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결실의 계절
한 달여의 세월이 흐르고 봄기운이 완연한 3월 하순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꼬박 일 년이 지난 오늘, 나는 완연한 봄기운을 만끽하며 인천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남해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남도의 바다를 종횡무진 누볐다.
여수에서 신발짝만 한 열기(불볼락)로 아이스박스를 가득 채웠고, 제주 근해에서 벌어진 겨울철 대삼치 낚시와 방어 낚시로 진한 손맛을 만끽했다.
특히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여행 삼아 찾아간 우도 직벽에서는, 다수의 벵에돔을 만나는 행운이 따라 주었다.
영등철(음력 2월을 일컫는 말로 일 년 중 가장 수온이 낮아 고기가 잡히지 않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느 때보다 낚시에 열중한 원동력은 하나뿐이었다.
기이한 능력의 근원을 따라가고, 외삼촌의 과거를 쫓는 과정에서 파생되었던 혼돈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더욱 강한 정신력으로 재무장하게 되었고, 즐거움을 추구하던 과거의 나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준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차에서 내렸다.
대략 100여 대를 동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천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에 입지를 선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뜻하게 단장한 3층 건물 앞에 고동우가 서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구피 님! 축하합니다!”
“어서 와라.”
“다른 분들은요?”
“금방 오겠지. 그것보다 인사할 사람이 있으니, 따라와라.”
먼저 도착한 고동우는 몹시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그토록 염원하던 어반자스토어 2호점 개업식 날이었다.
“건물이 생각보다 크네요.”
“변두리라 임대료가 싸더라고.”
인사를 나누고 고동우의 옷차림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마른 체구에 걸친 헐렁한 정장 때문이었다. 작년에 멀티싱커를 처음 팔러 다니던 날 입고 있던 낡은 양복이었다.
“옷 좀 번듯할 걸로 한 벌 장만하시지 그랬어요.”
“내 양복이 어때서? 우리 아들 장가갈 때까지 입으려고 아껴 둔 건데.”
“그래도 명색이 어반자 계열사의 대표님인데…….”
핀잔을 줘 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고동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1층 내부의 구석진 자리였다.
키도 크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내가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나를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우럭 님, 아니, 강유록 사장님!”
누구인지 몰라 고동우를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그 사내를 소개했다.
“아! 초면이구나. 2호점 사장이야. 공채로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인재 중의 인재지.”
“아! 반갑습니다. 그런데 성함이…….”
“조구식이라고 합니다. 어반자TV 애청자라고 가산점을 받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번듯한 외모와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토속적인 이름이었다. 나는 반갑게 그와 손을 흔들고 다시 입구 쪽으로 나왔다.
때마침 반가운 얼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일찍 왔네요?”
“나도 금방 왔어.”
사심희에 이어 보람이와 장재준 영감과 눈인사를 나누자마자 고동우가 우리를 재촉했다.
“다들 오셨으니까, 얼른 따라들 오세요.”
테이프 커팅이라든가, 고사를 지낸다든가, 개업식이라고 해서 그런 요식적인 절차는 전혀 없었다.
매장을 둘러보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간소한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내는 새로 영입된 조구식 사장이 맡았다.
“1층은 소모품 매장입니다. 멀티싱커 전용 매대는 1호점과 비교하여 세 배나 키워 놓았습니다.”
널찍한 공간에 빼곡히 세워져 있는 매대만 봐도 가히 국내 최대 규모임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각종 바늘과 루어 용폼, 낚싯줄, 액세서리, 미끼류 등이 매대마다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보람이는 멀티싱커 매대에 특히 오랜 시간 머물렀고, 사심희는 신기하게 생긴 루어들을 구경하느라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억지로 그들을 잡아끌고 올라간 2층은 소모품을 제외한 낚시 용품들의 천국이었다.
가격대별로 어종별 낚싯대와 릴 상품들이 빠짐없이 구색을 갖춘 그야말로 낚시 백화점이었다. 아이스박스들도 용량별로 구분되어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올라간 3층은 낚시 패션 전용 공간이었다.
