 둘러댔다. 중국계 중에도 ‘Lee’ 성을 가진 사람은 많으니까.
근데 백승환 뒤를 따라가는 남자에게 시선이 갔다.
제프리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그 남자는, 제프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연신 굽신거리고 비굴한 웃음 지어댔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나 이재훈이 아니라 최용구의 기억 속에서 그랬다.
“뒤에 있는 저 사람은 누굽니까?”
“잘 모릅니다. 한국에서 온 손님인데...”
한국에서 왔는데 백승환에게 저렇게 굽신거린다? 게다가 최용구의 기억에 낯이 익다면?
청와대나 검찰 쪽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회사 매출 구조는 어떻습니까?”
“우리 회사는 로열티 매출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재산권)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회사의 성장 드라이버입니다.”
“회사의 자본금은 주로 IP를 확보하는데 쓰이겠군요.”
“그렇습니다.”
“IP는 직접 개발하지는 않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성과도 불확실할 테니.”
“잘 아시는군요. 미스터 리.”
“그럼 IP를 사겠군요. 쇼핑.”
“그래서 여기 실리콘 밸리의 중심부인 멘로 파크가 최적의 위치인 셈입니다.”
“IP 쇼핑 리스트는 누가 어떻게 만듭니까?”
“전사 회의를 통해···”
“누가 참여합니까? 그 회의.”
“CEO와 저···
“CEO는 전공이 뭐죠?”
다 알면서 물었다. 질문 공세에서 빠지면 안 되는 항목이니까.
“엔지니어는 아니십니다.”
“세르게이 씨는요?”
“회계사 출신입니다.”
“IP 쇼핑을 하려면 테크놀로지 흐름이나 시장 상황을 잘 아는 분을 경영진에 합류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코어 컴피턴시(Core Competency)인 거 같은데···”
“한 분 영입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CTO를 해 주실 분. 스탠포드···”
“CTO나 CEO는 포지티브 사이드, 즉 매출을 맡아야 하고, 반대로 매출이 안 생기는 IP를 떨어내는 네거티브 사이드도 중요한데. 그건 CFO이신 세르게이 씨의 R&R(Role and Responsibility) 일 텐데···”
“그··· 렇죠.”
“CFO로서 악성 자산에 대한 롸이트 오프 (Write-off: 자산 처분) 원칙은 뭡니까?”
내 속사포 질문 공세가 계속되자 세르게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깐만요. 그런데 미스터 리”
“그냥 스티브라고 부르시죠. 그게 나도 편합니다.”
“아, 예. 스티브.”
세르게이가 의자를 바짝 앞으로 당겨 앉았다.
“사실 우리 회사는 IP를 통한 로열티 매출 외에 더 큰 현금 창출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걸려들었다.
나의 속사포 질문 공세는 이걸 끌어내기 위한 거였다. 사람은 수세에 몰리면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무리수를 두게 되는 법이니까.
나는 관심이 가는 듯 팔짱을 끼고 상체를 뒤로 살짝 젖혔다.
“우리는 IP를 합법적으로 사용하고 로열티를 내는 회사보다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계약을 위반하고 벌금을 내는 회사로부터 더 큰···”
“강력한 법률 소송팀이 필요하겠군요.”
일부러 말을 끊고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잘난 척이 효과가 크다.
“하하. 그렇습니다. 이렇게 훌쩍 건너뛰어 다 알아들으시니 제가 말하기도 편하군요.”
잘난 척의 효과가 세르게이에겐 특히 더 잘 먹히는 거 같다.
“뭔가 큰 걸 준비 중인 게 있습니까? 세르게이 씨의 표정을 보니 뭔가 있는 거 같은데··· 하하, 아닙니다. 공개하실 수 없는 거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건 말하라고 보채는 것보다 더 강력한 전술이다.
세르게이가 더 바짝 다가와 테이블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지금 우리 회사에 최소 3천만 불 규모의 캐쉬인(Cash-In)이 예상되는 건수가 생길 거 같습니다. 거의 90프로 확률입니다.”
“3천만 불요?”
깜짝 놀라는 척했다.
“최소가 그 정도입니다. 더 될 수도 있습니다.”
세르게이 얼굴에 웃음끼가 만연했는데 음흉해 보였다.
“그래요? 어떤 건인데 그런 거액이...”
“우리와 IP 라이센스 계약을 최근 체결한 회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우리 기술을 다른 회사에 무단으로 유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출?”
“어느 회사인지 지금 단계에서 밝힐 수는 없고요. 지금 당국에서 수사 중입니다. 유출이 확인되면 최소 3천만 불 규모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계약이 돼 있습니다.”
심덕환 - 기술 유출 - 3천만 불 - 대통령 둘째 아들 백승환.
이 사건의 그림이 머릿속에 쫙 그려졌다.
“구미가 당기는데요? 3천만 불 규모 청구권이 행사돼서 돈이 들어오면 대박이겠는데?”
난 조금 과장되게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그렇죠.”
“우리 제네시스가 돈을 넣는다면 그 3천만 불 중에 얼마를 우리에게 배당할 겁니까?”
“그건 제네시스에서 얼마를 투자하실 건지··· 에 따라···”
세르게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는데, 나도 비슷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그건 에어터치가 얼마를 투자받을 건지··· 에 따라···”
“하하하, 그렇군요.”
“제네시스는 최대 2백만 불까지 투자 의향이 있습니다. 에어터치 CEO께서 어느 정도까지 지분 희석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신지···”
최대 2백만 불이라는 말에 세르게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 정도면 세르게이도 들을 말 다 들었고 나도 얻을 건 다 얻었다.
단, 세르게이가 들은 건 모두 거짓이고 내가 얻은 건 모두 정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유익한 미팅이었습니다.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도록 하죠.”
난 중국식으로 두 손을 한 데 모으고 세르게이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제네시스와 좋은 파트너십을 맺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세르게이도 환하게 웃으면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중국식으로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