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대문짝넙치
장재준 영감은 휴대폰으로 전송된 포인트의 정확한 좌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뱃머리를 180도 회전시켰다.
전속력으로 5분여를 달리던 배가 멈추자, 나는 반사적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널찍한 포인트는 아니었지만, 움푹 팬 모래밭 바닥에 크고 작은 광어들이 뒤엉켜 있었다.
동료 선장들을 향한 그의 진심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과도한 선의라는 멤버들의 반박을 무릅쓰고, 장재준 영감의 뚝심이 일궈 낸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 인간들이 우리 골탕 먹이려는 거 아냐?”
포인트의 실체를 알 리 없는 고동우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바다 주변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봉돌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어신이 감지되자, 그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어라? 완전히 맨땅은 아닌가 보네?”
실로 오랜만의 시원한 입질이었다.
잠시 후 고동우가 건져 낸 4짜 광어를 신호탄으로, 사람들은 한동안 잊고 있던 내기 낚시를 상기했다.
“히트! 우리 용감한 어부가 다시 앞서갑니다. 하하.”
“나도 왔어! 이제야 마수걸이로구만.”
지상철이 씩 웃으며 릴을 감기 시작했고, 긴 시간 동안 침묵하던 이몽규마저 입질을 받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에게 질세라 고군분투하며 한 마리를 추가한 고동우가 사심희를 힐끔거렸다.
“사시미 님은 어째 도통 소식이 없네.”
“그러게요, 광어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요.”
배 안에서 유일하게 손맛을 보지 못한 그녀였다.
낚싯대를 드리우기만 했지, 그녀는 낚시보다는 봄바람을 즐기는 일에 더 열심인 것 같았다.
용감한 어부 일행이 도합 열 마리, 우리 편이 일곱 마리.
다들 고만고만한 크기인지라, 무게를 계측해 볼 필요도 없이 승부는 이미 기울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어느덧 장재준 영감이 시계를 확인하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마지막으로 배를 흘려 보고 오늘 낚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허허허.”
짧은 시간 동안, 주거니 받거니 연신 광어들을 올리는 모습에 장재준 영감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승부는 내 계획대로 마지막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별다른 변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엇!”
종료 부저 직전에 터진 사심희의 비명이었다.
축 처진 그녀의 낚싯대로 보아, 처음에는 폐어구에 걸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초릿대에서 생명체의 떨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죠? 올라오기는 하는데, 너무 무거워요!”
“쓰레기에 걸린 거야. 그냥 줄을 끊어. 그러다가 낚싯대 부러지겠어.”
그렇게 말했지만, 사심희는 낑낑거리며 조금씩 줄을 회수하고 있었다.
“어어? 꿈틀거려요! 쓰레기가 아닌 것 같아요!”
요란하게 뱃전을 가른 그녀의 두 번째 비명.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물속으로 불어 넣어 보았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내 두 눈을 부릅뜨게 만든 것은 날개를 펄럭거리며 부상하고 있는 기괴한 형태의 물고기였다.
언뜻 보기에는 대광어를 두 배로 뻥튀기한 괴물처럼 보였다. 그런데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둥그런 형태와 두툼한 살집이 난생처음 보는 물고기였다.
“뭔데 그래?”
“8짜 광어라도 올라오나?”
낚시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와 눈을 번뜩였지만, 사심희는 숨을 헐떡거리며 릴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푸드덕!
수면 가까이까지 올라온 육중한 생명체의 모습에 사람들의 입이 일제히 쩍 벌어졌다.
뜰채를 들고 있던 사무장도 깜짝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미터급에 해당하는 엄청난 사이즈도 놀라웠지만, 누리끼리한 표면의 색깔이 내가 아는 광어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세상에! 10짜 광어도 있나요?”
“빵이 장난이 아니네요!”
“눈알에 하트가 박혀 있는 것 같아.”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다가온 장재준 영감이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게 왜 여기에……. 터봇이라는 물고기입니다. 간혹 우리나라에도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군요.”
터봇(Turbot)
광어의 일종으로 ‘대문짝넙치’ 또는 ‘찰광어’라고 불리는 그것은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는 북유럽 해역의 어종이다.
모두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사무장은 낑낑거리며 뜰채에 담은 마지막 대어를 갑판 위에 내려놓았다.
낚싯대를 접고 달려온 이태권은 터봇에 대해 많이 아는 눈치였다.
“이거 꽤 맛있는 생선이에요. 육질이 단단해서 웬만한 횟감은 저리 가라죠. 제주도에서 양식에 성공했다는데 거기서 탈출한 게 아닐까 싶네요.”
그의 말에 장재준 영감이 헛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최대치로 성장한 걸로 보아, 오래전에 중국 양식장에서 탈출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오늘 사시미 님이 제대로 사고를 치셨네요. 허허.”
무려 10짜에 달하는 광어.
온종일 감감무소식이던 사심희가 그야말로 막판에 대형 사고를 쳤다. 그녀는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럼, 저희 어벤저스가 이긴 건가요?”
“계측 하나 마나잖아요. 서너 마리 무게는 거뜬히 나가겠어요.”
전세는 한 방에 역전되었다.
그렇지만 용감한 어부 출연진들의 얼굴에 아쉬운 구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가끔씩 신기한 사고를 치는 그녀가 기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뒤 나는 짧은 멘트로 오늘의 짬낚시를 마무리하고 나섰다.
“오늘은 우리 어벤저스 팀의 승리입니다. 저녁에는 사시미 님이 잡은 터봇으로 거하게 잔치를 벌이겠습니다.”
웃고 떠들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즐거운 낚시였다.