각종 낚시복과 구명조끼는 물론, 낚시 장화를 포함한 신발류까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우리도 온 김에 한 벌씩 골라 볼까요?”
사심희의 제안에 모두들 앞다투어 옷을 고르고, 입어 보느라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3층 귀퉁이에서 멤버들을 지켜보던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그들에게 외쳤다.
“그만 이동해야 할 시간입니다! 공장에서 사람들 기다리겠어요.”
하루에 경사가 두 개나 겹쳤다. 그야말로 결실의 계절이었다.
어반자스토어 2호점 개업식에 이어 어반자팩토리 신공장 이전을 축하하는 방문 일정이 임박해 있었다.
부랴부랴 낚시복을 골라 계산을 마친 멤버들과 함께 나는 두 번째 행선지로 출발했다.
* * *
평택항 인근의 공단.
차에서 내려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보람이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인근에 매물로 나온 기성 공장을 매입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늘어나는 수출 물량을 감당하기에 기존 수원 공장의 생산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멀티싱커 제품은 당초 일본 파트너 업체가 예상한 수요량을 크게 넘어섰다.
두 번째는 이유는 그동안 외주에 의존하던 도금 공정을 일괄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었다.
폐수와 대기오염 물질의 집중 관리가 가능한 공단에서는 자체 도금 공정을 운영할 수 있어, 적지 않은 생산비와 물류비 절감을 기대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인접한 평택항의 물류 기능이었다.
내수에 비해 수출의 비중이 커진 시점에서, 보람이는 수출 선적이 용이한 평택항을 염두에 두었다.
“공장이 참 널찍해서 좋다.”
“그러게요. 너무 깔끔해서 신발 벗고 들어가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허허.”
공장동은 기존의 공장보다 세 배 정도 큰 규모였다.
나는 왼쪽 구석의 빈 공간을 가리키며 보람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무리한 거 아냐? 공장이 좀 휑한데?”
“그래 보이지? 다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넓은 곳으로 옮긴 거야 ”
“너, 설마…….”
“눈치도 빠르네. 다른 낚시용품을 구상 중이야. 유휴 공간은 조만간 다른 설비들로 채워질 거야.”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보람이는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제품을 궁리 중인가 물어보려 할 때, 보람이가 멤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정도 보셨으면 됐어요. 이제 사무동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보람이를 따라간 사무동은 아담한 규모였지만, 예전의 컨테이너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산뜻했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멤버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직원들과의 상견례를 마치고, 보람이가 안내한 곳은 회의실이었다.
고동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보람이에게 물었다.
“네 방은 어디냐? 여긴 회의실 같은데.”
“제 방은 없어요. 직원들과 같이 사무실을 쓰거든요.”
“어허, 그래도 명색이 사장인데.”
“하루 종일 공장에 있는데 그럴 필요 있나요. 안 그래도 제 방을 꾸민다길래 직원들 휴게 공간으로 쓰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보람이다운 면모였다.
그러고 보니, 회의실로 오는 길에 작은 휴게실에서 직원들이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보람이가 직접 내린 드립 커피를 마시는 도중, 멤버들의 관심사는 장재준 영감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럼 캡틴 님 배는 내일 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저께 여수에서 시범 운행까지 마쳤어요. 신조선이라 그런지 쭉쭉 나가더군요. 허허.”
“그럼 일주일 뒤에 전곡항으로 가면 되는 거죠?”
“탐사 출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와 주세요. 모두들 와 주실 수 있지요?”
장재준 영감은 최근 안양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곡항 근처의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멤버들이 입을 모아 집들이를 원했지만, 그는 한사코 노인네 혼자 사는 집을 보여 주기 민망하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그럼요. 만사 제쳐 놓고 가겠습니다.”
두 개의 계열사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 막 탄생한 마지막 계열사는 출발대 위에 서 있었다.
