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Day 2
“게코! 캡틴 게코!”
나는 다급하게 선장의 이름을 외쳤다.
깜짝 놀란 그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선미 난간에 걸쳐 있는 낚싯대를 노려보았다.
“오우! 지저스!”
게코는 냉큼 무전기를 들고 본부와 연락을 시도했고, 사심희는 카메라를 들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 난리통에도 준서는 아주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선실 간이침대에 아이를 내려놓고, 나는 한걸음에 낚싯대로 달려가 파이팅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읏차!”
낚싯대를 거머쥔 손에 통렬한 전류가 흘렀다.
대물이 틀림없을 거라 확신한 나는, 낚싯대의 손잡이를 파이팅 벨트에 콱 꽂았다.
잠시 후 드랙을 약간 조이면서 온몸의 힘을 릴의 손잡이에 모으려던 그때…….
휘파람을 길게 내뿜던 양 볼에서 피시식 바람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아…….
청새치의 기다란 부리가 보이지 않았다. 망원경을 들고 먼 곳을 확인한 게코 선장의 눈빛에도 당혹감이 번지고 있었다.
“튜나! 튜나!”
게코는 그렇게 외치며 내 낚싯대를 휙 낚아챘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낚싯줄을 툭 끊어 버렸다. 괜한 일로 힘을 빼지 말라는 노련한 조치였다.
준서는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에야 밖으로 나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대회 첫날.
떠날 때와는 달리 모두들 지친 얼굴로 항구에 돌아왔다.
게코는 내일을 기약하자며 자리를 떴고, 나머지 일행과 나는 근처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대회 본부 건물 앞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와! 누가 저걸 잡았나 봐요!”
준서가 가리킨 곳은 아침에 개회식이 열렸던 간이 무대였다. 3미터 안팎의 커다란 청새치가 크레인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리호리한 키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무대를 에워싼 사람들과 뭔가 속닥거리고 돌아온 사심희가 내 얼굴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오늘의 데일리 잭팟을 차지한 물고기래요. 호주에서 온 사람인데 무려 163킬로그램이라나. 쩝.”
“……밥이나 먹자.”
식당에서 우리들은 모두들 지쳤는지, 도통 말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로는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빈손이지만 다시 말면 내일 잡을 확률이 높아진 거야. 내가 말했잖아. 3일에 한 마리꼴이니까, 내일 우리가 청새치를 잡은 확률은 반반이 된 셈이지.”
“알았어요. 삼촌. 내일을 기대해 볼게요.”
“좋아. 그렇지만 우리 자신도 대물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야겠지. 오늘은 숙소에 가서 무조건 자는 거야. 다들 알겠지?”
리조트에 돌아오자마자 사심희와 준서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시차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충분히 지쳐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불 꺼진 거실의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멀리 간이 무대 근처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조금 먼 곳으로 옮겨 바다로 향했다.
아침에 잔잔하기 이를 데 없었던 바다는 다소 거칠게 하얀 포말을 뭍으로 쏟아 내고 있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지난여름 백상효와 함께했던 팔라우의 바다가 넘실거렸다.
그때 잡았던 초대형 청새치의 진한 여운이 아직 손끝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려 왔다.
어디서 나는 소린가 봤더니 내 침실이었다.
사람들이 깰까 얼른 달려가 번쩍거리는 휴대폰을 귀에 붙였더니, 보람이였다.
“거기 밤이지?”
“응. 거긴 아침이겠구나.”
“대회 첫날이었을 텐데. 뭐라도 잡았냐?”
“아니. 아직은…….”
“천하의 우럭 님이 꽝이라니. 피곤할 텐데 얼른 자라. 베타는 잘 있으니 걱정 말고.”
“고맙다. 안 그래도 자려던 참이었어.”
휴대폰을 내려놓은 나는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나는 시체처럼 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모두들 푹 자고 나온 덕분에 전날보다 가뿐한 모습들이었다. 그렇지만 선착장에 도착해 보니, 간밤에 바람이 거세져 있었다.