모두들 손맛도 봤고. 특히 사심희가 막판에 잡은 터봇은 의외의 선물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장재준 영감이 전곡항의 진정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매우 값진 출조이기도 했다.
“아까 손맛이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어요. 묵직한 느낌뿐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중간쯤 올라오면서 이게…….”
사심희는 무척 신이 났다.
모두들 선실에 모여 앉아 그녀의 들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와아아……!”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함성에 나는 앞쪽에 있는 장재준 영감에게 물었다.
“밖에 무슨 일 있나요?”
“캡 포인트에서 누가 대물을 걸었나 봅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배 한 척이 서 있었다. 주변의 위치로 보아, 벽돌이 쌓여 있던 바로 그 위치였다.
“와아아!”
“개우럭이 줄줄이 올라온닷!”
함성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자, 나는 선실을 나와 뱃머리에 올라섰다.
검은 모자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사내였다.
굴비처럼 줄줄이 바늘에 걸려 있는 세 마리의 개우럭을 들고 어떤 사내가 카메라를 향해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누구더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배와 배가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선실로 돌아왔더니,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여전히 사심희였다.
“사시미 님이 오늘 낚시 대회에 출전했어 봐. 광어 대어상은 떼 놓은 당상이었을 거 아냐.”
“그러게. 오백만 원이면 그게 어디야?”
사심희가 이제 그만하라고 열심히 손사래를 치는 사이, 멀리 전곡항이 시야에 들어왔고, 우리 일행들은 하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제 열심히 회만 떠 주고 나면 터봇을 먹으러 가는 건가?”
“그럼요. 회 뜨다가 날밤 새우기까지 하겠어요?”
“자아, 까짓 거 한번 해 봅시다.”
어반자 1호가 선착장에 쿵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케줄 때문에 늦게 도착한 이덕호와 김진성이었다.
“아이고, 이거 늦어서 미안하네. 그리고 축하해.”
“감사합니다.”
“오면서 몽규에게 연락 받았어. 손님들 생선 손질을 해 주기로 했다고 말이야.”
“그런 부탁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별소리를 다 하는군. 이따가 소주나 한잔하세.”
이제 손님들이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우리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 배가 들어오네요.”
낚시를 마친 배가 하나둘씩 입항하면서, 전곡항에는 쉽게 구경하기 힘든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광어 세 마린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저기 잘생긴 이태권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우럭 열 마리 등따기로 손질해 주실 수 있나요?”
“그건 지상철 씨가 전문이죠.”
“집이 가까우니 아예 회로 썰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기 예쁜 여자분이 칼 솜씨가 예술이지요.”
비닐 앞치마를 입은 연예인들이 나란히 앉아, 바닥에 놓인 도마를 두들기고 있었다.
이덕호는 총괄 감독을 한다는 명분으로 손님 응대와 덕담을 담당하는 모양새였다.
무리 중에서 발군의 칼 솜씨를 선보이고 있는 사심희에게서 그윽한 눈길을 떼어 내며, 나는 반대쪽을 살펴보았다.
보람이는 계측을 원하는 낚시꾼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고, 고동우는 수리를 마친 물품들을 손님들에게 돌려주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장재준 영감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카메라를 냉큼 낚아챘다.
“왜 그러십니까?”
“촬영은 제가 할게요. 대신에 오늘 시상식은 캡틴 님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우럭 님이 맡기로 한 거 아닙니까?”
“계획이 바뀌었어요. 아무래도 캡틴 님이 맡아 주시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이, 이런……. 장유유서를 따를 필요까지는…….”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나는 장재준 영감이 오늘의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주인공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잠시 후 나는 손님들과 열심히 노닥거리고 있는 이덕호에게로 다가섰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시상식의 사회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그래? 강 프로 부탁이라면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
한때 국내의 내로라하는 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MC로 활약했다는 그의 옛모습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에게 더 어울리는 역할이 될 거라는 갑작스러운 아이디어였다.
잠시 후 모든 계측이 끝나고, 대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 어반자 낚시 대회에 참석해 주신 열혈 조사님들께 힘찬 박수 부탁해요~~”
이덕호의 낭랑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각 부문의 수상자들이 연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수상자의 면면을 살피던 그때 누군가가 나를 향해 씩 웃고 있었다.
“가, 가만……. 혹시 그때 그분 아닙니까?”
“기억하시네요. 오경환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기억하다마다요. 그럼 아까 쓰리걸이로 우럭을 잡으셨던 분이 바로…….”
“보셨군요. 어쩌다 보니 우럭 부문에서 제가 2등을 하게 되었네요.”
오경환.
그는 오래 전 어반자TV 초창기에 함께 격포항에서 민어 낚싯배에 동승했던 사내였다.
‘언젠가 멋진 낚시꾼이 되어 다시 바다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생초보였던 그는 대물 민어를 어느 욕심 많은 노인에게 빼앗길 뻔했다.
그날 밤 그가 게시판에 올렸던 메시지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하. 정말로 멋진 낚시꾼이 되셨군요.”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신 우럭 님 덕분이죠.”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 인연.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혹시라도 빈손으로 돌아가시게 된 분이 있으시다면, 뒤쪽에 있는 아이스박스에서 한 마리씩 가져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하계 낚시 대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모든 시상이 마무리되고, 장재준 영감의 인사말을 끝으로 축제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날 저녁, 용감한 어부 일행과 우리는 인근의 식당에 모여 질펀한 술자리를 열었다.
사심희가 잡은 터봇은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술자리는 늦게까지 무르익었다.
“용감한 어부와 피싱 어벤저스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던 나도 오늘만큼은 마음껏 마시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별로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도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술값을 계산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