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블랙 앤 블루
미니중기 영감은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섬을 개발한다…… 거기에 집을 지을 생각이가?”
“일단 선착장부터 만들고 싶습니다. 나중에 배로 자재들을 나르려면 말입니다.”
“선착장? 그게 무신 애들 장난이가?”
“배 두 척 정도만 정박시킬 수 있는 규모면 됩니다.”
미니중기 영감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그다음에 집을 짓겠다, 그기가?”
“집은 물론이고, 그곳을 세상에 없던 낚시터로 만들 계획입니다. 가급적 자연 경관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지요.”
“허어, 뭔지 모르겠지만 말만 들어도 멋지다. 간밤에 돼지가 꿈에 나왔다 했더니, 이런 횡재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이가.”
잇몸까지 드러내며 담배를 뻑뻑 피워 대던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하면 되나?”
“대략 한 달 뒤에 착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형님께서는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 주시면 됩니다.”
부동산 잔금을 치르고 필요한 인허가까지 마치려면, 대략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이미 별장으로 허가를 득한 곳이라 특별한 변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걱정 마라. 남해에 사는 목수며, 기사들은 죄다 내 동생들이다. 어쨌든 해 준 것도 없는데 나까지 생각해 줘서 고맙데이.”
“고마운 사람은 접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근처의 해장국집에서 점심 식사를 나누고, 나는 다시 차에 올랐다.
비밀 프로젝트와는 다른 목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통영에서 멀리 떨어진 욕지도라는 섬이었다.
욕지도로 가는 막배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통영 삼덕항에 차를 두고 여객선에 오른 시각은 오후 3시였다.
욕지도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서산에 남아 있었다.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오는 데 힘들지 않았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때 이른 휴가를 즐기고 있다네.”
언제나 듣기 좋은 동굴 보이스의 소유자.
백상효 프로였다. 그는 욕지도에 작은 별장을 소유하고 있어, 시간이 비는 경우에 늘 이곳을 찾는다고 들었다.
전날 밤 내가 전화했을 때도 그는 일주일간 욕지도에 머무를 계획이라며, 내게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어차피 남해에 갈 일정이 있는 나는 당장에 찾아뵙겠다고 그와 약속을 했다.
“그냥 오라니까 뭘 이런 걸…….”
“오다가 남해에 들러 죽방 멸치 좀 사 왔습니다.”
“고맙군. 여기 두긴 아깝고, 나중에 집에 가져가야겠어.”
백상효의 별장은 선착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말이 별장이지, 삼시세끼에서 보았던 작은 촌집의 형태였다.
“집이 아담하고 운치가 있네요.”
“자네가 뭘 아는 모양이네. 일단 앉아서 쉬고 있어. 후딱 저녁상을 차려 올 테니까.”
“나가서 사 드리려고 했는데요.”
“잔말 말고 있어. 내 음식 솜씨가 제법 나쁘지 않거든.”
뭘 해 주시려나 기다리고 있었더니, 잠시 후 그가 간장에 조린 참돔 요리를 들고 돌아왔다.
“들어 보게.”
“햐, 정말 맛있는데요. 언제 잡으신 겁니까?”
“그저께 나가서 딱 한 마리만 잡고 돌아왔지. 타이라바로 했는데 입질이 시원치는 않더군.”
때 이른 저녁 식사였지만, 너무 맛이 좋아 금방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함께 식사를 나누며 나를 바라보던 백상효는 흐뭇해하는 말투였다.
“그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더 잡아 올 걸 그랬어. 내일이나 나가 볼까 하고 있었거든.”
“내일요? 그럼 제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나야 좋지만 자네가 시간이 되겠는가?”
“마지막 배편이 오후 네시 반이니까, 그 전에만 돌아오면 문제없습니다.”
“그럼 잘됐군.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가 보세.”
밥상을 물리고 우리는 마당으로 나왔다.
평상에 앉아 저물어 가는 섬의 노을을 감상하자는 백상효의 제안이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백상효가 불쑥 내게 물었다.
