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캡 포인트
“스톱! 캡틴 님,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내 호들갑에 배가 기우뚱 앞으로 쏠렸다.
고동우가 선실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아마 새로운 포인트에 도착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들어가 쉬세요.”
나는 고동우에게 손을 흔들면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장재준 영감이 영문을 몰라 내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모자를 떨어뜨렸습니다. 갑자기 웬 바람이…….”
“허허. 저기 보이는군요. 뒤쪽에 갈고리가 있을 겁니다.”
장재준 영감은 껄껄 웃으면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가 말한 대로 갈고리가 달린 긴 장대를 가져와 난간에 대기했다.
잠시 뒤 장재준 영감은 몇 번의 핸들 조작으로 배의 측면을 모자 가까이에 붙였다.
“뭐 하세요? 어서 건지지 않고.”
“……알겠습니다.”
물에 흠뻑 젖은 모자를 낚아채자, 장재준 영감은 다시 배의 속도를 높이려 가속 레버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조타실 창문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마터면 비싼 모자 수장시킬 뻔……. 어? 그런데 화면에 그게 뭐죠?”
고맙다는 말을 건네려던 찰나 나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어탐기 모니터를 가리켰다.
일단 성공이다.
뭔가 싶어 화면을 살피던 장재준 영감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닥 지형이 심상치 않군요. 어초 같기도 하고…….”
“제가 직접 확인해 볼까요?”
“그럽시다. 어차피 탐사를 나온 마당인데.”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연기였다.
자리로 향하던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너덜너덜한 미끼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서둘러 채비를 내렸다.
수심은 대략 40미터.
제3의 시야를 열고 빙글빙글 회전하며 내려가는 봉돌을 살피면서, 나는 곧 들이닥칠 시원한 입질을 예감했다.
후두두둑!
이래야 우럭이다. 겨울 동안 굶주린 우럭의 포악한 입질에 손끝에 찌릿한 전류가 몰려왔다.
한꺼번에 많은 마릿수를 욕심낼 생각은 없었다.
당장의 급선무는 멤버들에게 이 희소식을 알리는 일이었다.
“왔습니다! 우럭입니다!”
평소답지 않은 큰 목소리였다.
선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뭔 일인가 싶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정말이야?”
“아무 일도 아니라더니. 어라? 정말로 뭔가 잡혀 있네?”
휘둥그레 눈을 치켜뜬 멤버들을 향해, 나는 낚싯대를 번쩍 치켜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오, 씨알이 죽이네. 좋았어!”
채비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커먼 우럭에 눈이 번쩍 뜨인 멤버들은 황급히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잠시 후 낚싯대를 들고 있는 고동우가 몸을 움찔하는가 싶더니, 약을 올리듯 낚싯대를 조금씩 치켜들었다. 입질이 약한 우럭을 유인하는 방법이었다.
“으랏차차! 나도 하나 건졌다. 묵직한 게 애럭은 분명이 아니야!”
곧바로 물고기와는 영 인연이 없던 보람이도 소심한 탄성을 내지르자, 배 안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나도 하나 걸었어요! 담그니까 바로 나오네요.”
사심희가 누구에게 카메라를 가져갈지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또다시 준수한 씨알의 우럭을 끌어 올렸고, 고동우는 욕심을 부려 두 마리의 우럭을 한꺼번에 뱃전에 턱 내려놓았다.
개우럭이라고 할 만큼 대물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3짜 안팎의 사이즈로 일반인들이 손맛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의 중치급들이었다.
“자아, 그만 채비 올리세요.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겠습니다. 허허.”
갑작스러운 장재준 영감의 마이크 소리에 고동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캡틴 님! 한참 재미 보고 있는데 왜 그러세요?”
“탐사 출조 아닙니까?”
“그래도…….”
“좋은 곳을 하나 발견했으니, 다른 곳도 찾아봐야죠. 허허.”
장재준 영감이 오늘 출조의 목적을 상기시키자, 고동우는 찍소리도 못하고 아쉬움을 삼켰다.
배가 이동하는 동안 나는 슬그머니 조타실로 들어가 장재준 영감에게 물었다.
“방금 그곳…… 구입한 포인트 데이터에 없었죠?”
“이 근처는 전혀 표시된 곳이 없었어요. 덕분에 좋은 비밀 포인트를 하나 건진 것 같습니다.”
“그럼…….”
