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D-day
꿈의 대회가 열리는 첫날.
카보산루카스 항구에는 수천 명의 인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히야! 물고기보다 사람이 더 많겠어요.”
사심희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준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찬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전부 대회에 나가는 건가요?”
“아니야. 대부분 구경 나온 사람들이겠지.”
게코 선장을 통해 내가 들은 바로는, 이번 대회에 참가자는 20개국에서 온 300여 개 팀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수백 척의 보트들이 동시에 출발하는 멋진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항구 주변은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미스터 우럭! 굿 모닝!”
군중들 틈에서 게코가 용케 우리를 알아보았다.
‘미스터 강’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는 성과 이름을 구별하지 못한 눈치였고, 나 또한 그닥 신경 쓰지는 않았다.
게코를 앞장세워 보트로 향하던 도중,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
행사장 무대 근처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사심희가 게코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잠시 후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제임스 후크라는 사람이래요. 재작년 대회 우승자라고 하네요.”
“우승까지 한 사람이 여긴 또 왜 왔대?”
“상금이 어마어마하다면서요. 돈 벌러 왔겠죠.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라이벌이라 신경 쓰여요?”
“라이벌은 무슨……. 나야말로 여기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듣보잡인데.”
“길고 짧은 건 대 봐야죠. 다크호스로 떠오를지 누가 알겠어요?”
“…….”
후크라…….
누가 낚시꾼 아니랄까 봐 후크라는 성으로 바꾼 건 아닐 테고.
그녀의 말처럼 라이벌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대회에 출전한 거의 모든 앵글러들은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베테랑. 나는 오직 청새치와 나와의 싸움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웰컴 투 비즈비 블랙 앤 블루 토너먼트! 블라블라…….”
선착장에 도착했을 무렵 행사장 쪽에서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시 그쪽으로 돌아갈까 망설였지만, 겹겹이 쌓인 사람들을 또 헤치고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삼촌! 그냥 우리 보트에서 구경하죠.”
“그게 낫겠다.”
길게 이어진 통행로를 따라 걸어가던 우리 일행은 옆면에 ‘트라이앵글’이라 적힌 보트 앞에서 멈췄다.
게코가 자신의 보트라는 시늉으로 부리부리한 눈을 더욱 부릅떴다.
보트에 오르자마자 사심희가 선글라스를 정수리에 올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넓은데요?”
“5미터짜리 청새치를 모셔 가야 하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5미터는 좀 심했나 보다.
사심희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실실 웃는 걸 보면.
멀리서 들려오는 사회자와 연사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내 시선은 바다를 향했다.
내가 온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고요한 바다였다.
아침 햇살이 내려와 만든 수면의 윤슬들이 어젯밤의 수많았던 폭죽처럼 반짝거렸다.
타앙!
난데없이 귀청을 울린 스타팅 건의 총소리.
딴청을 부리고 있던 사이, 그렇게 대망의 블랙 앤 블루 대회는 시작되었다.
300여 척의 보트들이 일제히 출발하자, 군중들의 함성이 파도처럼 항구를 들썩거렸다.
드디어 역사적인 도전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현실감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준서야. 멀미 약 챙겨 왔어?”
“이런 바다는 문제없어요. 캡틴 할아버지랑 주말마다 보트를 타고 다녔잖아요.”
“그래도 여기는 언제 바뀔지 몰라. 사시미 님은?”
“저도 배라면 이골이 나도록 경험했잖아요.”
나만 조심하면 되겠구나.
사실은 처음 이곳에서 탐사차 배를 탔던 날, 난데없는 뱃멀미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알약을 입 안에 털어 놓고, 나는 멀어져 가는 항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가 오른쪽 해안선 근처에 다다르자, 사심희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아치형 바위로군요.”
“멋지더군. 난 벌써 네 번째야.”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의 풍경을 담기 시작한 사심희와 달리, 준서는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바다를 주시했다.
“준서야. 아직은 낚시 시작 전이니까 그냥 쉬어. 포인트에 닿으려면 아직 멀었어.”
“저도 구경하는 거예요. 망원경은 어디 있어요?”
준서는 과잉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저러고 있으면 눈알이 빠질 것 같았지만, 언제까지 저러는지 그냥 놔둬 보기로 했다.
게코에게 망원경을 빌려 건네주었더니, 준서는 아예 그것을 안경처럼 눈에 붙이고 좀처럼 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모두들 저마다의 일에 몰두해 있는 동안, 나는 주변에 함께 달리고 있는 보트들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던 그들이 하나둘씩 오른쪽으로 뱃머리를 틀고 있었다.
하여간 고집 하나는…….
3분의 2 정도가 오른쪽으로 향하는 가운데, 게코는 전혀 미동도 없이 정면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김이 없었던 그의 행동이었다.
나는 그가 향하는 방향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곳은 지난 사흘간 청새치가 감감무소식이었던 포인트였다.
오른쪽으로 멀리 사라져 가는 보트들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나는 게코에게 보이지 않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직진하고 있을 무렵, 주변의 배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보트의 속도를 늦추면서 게코가 내게 뭐라고 소리쳤다. 낚시 준비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가방에서 백상효가 선물한 헤비 트롤링대를 꺼내 들었다. 수동릴을 장착하고 역시 그가 골라 주었던 루어를 끼웠다.
이제 시작인가.
나는 채비를 바다에 던져 넣으며 동시에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아직은 평온하기만 한 바다.