선착장에 묶여 삐걱거리는 보트들을 바라보며 사심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괜찮겠죠?”
“이 정도면 출항은 문제가 없을 거야.”
보트 안에서 기다리던 게코 선장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를 맞았다.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항구를 떠난 보트는 변함없이 어제의 그곳으로 향했다.
나는 사심희를 통해 게코에게 넌지시 다른 포인트는 없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어제 안 나왔느니 오늘은 나올 것’이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찌 들으면 내가 어제 준서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다들 주무셔도 좋아요. 제가 자리를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포인트에 도착해 채비를 내리자마자, 준서가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를 쳤다. 전날 꾸벅꾸벅 졸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눈치였다.
사심희도 어제와는 다르게 사뭇 웃음기가 빠진 모습이었다.
전날 저녁 빈손으로 돌아와 억지로 분위기를 다독이던 내 모습을 내심 짠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어수선하기만 했던 어제와는 다른 오늘.
바다가 다소 거칠어졌다는 점만 빼면 모든 것들이 호전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물속에는 청새치가 좋아한다는 고등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물 밖에서는 준서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물속으로는 나의 고성능 어탐기가 동시에 노려보고 있으니, 이제 청새치만 나타나면 만사형통인 상황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집중하며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청새치의 뾰족한 창을 발견한 사람은 준서였다.
망원경을 들고 사주 경계를 늦추지 않던 준서의 고개가 갑자기 멈췄다.
“삼촌! 저쪽에 뭔가 나타났어요!”
나는 불고 있던 휘파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준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먼 곳에서 허연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지한 게코 선장이 뛰어나와 망원경을 낚아챘다.
“오오! 블루마린!”
수면을 헤치며 나타난 청새치였다.
최고 속도인 시속 100킬로미터로 녀석이 고등어 떼를 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코 선장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조타석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그는 배의 속도를 높이면서 동시에 뱃머리를 청새치가 돌진하는 방향으로 돌렸다.
보트 안에 짙은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렵게 만난 놈을 혹여 놓칠세라, 나는 쉬지 않고 바다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 순간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게코의 운전 실력이었다.
그는 귀신같이 청새치가 다가오는 위치를 예상하고, 정확히 놈의 머리 쪽에 루어가 닿을 수 있도록 보트를 조정하고 있었다.
기막힌 위치와 타이밍.
게코의, 아니 우리 모두의 승리였다. 어느샌가 보트의 꽁무니 근처까지 접근한 청새치가 루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끼리리리릭~~~~ 끼릭! 끼리릭!
줄이 풀려 나가는 소리에 뒷덜미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나는 낚싯대를 움켜쥐고. 크게 흔드는 동작으로 놈의 억센 입가에 바늘을 단단히 박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무시무시한 몸부림으로 단번에 바늘을 뱉어 내기도 하는 청새치. 잠시라도 줄이 느슨해지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
조타석 쪽에서 현지어로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후킹까지 성공한 사실을 확인한 게코가 본부와의 무전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늘로 떴어요! 청록색이에요!”
청새치가 하늘을 향해 펄쩍 솟아오르며 공중제비를 돌자, 준서가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바늘털이를 시도하려는 놈의 발악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파이팅 벨트에 단단히 고정된 낚싯대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줄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지 않도록, 릴을 빠르게 감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아요? 좀 쉬었다가 해요.”
“아냐. 이 정도는 끄떡없어.”
사심희가 카메라 너머에서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반년 동안 수없이 반복했던 체력 단련의 효과였다. 상체는 물론 하체의 힘을 키우기 위해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 클럽을 찾곤 했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의 긴 싸움이었다.
마침내 선미 부근까지 끌려온 청새치.
기다란 작살을 들고 나타난 게코가 준서와 사심희에게 멀리 떨어지라고 크게 외치며 놈의 아가미 부근을 겨냥했다.