“그래……. 이제 결심을 굳힌 건가?”
고개를 젖히고 수평선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움찔했다.
그는 내가 찾아온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것 말고 또 있겠나.”
“사실은 거의 마음을 굳혔습니다.”
“잘 생각했어. 나는 언젠가 자네가 그렇게 할 줄 알았지. 내 예상보다 약간 빨랐지만 말이야.”
선문답 같은 대화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향했다.
“언제쯤으로 예상하셨습니까?”
“글쎄. 최근에 자네가 돗돔을 잡는 영상을 보고 시기가 당겨질 것은 예감했네.”
“…….”
당장 돗자리를 깔아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백상효는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비공인 돗돔 국내 최대어 기록.
내 가슴에 새로운 욕망이 강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부산에서 벌어진 그 날의 대형 사건 직후였다.
백상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 말처럼 낚시는 즐거움을 위한 취미이자 놀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낚시는 동시에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스포츠이기도 하다네. 그리고 모든 분야의 스포츠맨은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기를 원하는 법이지. 자네는 이제 그런 경지까지 올라온 거야.”
“…….”
백상효는 내가 막 품기 시작한 욕망의 근원을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명료한 그의 말에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 또한 자네와 같은 길을 걸어왔어. 처음엔 낚시가 재미있어 빠져들었고, 프로가 된 이후부터는 최고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지. 그건 마치 축구를 좋아하던 소년이 성장하여 세계 무대를 꿈꾸며 뼈를 깎는 훈련을 마다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실은 무모한 욕심이 아닐까, 그런 고민도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군요. 고맙습니다.”
“다행이구만. 자네의 결단에 고마운 사람은 오히려 나일세. 내가 부탁하지 않았던가. 내 못다 한 꿈을 자네가 이뤄 줬으면 좋겠다고.”
거기까지 말한 백상효의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도 돕겠네. 그럼 올가을에 출전하는 건가?”
나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결기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올해 블랙 앤 블루 대회에 도전하겠습니다.”
비즈비 블랙 앤 블루.
매년 10월에 멕시코 로스카보스의 드넓은 바다에서 펼쳐지는 유서 깊은 낚시 대회.
지상 최대의 상금 규모와 세계 각국에서 찾아든 최고의 앵글러들이 참가하는 명실상부한 낚시 올림픽.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대회에 관한 전부였다.
나는 대회의 경험이 있는 백상효를 만나, 참가 결정을 알림과 동시에 조언을 구하러 온 것이다.
백상효의 앞마당에서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경험과 앞으로의 준비 사항을 설명해 주었고,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자면, 대회는 개인이 아니라 ‘팀’으로 참가해야 한다.
대회는 철저하게 ‘청새치’만을 대상어로 삼고 있으며, 대회 기간 동안 잡은 총무게를 합산하여 최고 포인트를 얻은 사람에게 우승 트로피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다만, 3일간 펼쳐지는 대회에서는 데일리 잭팟이라는 제도가 있어, 종합 우승 외에 당일마다 그날의 최대어를 잡은 사람에게 만만치 않은 상금을 수여한다는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낚시 방법은 생미끼가 아니라 루어를 사용해야 하며, 배를 천천히 끌면서 청새치의 입질을 유도하는 ‘트롤링 낚시’였다.
대화의 말미에 백상효는 현지에서 사용할 스포츠 요트와 최고의 베테랑 선장을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를 도와줄 한두 명의 크루(Crew)들을 추가로 선발하는 일은 앞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찾아뵙길 잘했네요.”
“그런 말 말게. 이건 자네만이 아니라 한국 낚시계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 10월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적당한 때에 나와 청새치를 잡으러 가 보세.”
“멕시코로 말입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너무 멀어서 힘들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가까운 팔라우 정도만 해도 훈련하기에는 문제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쑥섬에서 착수한 비밀 프로젝트와 더불어 생애 최대의 도전에 나서게 된 나는, 올여름 어느 해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내일 참돔 잡으러 가려면 일찍 자야지. 그럼 편히 자게나.”
“안녕히 주무세요.”
