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마지막 도전
항구에 거의 근접했을 때. 주변을 둘러보던 준서가 창밖을 가리켰다.
“다른 배들도 돌아오고 있나 봐요.”
“정말 그런가 보다.”
거칠게 일어난 풍랑을 대부분 예사롭지 않게 판단한 모양이다.
보트를 정박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선착장 양옆으로 거의 모든 보트들이 들어와 있었다.
잠시 후 세 명의 사내들이 소형 트럭을 타고 몰려왔다. 게코 선장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주최 측의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우리의 청새치를 트럭에 옮기고 떠났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우리는 계측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심희의 예상이 옳았다.
무대 근처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보니, 오늘 포획된 청새치들은 열 마리 남짓이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Team Avanza’의 표식이 달린 대형 청새치였다.
“오늘은 우리가 일등인가 봐요.”
흥분한 우리 일행들은 크레인에 매달려 저울로 향하고 있는 대물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364파운드!”
계측장에서 튀어나온 결과에, 나는 사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165킬로그램! 끼야, 어제보다 2킬로나 더 나왔어요! 축하해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종합 점수에서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와아아아!”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와, 슬그머니 무대 쪽으로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내 쪽이 아닌 것 같았다.
“우럭 님! 저, 저기…….”
사심희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상황이 급반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 도착한 트럭에서 3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초대형 청새치가 내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2년 전의 우승자, 제임스 후크가 사람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리고 있었다.
그저 멋쩍은 웃음만 나왔다.
잠시 후 계측 저울에 올려진 대물의 무게는 무려 388파운드, 176킬로그램이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게코 선장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는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팀원들은 얼굴에 번진 실망감을 애써 지우며 내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주최 측 사무실에 들렀다가 돌아온 게코가 정확한 중간 결과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나마 현재 2위라고 위안 삼고 있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실망스러운 소식이었다.
1위는 첫날 데일리 잭팟을 차지했던 호주의 팀 힐디치.
그들은 오늘도 102킬로그램짜리 청새치를 추가하며 다크호스로 급부상했다. 도합 275킬로그램으로 단연 선두였다.
2위는 오늘 데일리 잭팟을 차지한 미국의 팀 후크가 176킬로그램. 165킬로그램을 기록한 우리는 3위에 랭크된 상황이었다.
“돈 워리! 라스트 데이, 투모로우!”
게코는 그렇게 외치며 이른 귀가를 서둘렀다.
한참 동안 내 눈치를 보던 준서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삼촌. 요즘엔 값진 동메달이라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나저나 김칫국을 한 사발이나 들이켰는데도 배가 고프네. 다들 근사한 데서 밥이나 먹자.”
나는 늦은 점심을 위해 그들을 앞장섰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던 도중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대 위에는 제임스 후크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그의 옆에 걸려 있는 초대형 청새치를 바라보던 순간, 머릿속에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거리는 것 같았다.
세계 무대의 벽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한 하루였다.
기분 전환이나 하려는 생각에 나는 그동안 지나가다 봐 뒀던 럭셔리 식당의 문을 열었다.
“마음껏 먹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애초에 나는 이번 대회의 모든 과정을 담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계획이었다. 지금도 그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첫 도전임을 감안한다면 준서의 위로처럼 3위는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회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나의 1차 목표였던 5위까지의 수상권에는 상당히 근접한 상황이다.
하지만 기왕에 여기까지 왔다면…….
대회의 3분의 2가 지나간 지금 시점에서 내 마음에는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첫수의 감격과 실망감 사이에서 은연중에 오기가 싹튼 것이다.
“내일도 오늘처럼 바다가 꼴랑거릴까요?”
“내일은 괜찮을 거래. 이모가 일기 예보를 확인했거든.”
“지금 밖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 같은데요?”
“음. 그러네. 아무튼 내일은 멀쩡하다니까 믿어 봐야지. 기온이 뚝 떨어진다니까 옷을 두툼하게 입어야 할 거야.”
갑작스러운 기온의 변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불현듯 그 변화가 내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두 사람, 여기 있어. 내가 우산을 사 가지고 올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빗줄기가 약간 굵어져 있었다.
하늘에 빠르게 지나가는 먹구름으로 보아, 한바탕 시원한 소나기가 내릴 기세였다.
근처의 잡화점으로 달려가는 순간, 나는 결심했다.
나에겐 아직 하루가 더 남아 있다.
나의 모든 것을 불태우리라. 절대로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 * *
대회의 마지막 날.
전날 사납게 울부짖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우리를 맞이했다.
늘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던 게코 선장이 긴 바지를 입고 나온 것이 날씨의 변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바람은 전날보다 확연히 약해졌고,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사심희가 물었다.
“간밤에 청새치 꿈은 꿨나요?”
“아니. 너무 푹 자서 꿈도 꾸지 못했어.”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표정이네요? 다 내려놓은 건가요?”
“…….”
사심희의 말은 틀렸다.
나는 오히려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더구나 내 계산대로라면 오늘은 내 머릿속 어탐기가 특히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믿음마저 품고 있었다.
한참을 배를 몰던 게코 선장의 변화가 내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뱃머리를 틀고 나를 향해 누런 이빨을 보였다.
“투데이! 디퍼런트 포인트!”
자초지종을 묻고 돌아온 사심희가 내게 그의 말을 전해 주었다.
“오늘은 청새치가 라이징할 확률이 적대요. 바다 표면 온도가 낮은 날이라, 더 적당한 포인트가 있다고 하시네요.”
“…….”
내 예감이 적중했다.