꽃 피는 봄과 함께 어반자 계열사들의 굵직한 이벤트들이 말 그대로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한량없이 기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축배의 나날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아이러니한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신조선에 들어간 투자비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배를 건조하는 금액은 그럭저럭 예산 범위 내에 들어왔지만, 각종 부대 시설과 전자 장비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또다시 나를 찾아온 자금 압박.
봄은 왔지만 춘궁기가 도래했다. 적지 않은 돈이 매달 통장에 꽂히고 있었지만, 신조선 투자비로 법인 통장에 남아 있던 모든 자금을 털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슬슬 나가서 식사나 하시죠.”
차도 다 마시고, 멤버들의 이야깃거리도 떨어질 무렵, 보람이가 자리를 정리하고 나섰다.
고동우가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며 보람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래. 아침부터 굶어서 배가 쪼그라들었다. 구내 식당 있지?”
“직원 수가 적어서 아직은요. 대신에 근처에 아주 죽이는 곱창전골집을 봐 뒀습니다.”
“곱창 좋지! 후딱 앞장서라.”
모두들 신이 나서 회의실을 나서려 할 때, 보람이가 내게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는 우럭 님과 5분만 있다가 나중에 갈게요.”
내게 따로 뭔 얘기를 하려는지 아리송했다.
보람이는 씩 웃으면서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읽어 봐. 나야 까막눈이다만 너는 큰 회사 다녔으니까 금방 알아볼 거야.”
뭔가 싶어 미간을 좁히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잠시 후 서류를 확인하던 내 동공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작년 재무제표구나!”
“어제 막 결산이 확정되었다면서 회계 직원이 주더라고.”
“매출이…….”
나는 크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수치였다. 불과 반년 동안의 매출을 연간으로 환산하면 웬만한 중견기업에 버금가는 규모였던 것이다.
보람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사실은 나도 놀랐어.”
“……이익률이 도대체 몇 퍼센트지?”
“몰라. 네가 계산해 봐.”
사업 첫 연도의 제조업체에서 이뤄 낸 성과라기에는 이익률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류를 내려놓은 나는 보람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걸 나에게 보여 주는 거지?”
“아무리 알아서 하라고는 했지만, 결과는 당연히 보고해야지. 최대 주주잖아.”
“최대 주주는 내가 아냐. 너와 어반자TV가 반반씩…….”
“어반자TV는 네가 주인이니까 그게 그거지. 아무튼 이번 주주 총회에서 약간의 배당을 안건으로 올렸으니까 그리 알아.”
“배당금? 공장 옮기느라 적잖은 돈이 들었을 텐데.”
“물론 그랬지. 하지만 강소기업인가 뭔가 우대한다면서 지자체에서 적잖은 편의를 봐주더라고. 기존 주인이 급매물이라고 싸게 내놓기도 했고.”
“그래도…….”
“당분간은 크게 돈 들어갈 일은 없어. 회계사가 다 검토해서 추진하는 배당이라고. 보아하니 너도 어반자 마린에 몽땅 털어놓고 손가락 빠는 눈친데.”
“…….”
설립한 지 일 년도 안 된 신생 회사가 배당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만큼 어반자팩토리의 초반 살림살이가 양호하다는 방증이었다.
모회사의 자금 사정이 일시적으로 어렵다고는 하지만, 한두 달만 버티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보람이가 어색한 대화에 쐐기를 박고 나섰다.
“우리 회사의 절반은 네 거야. 네 아이디어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자리에 없는 거지. 언제까지 자회사들 뒷바라지만 하고 살 거야? 배당은 나도 받는 거야. 우리 부모님 작은 집이라도 한 채 사 드리려고 해. 그러니까 너도 그 곰팡이 냄새 나는 자취방부터 좀 탈출해 봐.”
짜아식……. 내 사정을 어떻게 알고…….
묘하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보람이에게 들키지 않으려, 나는 회의실 유리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벚꽃나무 가지에 단단히 맺혀 있는 꽃봉오리가 눈에 띄었다. 거리에도 내 마음속에도 진정한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