두 갈래의 꿈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밤.
초반에 잠시 몸을 뒤척거렸을 뿐, 오랜만에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숙면을 취했다.
간밤에 거대한 청새치가 수면 위로 부상하여 꿈틀거리는 꿈을 꾼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김치에 눌은밥을 챙겨 먹고 출조에 나섰다.
백상효의 개인 보트는 전날 여객선을 내렸던 부둣가에 정박되어 있었다.
“낚싯대도 있고, 타이라바도 충분하니까 고기만 많이 잡아 보게.”
“해 봐야죠.”
“타이라바 낚시처럼 쉬운 게 어딨나? 각자 세 마리씩은 잡을 수 있을 거야.”
전날에 약간의 너울이 일던 바다는 장판처럼 고요했다.
모처럼 백상효와 오붓하게 낚시를 즐길 생각에 나는 은근히 들떠 있었다.
보트는 물살을 가르며 방파제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20분여를 달리던 도중, 백상효가 오른쪽으로 급회전을 시도했다.
“갑자기 자네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 줄 것이 생각났어. 잠깐이면 될 거야.”
“어딘데요?”
“참치 양식장이라고 들어 봤나?”
“우리나라에도 참치 양식을 하나요?”
“그럼. 그것도 여기 욕지도에 있지. 한국 최초의 참다랑어 양식장인데 가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생각지도 못한 좋은 구경을 하게 생겼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뱃머리 쪽을 살펴보니, 멀리 노란색 부표가 달린 해상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보트가 접근하면서 구조물의 형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지름 25미터 정도의 둥근 원형 가두리가 다섯 개나 모여 있는 초대형 양식장이었다.
언뜻 살펴보니, 가두리 사이를 연결하는 안전판 위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마침 먹이를 주는 시간인가 보네.”
백상효는 그렇게 말하고, 보트를 움직여 양식장 귀퉁이에 단단히 묶었다.
“뭐 하나? 올라가서 구경해야지.”
“그래도 됩니까?”
백상효는 대답 대신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형님! 아침밥은 드셨습니까?”
“어어! 백 프로. 와서 좀 도와주겠나?”
“금방 갑니다.”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았다.
나는 백상효의 뒤를 따라 안전대 위를 걸어가며, 가두리를 힐끔거렸다.
돈 주고도 구경하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가두리 안에는 부글부글 물이 끓고 있었다. 수면에 떠 있는 먹이들을 서로 먹으려는 참치들의 몸부림이었다.
“손님이 함께 있었구만.”
“강 프로. 인사드려. 여기 양식장을 운영하시는 황 사장님이셔.”
얼핏 보면 은퇴한 교장 선생님처럼 점잖게 생긴 분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강유록이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백 프로와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젊은이도 낚시꾼이겠죠?
“그렇습니다.”
“천천히 구경해도 됩니다. 가두리 안으로 절대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내 자식 같은 놈들이니까 말입니다. 하하하.”
온화하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정감이 가는 분이었다.
황 사장은 인부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 양식장은 치어들을 잡아다가 키우고 있어요. 대략 삼사 년 키워서, 오륙십 킬로쯤 되면 떠나보낼 때가 되는 거죠.”
그의 말을 들으며 좌우를 둘러보니, 체급별로 구분된 가두리마다 사료용 전갱이와 고등어를 삼키려는 참치들이 수면까지 올라와 꿈틀거리고 있었다.
황 사장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맨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두리였다.
“여기가 아까 말한 다 큰 녀석들입니다.”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어 보니, 그곳에는 1미터가 넘는 대형 참치들이 운동장의 트랙을 도는 것처럼 물속을 활보하고 있었다.
인부들이 먹이를 던지려는 모습을 벌써 눈치챘는지, 참치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달려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황 사장이 인부들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내게 물었다.
“한번 해 볼랍니까?”
“정말입니까?”
“일 시키려는 건 아니니까 한번 해 봐요. 여기까지 왔으면 내 자식들에게 밥은 주고 가야지요.”
고마운 제안이었다.
나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