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전지훈련
안양의 어느 회전 초밥 식당.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남해로 내려갔던 그날 저녁, 당일치기로 돌아온 내게 사심희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보다 일이 쉽게 풀렸어.”
“다행이네요. 베타를 맡기길래 사나흘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일이 쉽게 풀렸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었다.
이해구가 침묵이나 거짓말로만 일관했다면 나로서도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이제 모든 결과는 그와의 승부에 달렸으니, 단순명료해진 것만은 틀림없었다.
사심희는 벌써 세 접시째였다.
다가오는 성게알 초밥을 집을까 망설이는 나를 곁눈질하며 사심희가 키득거렸다.
“노란색 접시만 드시네요? 오늘은 제가 살 테니 맘껏 먹어요.”
“비싸서 그런 게 아니야. 식욕이 좀 없네.”
“일도 잘 끝마쳤다면서 어째 개운한 표정은 아닌데요?”
사심희의 눈은 못 속인다.
그녀는 내 얼굴에 서린 어두운 그늘을 눈치채고 있었다.
휴우.
나는 가벼운 한숨을 토해 내며, 이해구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끌 것 없겠지. 딱 일주일 후에 만나세. 대결 장소는 조만간 문자로 보내 주겠네. 거기서 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네. 이번 대결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야 하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나. 당연하겠지만 자네의 개인 방송에 내보낼 생각도 마시게.’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대결…….
굳이 떠벌릴 이유도 없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에 걸리는 조건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또다시 속임수를 시도하려는 꿍꿍이가 아닐까 하는.
사심희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직 완전히 마무리하지는 못했거든. 곧 끝낼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말꼬리를 길게 흐리자, 사심희가 피식 웃으며 선수를 쳤다.
“또 남해로 가야 한다는 거죠? 얼른 가서 잘 끝마치고 오세요.”
“……고마워.”
이번에도 사심희는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이해구 노인의 신신당부가 마음에 걸렸다.
다만 시종일관 쿨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에게 살짝 서운한 감도 없지는 않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은 해요.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든, 우럭 님을 믿어요.”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와 낚시 대결을 하게 되었어. 상대방이 누군지는 말할 수 없고, 방송에도 내보내지 않을 거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왠지 걱정이 드네요.”
“무슨 걱정?”
“우럭 님 눈빛이 달라졌어요. 낚시를 떠나든 누군가와 대결을 하든, 늘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였죠. 하지만 지금은 그 안에 불안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
그녀에게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머쓱해졌다.
지금까지는 즐거움을 위한 낚시만 해 오던 나였다. 이기고 지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내가 원한 승부도 아니었고,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그리고 정작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대결 상대방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오래 전 낚시 대회를 3연패했다는 사실과 백정철이 그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거의 전부였다.
내가 서둘러 남해로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겠죠. 그렇다면 이기고 돌아오세요.”
“……그래. 그렇게 할게.”
말하지 않아도 내 편에 서 주는 그녀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너무나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언제 내려가요?”
“내일 당장. 딱 일주일만 있다가 올라올게.”
“알았어요. 그런데 이번 주말에 준서와의 약속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있었지만, 방송 일정까지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해야지. 미안하지만 그날 준서를 데리고 남해로 와 줘. 서울 남부터미널에 가면 남해로 오는 버스가 있을 거야.”
“좋아요. 그럼 베타는요?”
“베타는 내가 데리고 갈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나는 기민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불안을 해소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호랑이 굴에 들어가 있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동안 나는 남해에서 이해구에 대한 정보들을 최대한 수집할 작정이었다.
* * *
“남해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았습니까? 아이고, 이번에는 고양이도 같이 왔네? 반갑다. 야옹아.”
“야~~~ 옹.”
다녀간 지 오래지 않아, 또다시 나타난 나를 보고 공태운 선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따뜻해서 전지훈련하기 딱 좋은 곳 아닙니까? 방은 잘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럼요. 전지훈련이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 주세요.”
“조만간 선장님 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루 전날 말씀드리면 되나요?”
“당일에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요즘 추워서 누가 낚시 오겠습니까?”
간단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나는 민박집에 짐을 옮겼다.
짐이라고 해 봐야 몇 벌의 속옷들이 전부였고, 거의 대부분은 각종 낚시용품들이었다.
민박집 1층의 작은방에 아무렇게나 짐을 내려놓고, 나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오, 강유록이가 또 무슨 일이고?”
“하하. 안녕하셨습니까? 미니중기 어르신.”
“어르신이라 하지 말라고 안 했드나?”
“아, 죄송합니다. 혀, 형님.”
70 노인에게 형님 호칭은 과하다는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어디고?”
“남해에 막 도착했습니다.”
“……해구 그넘 때문에 온 기가?”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남해로 낚시 훈련을 왔습니다.”
“그래? 그럼 언제 술이나 한잔할까?”
“술은 좀 그렇고요. 형님 시간 되시면 언제 낚시나 같이하시죠.”
“낚시? 그거 좋지. 아무리 테레비 나오는 사람이라도 내 상대는 안 될 끼다만. 하하.”
“공 선장님 배를 탈까 하는데 언제가 편하시겠습니까?”