푹!
게코의 손을 떠난 작살이 단숨에 놈의 숨통을 끊었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 녀석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뱃전으로 끌어당겼다.
쿠궁!
팔라우에서 얼굴만 보고 방생했던 청새치와 비슷한 크기였다. 눈대중으로 보아 첫날 호주 출신 앵글러가 잡은 데일리 잿팟에 견줄 만한 대물이었다.
“브라보!”
모든 뒤처리를 마친 게코가 그제야 탄성을 지르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가슴속에 뭉쳐 있던 돌덩이를 단숨에 날려 버린 기분이었다.
“삼촌 말이 맞았어요. 확률적으로 오늘은 해내실 줄 알았어요.”
“축하해요. 우럭 님!”
기뻐하는 준서와 사심희를 얼싸안는 순간, 감격의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한바탕 몰아닥쳤던 흥분을 가라앉히며, 사심희는 바닥에 누워 있는 청새치의 위용에 혀를 내둘렀다.
“저 부리 좀 봐요. 게코 선장님이 한참을 머뭇거린 이유가 있었군요.”
“칼날에 찔리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빠른 속도로 먹이 무리들을 헤치며 부리의 앞쪽에 달린 칼날로 상대방을 기절시키거나 두 동강 내는 것이 청새치가 사냥을 하는 방식이다.
“땡큐! 캡틴 게코!”
나는 다시금 게코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잠시나마 그의 고집을 의심했던 것을 미안해하는 표현이었다.
게코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곧바로 본부에 무전으로 결과를 알리려 나섰다.
잠시 후 내가 채비를 정돈하고 있을 때, 준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계속 잡는 거죠? 하루에 두 마리도 잡을 수 있나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상상만 해도 다시금 흥분이 몰려왔다.
첫수를 발견하고 끌어 올린 과정은 너무 완벽했다. 떼를 지어 다니는 놈들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또 다른 멋진 녀석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잠시 후 루어를 들고 바다를 살피던 나는 약간 망설이기 시작했다.
바다가 거칠게 일어나고 있었다.
배 안을 쓸고 지나간 흥분에 가려, 풍랑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뒤로 몸을 돌려보니 본부와 통신을 마친 게코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와 뭔가 말을 주고받은 사심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풍랑 주의보까지는 아니래요. 하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귀항할지 여부는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네요.”
잠시 바다를 살피던 나는 곧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이만 접자. 안전이 우선이니까.”
나로서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아직 점심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바다는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게코가 고집한 포인트는 다른 배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와 있었다.
더구나 이미 멋진 청새치 한 마리를 잡은 상황에서 까닥 잘못하면 정해진 시간에 귀항을 하지 못할 불상사가 벌어질 염려도 있었다.
내 말은 전해 들은 게코는 서둘러 뱃머리를 돌렸고, 우리는 선실 구석에 앉아 걱정과 흥분이 교차하는 눈길로 창밖을 힐끔거렸다.
“오늘의 승리의 주역은 준서 바로 너야.”
“제가요?”
“네가 제일 먼저 발견했잖아. 그 덕분에 게코 선장님이 보트를 제대로 댈 수 있었고.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해낸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헤헷.”
사심희는 은근히 오늘 잡은 물고기가 데일리 잭팟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어제 행사장에 걸려 있던 그것보다 크지 않나요? 모르긴 몰라도 오늘 무대에 오를 준비나 하세요.”
“글쎄. 다른 사람들이 어쨌는지 아직 모르니까.”
“에이, 이런 날씨에 이렇게 빨리 잡은 사람이 또 있으려고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은근히 솔깃한 것은 사실이었다.
데일리 잭팟과 더불어 종합 포인트에서도 선두를 치고 나가지 않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이 모두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거친 파도를 헤치는 험난한 귀항이었다.
가끔씩 출렁거릴 때마다 움찔하기도 했지만, 배는 조금씩 항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