갑작스레 뚝 떨어진 기온 때문에 청새치가 중층 부근에서 먹이 활동을 한다는 얘기다.
쉴 새 없이 휘파람을 불살라야 하는 날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기 시작했다.
게코의 새로운 포인트도 다른 배들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였다.
나는 채비를 내리기 전에 준서에게 넌지시 말했다.
“준서야. 오늘은 네게 다른 역할을 줄 거야.”
“파수꾼이 아니고요?”
“그래. 이 루어를 잘 봐. 모양은 같지만 다 무게가 달라. 지금 나란히 내려놓은 순서로 무게가 커지는 거지. 내가 1, 2, 3이라고 할 거야. 그러면 네가 곧바로 루어를 갈아 끼워 줘. 내 말 알겠지?”
“그럼. 삼촌이 ‘3’이라고 하면, 제일 무거운 루어로 갈아 끼우면 된다는 말씀이죠?”
“맞았어. 잘할 수 있지?”
“네.”
사방의 물속을 경계하는 일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다.
언제 어디에서 출현할지 모르는 청새치의 수심에 맞도록, 루어를 교체하는 작업은 준서에게 맡기기로 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일단 가장 적은 무게의 1번 루어를 입수시키는 것으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다.
나는 보트 안을 어슬렁거리며 입술이 마르고 닳도록 연신 휘파람을 내뿜고 있었다.
새로운 임무를 받은 준서도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팀원에게 몹시도 맥 빠지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뱃전에 안개처럼 자욱하던 긴장감이 조금씩 옅게 흩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시끄럽게 떠들던 게코 선장이 사심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 낙담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내게 다가온 그녀가 준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임스 후크라는 사람이 한 마리 잡았대요.”
“……그래?”
“1, 2위가 역전되었다니까 꽤 큰 걸 잡았나 봐요.”
나는 애써 실망한 표정을 감췄다.
우승의 꿈이 한 걸음 더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직은 내게 기회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단한 사람들이군. 하지만 상관없어. 결국 우리가 제일 큰 놈을 추가한다면 역전의 기회는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1, 2위가 모두 두 마리씩 잡은 상황이니까요.”
한차례 서늘한 바람이 가슴에 휘몰아쳤다.
그럼에도 나는 길게 드리워진 낚싯줄에서 마지막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다시 흘러갔다.
모두가 침묵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는, 구름 속으로 들어간 해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 건가…….
아주 멀고 깊은 수심에서 시커먼 점 하나를 발견한 것은, 입술을 축이려 생수병을 힐끔거리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지나가는 작은 물고기려니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잠깐 동안 점은 동전 크기로 커졌고, 나중에는 주먹 크기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었다.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불과 1분도 못 되어 그것은 축구공 크기로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그것에서 삐져나온 기다란 막대기를 확인한 나는, 거친 숨을 길게 뿜었다.
청새치였다!
선미의 오른쪽 방향에서 무서운 속도로 어디론가 돌진하는 그것은 틀림없는 청새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놈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내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위치, 청새치의 부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 그리고 청새치의 수심을 동시에 계산하던 나는 준서에게 다급히 외쳤다.
“준서야! 당장 3번 루어로 교체해 줘!”
“3번요?”
“급해! 서둘러야 해.”
준서가 축 늘어진 낚싯줄을 회수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게코 선장에게로 달려갔다.
“캡틴 게코! 턴 레프트!”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선장은 부리부리한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고 있는 그를 제치고 요트의 핸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게코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씩 웃으며 뱃머리를 왼쪽으로 틀었다.
게코가 변침한 각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나는 다시 밖으로 뛰쳐나왔다.
청새치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배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놈의 위치가 선미 쪽에서 포착되었다. 예상한 방향이 들어맞았음을 감지한 나는 낚싯대 앞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준서에게로 다가갔다.
준서는 이미 낚싯줄을 회수하고, 3번 루어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다시금 물속을 확인해 보았다. 어느새 수박만 한 크기로 접근한 녀석은 수심을 바꿔 수면과 중층 중간쯤에서 달리고 있었다.
“준서! 계획 변경이야. 3번 말고, 2번으로!”
“알겠어요!”
준서는 조막만 한 손으로 신속하게 루어를 교체하고는 곧바로 물속에 풍덩 빠뜨렸다.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루어와 청새치의 위치를 번갈아 탐색하던 나는, 준서에게 다시금 외쳤다.
“준서야. 이제 됐어. 물러나서 대기해!”
“넵!”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사심희는 카메라를 들고 나를 따라다니느라 분주했다. 선장과 준서도 내가 멀리 있는 청새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만 여기는 눈치였다.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거의 보트에 근접한 놈의 거대한 몸집에 놀라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수면으로 한층 올라선 놈의 위치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나는 다시 선장에게로 달려가야 했다.
“캡틴! 스피드 업!”
“오케이!”
루어를 교체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배의 속도를 다소 높이는 것으로, 루어의 위치를 약간 위로 끌어당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삼촌! 삼촌!”
준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게코가 기어를 변속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반사적으로 낚싯대를 살펴보았다.
끼리리릭~~ 끼리리리릭~~~!
릴이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물속에는 어느새 달려온 놈이 루어를 삼킨 채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찬란한 역전극의 서막이 열렸음을 직감하며, 나는 낚싯대를 향해 다가갔다.
무념무상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끔씩 청새치가 하늘로 비상할 때마다 팀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가 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이국의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솔직히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구름을 뚫고 나온 눈 부신 햇살 속에서, 나는 사진 속에 있던 외삼촌의 얼굴을 보았다.
사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