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나만의 조어도
2년 후 여름.
식재료를 점검하던 사심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가 있어?”
“아무래도 돌문어가 좀 모자랄 것 같아서요.”
“오늘 메인은 농어 스테이크라고 하지 않았어?”
“전채 요리로 문어 초회가 들어가요.”
“음…….”
고민하는 척 생색을 내긴 했지만, 내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섬 안에 마트는 없지만, 보트를 타고 근처 바다에 나가 꺼내 오면 그만이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
“고마워요. 손님들은 12시에 온다고 했죠?”
“응. 점심 먹고 바로 돌아간다는 거 알고 있지?”
“그럼요.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빨리 와야 해요. 아! 베타가 아까부터 안 보여요. 밖에 한번 찾아봐 줄래요?”
“알았어. 이 녀석은 또 어디 갔지?”
평일에만 여는 식당인지라, 주말인 오늘은 원래 손님을 받지 않는 날이다.
사심희가 아침부터 수선을 떠는 이유는 오늘이 분기마다 어반자 그룹의 사장단 회의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베타는 식당 앞마당에서 풀숲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남해에 온 뒤로 베타는 시도 때도 없이 날벌레나 땅속의 작은 벌레를 괴롭히는 재미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베타 너도 오랜만에 콧바람 좀 쐬자.”
“왜~~~~~ 용!”
나는 베타를 번쩍 안아 들고 함께 보트에 올랐다.
수년 전 멤버들과 돌문어를 퍼 담던 섬의 왼쪽 부근의 포인트가 목적지였다.
역시 쑥섬의 바다는 나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여름을 맞아 몸집을 키우기 시작한 돌문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문어들아! 오늘은 두 마리만 함께 가 줘야겠다.”
끈적한 손맛을 만끽할 틈도 없이, 5분 만에 두 마리를 잡았다. 다시 바다를 달려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낯익은 보트 한 척이 정박 중이었다.
얼굴이 시커먼 선장이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침부터 어디 다녀오십니까? ”
“공 선장님! 문어 몇 마리 꺼내 오는 중입니다. 하하.”
공태운 선장.
그는 지족항의 낚싯배를 정리하고, 쑥섬으로 찾아오는 낚시객들을 운송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쑥섬의 피싱 피어는 무료 개방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섬까지의 왕복 배편은 공 선장이 별도로 소정의 운임을 받고 있었다.
낚시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덕택에 그는 예전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으며, 나름의 보답으로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무료로 태워 주었다.
보트 안에는 낚시를 즐기러 온 서너 명의 손님들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이 내게 알은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우럭 님!”
“낚시 오셨군요. 재미있게 즐기고 계세요. 이따가 저도 한 바퀴 둘러보러 갈 겁니다.”
피싱 피어로 진입하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공 선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좀 이따가 서울 손님들 오시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럼요. 안 그래도 좀 전에 미조항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잘 좀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없다.
나는 물칸을 더듬어 돌문어를 움켜쥐고 냉큼 식당으로 뛰어갔다.
* * *
“임금님 수라상이 따로 없네요. 우린 참 행운아들입니다. 예약도 못 하는 이 식당을 분기마다 와 볼 수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 제수씨?”
사심희가 정성껏 차린 요리들을 내려다보며, 고동우가 한참동안 너스레를 떨었다.
사심희의 식당은 남해의 명소가 되었다.
워낙 작은 식당이고 평일 점심 장사만 운영하는 이유가 크겠지만,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식도락가들의 호평이 이어지며, 서너 달 치의 예약이 항상 밀려 있는 일이 많았다.
나는 짐짓 목에 힘을 주고 멤버들에게 물었다.
“아지트에서 매주 먹었잖아요. 그때 많이 먹어 둘 걸 그랬죠?”
“내 말이 그 말이야. 이렇게 멀리 남해로 도망갈 줄 우리가 알았나 뭐.”
보람이의 푸념 섞인 대꾸를 듣던 장재준 영감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때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요리도 훌륭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밑반찬들에 자꾸 손이 갑니다. 허허.”
“이유. 그것들은 충주에 계신 어머님이 특별히 보내 주셨어요. 제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죠.”
사심희의 손사래가 말하듯 충주에 계신 엄마는 멤버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손수 밑반찬을 보내 주셨다.
가끔씩 충주를 방문할 때마다, 엄마는 사심희와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셨고, 아버지는 며느리가 해 주는 음식이 더 맛있다며 엄마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한차례의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고, 곧장 회의가 시작되었다. 거창하게 사장단 회의라고는 하지만, 서류 한 장 없이 굵직한 현황을 공유하는 사내들의 수다에 가까웠다.