“걱정 마세요. 플로터에 벌써 마킹해 놓았으니까요. 그나저나 우럭 님 모자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허허.”
그의 말처럼 제대로 하나 건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는 바다를 고려한다면, 확실한 포인트가 하나쯤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반자 1호는 장재준 영감이 원래 가려고 했던 국화도 부근의 여밭에 도착했다.
나쁘지 않다.
물속을 확인하는 순간,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바닥이 다소 거칠다는 점만 빼면, 그럭저럭 손맛을 볼 수 있는 포인트였다.
재빨리 채비를 내린 나는 다른 멤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바닥이 까칠까칠합니다. 반 바퀴 띄우고 하시는 게 좋겠어요!”
“오케이! 알았다.”
장재준 영감도 어탐기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수첩에 뭔가 끄적거렸다. 아마도 포인트의 특성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 같았다.
담그자마자 시원한 입질은 없었다.
그렇지만 드문드문 입질이 들어와, 나와 고동우가 방생 사이즈 안팎의 고만고만한 우럭들을 몇 마리씩 건졌다.
다만 안타깝게도 보람이는 밑걸림으로 채비를 날리거나, 헛챔질을 연발하며 고동우의 핀잔을 샀다.
“도라에몽은 언제쯤 실력 발휘를 할래? 어째 예전보다 더 헤매는 것 같어.”
그럭저럭 지나가다 들러 봄직한 포인트임을 확인하고, 배는 다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낚시 시작하세요.”
그리고 잠시 후.
“안 되겠네요. 채비 걷으세요. 또 이동하겠습니다.”
그렇게 두어 군데를 찔러 본 이후, 배 안에는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고기가 안 나오니까 피곤하구나, 아까 그 어초밭이 참 좋았는데.”
고동우가 푸념을 늘어놓자, 장재준 영감이 밖으로 나와 우리에게 넌지시 말했다.
“곧 물이 빨라질 시간입니다. 우럭 탐사는 이만 접고, 일단 점심이나 먹읍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심희는 보람이의 개인 물칸에서 노래미 두 마리를 꺼내 왔다.
“오늘 점심은 노래미 회덮밥 어때요?”
“조오치. 밥 먹고 힘내서 또 해 보자고.”
파이팅을 외치며 선실로 몰려 들어가는 동안, 나는 아쉬운 눈빛으로 바다를 힐끔거렸다.
“점심 준비하는 동안 저는 배를 멀리 대고 오겠습니다.”
식사 도중에 배가 흘러가다 육지나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있다. 장재준 영감의 말은 배를 멀리 떨어진 안전한 위치로 이동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사심희는 어반자 1호의 주방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냉장고에 쿡탑에 전기밥솥까지. 여기서 살아도 되겠어요.”
그녀는 도마 위에 노래미 두 마리를 올려놓고 현란한 칼질을 시연했다.
그리고 어느새 뚝딱뚝딱 집에서 준비해 온 식은 밥을 그릇에 소분하여 먹음직스러운 회덮밥을 완성했다.
멤버들은 맛있는 식사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고, 장재준 영감은 조타실을 비운 게 못내 걱정되는지 간간이 주변을 힐끔거렸다.
제일 먼저 그릇을 비운 보람이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천천히들 드세요.”
담배를 피우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보람이는 자신의 자리에 다가가, 낚싯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고동우가 낮은 목소리로 수군댔다.
“도라에몽 님은 오늘도 고전이네. 아까부터 탐사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 낙담하고 있더라고. 어째 실력이 저 모양인지. 쯧쯧.”
보람이에게서 외마디 탄식 들려온 것은 고동우가 그를 힐끔거리며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였다.
“억!”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낚싯대를 거꾸로 세우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새를 못 참고 아까운 채비만 또 날리는구나. 쯧쯧.”
고동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뭔가 미심쩍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라에몽! 뭔데 그래?”
“바닥에 걸린 것 같아. 분명히 입질 같았는데…….”
“어디 보자.”
무심코 물속을 들여다본 나는 하마터면 보람이처럼 억 소리를 낼 뻔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침선은 분명히 아니었다. 바닥에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벽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오래전에 벽돌을 싣고 가던 대형 운반선이 사고로 왕창 쏟아 놓은 것으로 보였다.