“아무 때나 좋다. 요즘에는 땅이 꽁꽁 얼어붙어서 포클레인 부르는 사람도 없다 아이가.”
내친김에 다음 날 저녁으로 약속을 정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구에 대한 정보를 얻을 대상은 그와 공 선장 두 사람뿐이다.
물론 미니중기 노인에게도 이해구와의 대결은 비밀로 할 작정이었다.
통화를 마친 나는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왔더니, 민박집이 우리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베타도 여름에 왔던 기억이 있는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방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베타와 민박집을 나섰다. 아침 산책이나 하려던 참이었다.
“야~~~~~ 옹!”
문을 나서자마자 베타가 뛰어가는 곳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죽방 멸치 가게 앞이었다.
문도 열지 않은 가게 문 앞에서 베타를 안아 들었을 때, 누군가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강유록이 벌써 일어났나?”
뒤를 돌아보니 미니중기 노인이 낚시점 앞 나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의 앞에 작달막한 낚싯대가 놓여 있었다.
“저녁에 만나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생각해 보니, 오늘 밤에 딸이랑 사위가 오는 날이더라. 자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야 상관없지만…….”
딱히 다른 일정이 없었던 터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욱한 담배 연기를 손으로 치우면서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
“자네 고양인가?”
“네. 같이 내려왔습니다.”
“참 예쁘게도 생겼다. 우리 손주가 보면 참 좋아하겠다.”
“언제 한번 같이 놀러 오시죠. 아침은 드셨습니까?”
“당연히 먹었지. 그건 그렇고…….”
미니중기 노인의 말꼬리가 흐려지는 걸로 보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이해구 어르신 때문이시죠?”
“그렇다. 한번 만나 봤드나?”
“……아닙니다. 막상 찾아가려니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좀…….”
“흠……. 내 그럴 줄 알았다. 잘했다. 자네에게 괜한 말을 지껄이고 나서 나도 속이 시끄러웠다 아이가. 훌훌 털어 버려라. 그냥 낚시나 즐기며 사는 게 장땡인 기라.”
“알겠습니다. 어르신. 아니, 형님.”
미니중기 노인이 또 한 개의 담배를 꺼내고 있을 때, 낚시점 2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이고, 선수들 다 모여 계셨군요. 아침부터 미니중기 형님 전화 때문에 잠을 설쳐서리…….”
공태운 선장이었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목이 긴 방한 장화까지 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낚시를 가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선장님! 오늘 뭘 잡으러 가는 건가요?”
“추운 겨울에 뭐가 나올지 나도 모르겠어요. 미니중기 형님한테 물어보소.”
고개를 돌려 보니, 미니중기 노인이 겸연쩍게 웃고 있었다.
“오늘 잡아야 할 게 좀 다양하다. 우리 딸네 식구들 입맛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럼……?”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잡는 기다. 우리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야 있겠나?”
다 잡아 낚시.
돌려 말하면 딱히 대상어가 없다는 말이었다. 불현듯 오래전 통영 근해에서 붉바리를 포함한 다양한 어종을 골라잡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낚싯대를 가져가야 할지 어리둥절해하던 그때, 선장이 낡은 낚싯대 하나를 내밀었다.
“찔찔이대 알죠? 오늘은 이걸로 하시면 됩니다.”
“……찔찔이대요?”
3단으로 뽑아서 쓰는 가느다란 낚싯대였다. 그러고 보니 미니중기 노인이 가져온 것도 같은 종류였다.
“채비와 미끼도 넉넉히 챙겼으니 몸만 가면 됩니다. 자, 슬슬 떠나 볼까요?”
공 선장의 말에 나는 얼른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그가 실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돈은 벌써 형님이 내셨어요.”
“네에? 그러시면 안 되죠.”
돌아보니 미니중기 노인이 장난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내 돈 많다 안 하더나? 지난번에 해장국도 얻어먹었는데 나도 양심이 있다 아이가? 유명인이 우리 동네로 전지훈련 온 기념이다. 맘껏 고기나 잡아라.”
“하…… 고맙습니다. 형님.”
그렇게 엉겁결에 떠나게 된 낚시였다.
산책을 나왔던 베타도 꼼짝없이 배에 함께 올랐다.
공 선장은 두 척의 낚싯배를 가지고 있었다.
나란히 정박된 7톤급과 2톤급의 낚싯배 중에서 우리는 작은 배에 승선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라고 하면 아나? 우리가 즐겨 찾는 냉장고 포인트가 있다 아이가?”
대상어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내게 출조지를 알려 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다만 작은 배를 선택한 것으로 미루어 멀리 가지 않을 거라는 짐작할 수는 있었다.
배가 출발하고 뱃머리가 왼쪽을 향했다.
창선교 교각을 지나고 5분 정도를 달리자, 근처에 낯익은 방파제가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후 나는 흔들리는 시선을 멀리 언덕 위로 옮겼다.
우뚝 솟은 이층집.
이해구의 파란 대문은 오늘도 굳게 닫혀 있었다.
전지훈련을 핑계로 호랑이 굴에 뛰어든 첫날이었다.
겨울이지만 해가 높이 솟아올라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낚싯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이 낚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