첫 의제는 어반자팩토리의 코스닥 상장 건이었다.
보람이가 입 안에 남은 음식들을 쩝쩝거리며 개요를 설명했다.
“주간사는 ○○증권으로 계약했어요. 내년 초쯤이면 예비 심사 청구서를 제출하는 일정이라고 하네요. 새로 출시한 신제품 매출이 꾸준히 커지고 있어서 심사 통과는 무난할 거랍니다.”
“부럽습니다. 허허. 우리 어반자 마린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인데 말입니다.”
어반자팩토리는 매년 두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는 중견회사로 도약했다.
보람이는 작년에 초소형 GPS 추적기를 장착한 구명조끼를 출시했다. 그리고 그 제품은 금년 들어 제2의 멀티싱커라 불릴 만큼 히트 상품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보람이가 대만의 모 벤처 기업과 초소형 GPS 추적기를 독점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을 때만 해도, 멤버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낚시꾼들의 불안 심리를 정확히 이해한 보람이는 판단이 옳았음을 보란 듯이 증명했다.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띠며, 나는 장재준 영감에게 눈길을 돌렸다.
“캡틴 님!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상장이 모든 회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어반자 3호는 언제 타 볼 수 있는 건가요?”
장재준 영감이야말로 선장으로서는 물론 기업형 유선업의 대표로서 열일을 하고 있었다.
군산에서 어반자 2호를 진수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는 벌써 통영에 세 번째 낚싯배를 띄울 예정이었다.
“신조선 건조를 마치려면 아직도 두 달은 기다려야 합니다. 은행 융자가 제때 나올지도 걱정이고 말입니다. 일정이 확정되면 그때 다시 공유드리지요.”
장재준 영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동우가 나섰다. 그도 떠벌릴 일이 적지 않은 눈치였다.
“저는 대구 4호점 오픈 일정을 확정했어요. 다다음주 토요일로. 다들 오실 거죠?”
어반자스토어는 매년 한 개의 신규 점포를 런칭한다는 계획대로 순항 중이었다.
인천 2호점, 광주 3호점에 이어 이번에는 대구에 4호점 오픈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단톡방에서 한 달 정도 더 걸린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성격이 좀 급하잖아. 빠르면 좋은 거 아냐? 왜? 무슨 다른 일정이라도 생겼어?”
“어쩌죠? 저랑 사시미 님은 뉴질랜드에 가 있을 것 같은데요.”
“뭐? 그런 얘기 없었잖아.”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휴가 겸해서 해외 출조를 잡았거든요. 항공편이랑 호텔도 다 예약해 놓았고.”
“이런……. 우럭 님과 사시미 님이 없으면 행사의 의미가 확 줄어들 텐데…….”
고동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사심희의 눈치를 보며 히죽거렸다.
“미안합니다. 그냥 일정대로 하시고, 내년 5호점 때는 꼭 참석할게요.”
“그래야지, 뭐. 쩝.”
“그나저나 4호점 점장은 정하셨나요? 적당한 인물이 없다고 고민하셨잖아요.”
“좋은 사람을 구했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낚시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아! 우럭 님도 아는 사람이야. 전에 첫 어반자 낚시 대회에서 2등을 했던. 이름이……. 맞아! 오경환이야.”
“……정말입니까? 그분은 의정부에서 회사를 다닌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면접에 와서 그러더만. 이왕 회사에 다닐 거면 낚시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다.
오경환이 어반자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니, 나로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수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회의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을 때, 사심희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내왔다.
“멀리까지 오셨는데, 낚시도 못 하고 가시게 돼서 어떡하죠?”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 우리도 아쉬워서 섬이나 한 바퀴 둘러보고 갈 계획입니다.”
분기마다 회의가 끝나면 멤버들과 전설의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기고 하룻밤 묵어 가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두들 일요일에 결혼식이다 뭐다 다른 일정이 있어 당일에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사시미 님. 도시락 이리 줘.”
멤버들과 식당을 나서면서 나는 사심희에게서 도시락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섬을 둘러보러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전달할 물건이었다.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나누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한 사람이 있었다.
잠시 뒤, 피싱 어벤저스의 멤버들은 피싱 피어에 올라 산책하듯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동우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살림망을 힐끔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여기에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은 좋겠다. 매번 볼 때마다 살림망이 그득하니 원.”
그렇게 섬의 반 바퀴를 돌아가고 있을 무렵, 멀리 낚싯대를 들고 캐스팅을 연습하는 남녀가 눈에 띄었다.
주말을 맞아 낚시를 즐기러 온 커플이었다.