벽돌 무더기의 반경은 대략 20미터, 높이는 2미터 정도. 엄청난 규모라 할 수는 없었지만, 벽돌 구멍 틈새마다 머리를 내밀고 있는 물고기들이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람이의 봉돌이 벽돌 틈에 박혀 있었고, 기다랗게 늘어진 가짓줄에는 튼실한 우럭 한 마리가 아직 탈출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리 줘 봐.”
나는 보람이의 낚싯대를 낚아채고, 가볍게 초릿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꼼짝도 안 해. 그냥 끊어 버려도 돼. 어차피…….”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나는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고, 바닥의 화질을 선명하게 조정했다. 그리고 봉돌이 박힌 방향을 계산하여 낚싯대를 휘리릭 흔들었다.
폭! 후두두둑!
벽돌 틈에 낀 봉돌이 빠져나오자마자, 낚싯대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 있어! 도라에몽! 네가 끌어 올려.”
나는 낚싯대를 보람이에게 돌려주고, 옆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물고기가 달려 있음을 확인한 보람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올라온다! 거봐! 분명히 입질이었다고 했잖아.”
뭔 일인가 싶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던 고동우의 입에서 밥알이 몇 개 쏟아졌다.
4짜 우럭이었다.
오늘의 최대어를 번쩍 들고 헤죽거리는 보람이의 모습에, 모두들 일제히 밥숟가락을 내려놓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발견이었다.
나는 내 자리로 달려가며, 장재준 영감에게 외쳤다.
“바닥에 뭔가 있어요! 캡틴 님은 어탐기 확인 좀 해 주세요!”
후둑! 투두두두둑!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내만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개우럭 잔치였다.
적절한 타이밍에 장재준 영감의 멘트가 튀어나왔다.
“바닥에서 2미터 정도 띄우세요! 채비 올리신 분들은 일단 내리지 마시고, 내가 신호하면 그때 시작하세요.”
내가 쌍걸이로 굵은 우럭을 뽑아내자, 배는 크게 한 바퀴 돌아 포인트 재진입을 시도했다.
바닥을 확인하고 두어 바퀴 릴을 감아올리자, 잠시 후 포악한 우럭들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죽인다! 완전 대박이로구나!”
선두에 위치한 나와 고동우가 시원한 입질을 받으면서 전동릴을 작동시켰고, 뒤이어 보람이의 낚싯대에도 어신이 감지되었다.
잠시 후 세 남자의 머리 위에 우럭 비가 내렸다.
식사 도중에 엉겁결에 멋진 포인트를 발굴하게 된 감격의 순간이었다.
장재준 영감이 조타실 안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러분 덕분에 우럭 탐사는 대성공입니다. 이제 여세를 몰아 광어를 치러 가 봅시다.”
예상치 않았던 보람이의 활약으로 오전의 광어 탐사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배가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며 라이트 지깅대를 꺼내 들었다.
오후의 광어 탐사 또한 오전과 유사한 양상으로 이어졌다.
데이터에 표시된 몇몇 포인트에서는 깻잎 광어들을 몇 장 줍는 데 그쳤다. 하지만 달리던 배가 갑자기 멈춘 의외의 장소에서 우리는 대물 광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후 늦게 귀항을 하던 도중, 나는 바닷물에 젖은 모자를 선실 벽에 걸어 놓았다.
의자에 길게 몸을 젖힌 고동우가 조타석에 앉은 장재준 영감을 가리키며 말했다.
“캡틴 님도 오늘처럼만 하시면 인근에서 최고 선장 소리를 들을 거야.”
“당연하죠. 그런데 오늘 새롭게 발견한 포인트들에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뜬금없는 보람이의 말에 다들 눈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보람이는 헤죽거리며 벽에 걸린 내 모자를 가리켰다.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죄다 저 모자가 떨어진 곳이었잖아요. 제가 점심 먹고 나서 발견한 곳 말고는. 안 그래요?”
“하하하. 듣고 보니까 그렇군. 아마 그 모자가 복덩어리였어. 그거 절대로 버리지 말고, 다음에도 쓰고 와라.”
고동우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그때 앞쪽에서 우리 얘기를 듣던 장재준 영감이 끼어들었다.
“암요. 모자 덕분이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발굴한 포인트를 우리끼리는 ‘캡 포인트’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허.”
캡 포인트.
이름이야 뭐든 상관없었다. 나는 단지 장재준 영감의 얼굴에 돌아온 여유로운 웃음을 볼 수 있어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