주변에 청새치가 좋아하는 고등어들이 노닐고 있어, 게코가 여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적당히 드랙을 조절하고 준서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조타석에 앉아 있던 게코가 다가와 사심희에게 뭐라고 소곤거리고 다시 돌아갔다.
“뭐라고 하셔?”
“우리에게 대회 규정을 숙지하고 있는지 묻더라고요. 주의 사항이 있다고 하던데요.”
깜빡하고 있었다.
나는 사심희와 준서를 불러 모아, 중요한 사항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 물고기가 물면 절대로 낚싯대를 만져선 안 돼. 중간에 교대할 수 없거든. 처음 릴링을 시작한 사람이 끝까지 마무리를 해야 돼.”
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알겠어요. 조심하겠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돼요?”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대. 중간에 도와준다고 다른 사람이 나섰다가 우승 트로피와 상금을 박탈당한 사례가 말이야.”
내 말에 사심희는 다소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시무시한 얘기네요. 그런데 슬쩍 도운다고 누가 알기나 하겠어요?”
“저길 봐.”
나는 대답 대신, 멀리서 얼쩡거리고 있는 보트 한 척을 가리켰다.
망원경을 들어 그쪽을 살피던 준서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저쪽에서도 망원경을 들고 있어요. 배 옆면에 비즈비 마크가 보이고요.”
나는 씩 웃으면서 사심희에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들었지? 주최 측에서 저런 보트로 계속 감시하면서 돌아다닐 거야. 부정 행위가 생기면 바로 적발하려는 거지.”
“하긴……. 엄청난 상금이 달렸으니. 네! 알겠습니다!”
골똘히 듣고 있던 준서가 다른 주의 사항은 없는지 내게 물었다.
“다른 건 없어요?”
“자잘한 것들이 더 있지만, 아까 내가 말한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저녁 6시까지 항구에 돌아가지 못하면 그날 잡은 물고기가 무효 처리된다는 규정도 있는데, 그건 게코 선장님이 명심하고 있을 테니까.”
한참 동안 떠들고 있었던 그때였다.
배의 선미에 꽂아 놓은 낚싯대에서 잔잔한 기계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기리리릭! 기릭!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본 나는 곧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께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드랙이 풀려 나가고 있지만, 생명체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사심희가 바닥에 내려놓은 카메라를 슬그머니 집었지만, 나는 못 본 척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삼촌! 뭐 하세요?”
준서가 엉겁결에 엉덩이를 들썩거렸지만, 아차 싶었는지 곧 내 등을 떠밀었다.
“하하하. 준서는 합격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다.”
나는 키득거리며 낚싯대로 다가가 휘리릭 릴을 감아올렸다. 잠시 후 채비에 끌려 나온 해초 무더기를 흔들어 보이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본격적인 낚시는 시작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서 슬슬 지루한 적막이 보트 안을 맴돌았다.
아침에만 해도 쌩쌩해 보이던 준서는 잠을 쫒아내려 연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고, 사심희는 아예 난간에 머리를 젖힌 채 졸고 있었다.
조타석에 앉은 게코는 벌써 몇 개비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고, 나는 보트의 사방을 어슬렁거리며 가끔씩 바닷속을 살폈다.
“미스터 우럭! 런치 타임!”
배가 고프다는 게코의 말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사심희 대신 나는 선실 안에 놓인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나왔다.
“준서야! 밥이나 먹자.”
“……네.”
점심 식사는 사심희가 새벽에 뚝딱뚝딱 만든 참치 샌드위치였다. 입맛을 다시는 게코의 호들갑에 사심희가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으음……. 바다는 좋지만 3일 동안 계속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건가요?”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먹으며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청새치 한 마리만 걸리면 금세 흥분의 도가니로 바뀔 거야. 설마 유람선 놀이만 하다 가겠어?”
가만히 듣고 있던 준서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한 마리도 못 잡고 가는 선수들은 없나요?”
속이 뜨끔했다.
게코에게 들은 바로는, 수년 전에 대회 시상식에 네 팀만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5위까지 상금이 주어지는 대회에서 네 팀만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는 것은, 포인트를 전혀 따지 못한 팀이, 그러니까 꽝을 친 팀이 네 팀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였다는 의미였다.
게코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 다행이다.
나는 힐끔 그의 눈치를 보며, 두 사람에게 허풍을 떨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는 분명히 있어. 하지만 3일 중에 한 마리도 못 잡는 경우는 드물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우리도 최소한 한 마리는 잡을 수 있는 거네요?”
“당연하지. 지난여름에도 내가 팔라우에서 3일 동안 한 마리를 잡았잖아.”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준서를 바라보니, 입 안에 있던 샌드위치가 퍽퍽해진 느낌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내게 들은 허풍을 곧이곧대로 믿고 여전히 눈에 불을 켠 준서가 안쓰러워 보였다.
아침에 보았던 고등에 떼는 어느새 사라졌고, 물속에는 앙증맞게 생긴 작은 물고기들만 노닐고 있었다.
멀리서 낚싯줄에 매달려 끌려오고 있는 루어를 보니 흠뻑 젖은 걸레처럼 축 처져 있었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시계를 내려다보니 어느덧 오후 3시였다.
파수꾼 역할에 지나치게 충실하던 준서마저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있는 준서를 선실 안으로 옮겨 놓고, 게코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준서를 번쩍 안아 들고 선실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끼리리릭! 끼리리리릭!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하루 종일 간절히 기다렸던 경쾌한 기계음…….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니, 무서운 속도로 줄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