나는 그들의 곁에서 뭐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 다른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마른 체구의 사내였다.
“형님! 잘되십니까? 밥은 먹고 일하셔야죠.”
나는 그에게 다가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깜짝이야. 손님들도 같이 오셨네? 안녕들 하셨습니까?”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사내는 사심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나무랐다.
“제수씨 고생시키지 말라니까. 나도 집에서 샌드위치 가져왔어.”
“넉넉하게 챙겨 왔으니까 손님들하고 나눠 드세요.”
“제수씨! 매번 고마워서 어쩌죠?”
“우리가 고맙죠. 쑥섬의 낚시터를 빛내 주시는 선생님이신데요.”
사내의 이름은 김혁준이었다.
비록 프로 조사의 꿈은 접었으나, 그는 매일 진주에서 출퇴근하며, 수강을 원하는 초보 조사들에게 유료로 낚시를 가르치고 있었다.
낚시터에서 개인 교습을 해 달라는 내 제안에, 처음에 그는 수강생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출중한 낚시 실력과 성의 있는 현장 교습이 입소문을 타면서, 그는 낚시 선생으로서 인생의 제2막을 멋지게 열어 가고 있었다.
“그럼 고생하세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얼른 가. 아직 손님들 첫수도 못 했으니까.”
“오늘은 입질이 영 시원치 않나 보죠?”
“곧 나오겠지. 아무튼 또 보자고.”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바다를 향해 ‘무시로’ 노래를 길고 휘파람으로 불어 넣었다.
몇 걸음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초보 손님들의 발치로 몇 마리의 감성돔이 몰려오고 있었다.
가끔씩 조황이 빈약한 손님들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서비스였다.
한 시간 남짓한 산책을 마치고, 멤버들은 다시 공 선장의 배에 올랐다.
“서울에도 좀 올라와. 그러다 남해 촌놈 되겠어.”
“하하. 남해 촌놈이 어때서요. 조만간 또 봬요.”
그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식당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 팔에 착 달라붙어 있던 사심희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멤버분들이 다녀가니까 허전해요?”
“그렇긴 하지. 오랜만에 함께 낚시나 하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랑 하면 되잖아요.”
“그럴까? 오랜만에 설거지 내기 어때?”
“오늘은 설거지하기 싫다 이거죠? 좋아요! 대신에 오늘은 지난번처럼 휘파람 불기 없기예요.”
우리들의 흔한 일상의 단면이었다.
함께 식당 일을 하고, 언제든 바다에 나가 낚시를 즐기고, 주말이면 어디든지 떠나 어반자TV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으랏차차! 첫수는 나야.”
“나도 한 마리 걸었어욧!”
산더미 같이 쌓인 설거지를 피하려는 두 남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갯바위에 울려 퍼졌다.
서로 질세라 주거니 받거니를 이어 가던 도중, 나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엄살을 떨었다.
“내가 졌어. 기를 쓰고 덤비니 당할 수가 없네.”
“거봐요. 예전의 사시미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설거지 담당은 가뿐히 확정했고……. 여기서 계속 낚시하고 있어요. 나는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요.”
뭘 하려는지 말똥말똥 쳐다보니, 그녀는 가방에서 빈 노트와 연필을 꺼내 들고 있었다.
“뭐 하려고?”
“우럭 님이 낚시하는 모습을 그려 보게요.”
참 이상한 일이다.
늘 카메라만 들고 있던 그녀가 뜬금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을 그릴 줄은 아는 건가?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요리 실력으로만 보자면 손재주가 뛰어난 그녀가 아니던가.
나는 은근한 기대감을 품은 얼굴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더니, 도무지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다 됐지?”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어요. 조금만 더요.”
다시 10분이 지나고서야 그녀가 다 되었다는 눈짓을 보내자, 나는 냉큼 달려가 결과물을 확인해 보았다.
“푸웁!”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내게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웃지 마요. 예전엔 곧잘 그렸었단 말예요.”
너무 못 그렸다.
비뚤비뚤 윤곽만 알아볼 수 있는 갯바위 위에 한 사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특히 나를 웃음 짓게 만든 것은 거인처럼 큰 키의 사내 얼굴에 새까맣게 칠해진 부분이었다.
“이거 혹시 나 아니지?”
“맞는데…….”
“나 참 어이가 없네. 어어? 그런데…….”
한참을 웃던 나는 다시 찬찬히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를 살펴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많이 본 듯한 느낌이었다.
“이거 설마 조어도 아냐?”
“알아볼 정도는 됐나 보군요. 헤헤.”
그림을 집어 든 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은 긴 세월을 뛰어넘어 새롭게 탄생한 ‘나만의 조어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