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가거초
“우럭님 휴대폰 맞죠?”
“아아, 혁준 님…….”
실로 오랜만의 통화였다.
얼른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보니,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잘 지내시죠?”
“그럼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야 전화를 드렸네요. 그래도 보내 주신 우럭 덕분에 회복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하하.”
큰 수술을 끝내고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그였다.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하늘에 감사할 일이었다.
“목소리가 밝아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 시간 되면 진주로 한번 놀러 오세요. 화면상으로는 가끔 보고 있지만, 얼굴이나 보고 싶군요.”
“어반자TV를 보고 계셨군요?”
“그럼요. 아무튼 오늘 복대를 풀었습니다. 집이나 근처에도 나갈 수 있으니, 편하게 오세요.”
“추운데 집에서 뵈어야죠. 조만간 꼭 가겠습니다.”
“아! 백정철 프로님도 오시겠답니다. 서로 시간 맞춰서 함께 오셔도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기적적으로 두 번째 생을 맞은 사내.
언젠가 꼭 그를 만나게 되리라 생각하고는 있었다. 안부도 궁금했지만, 그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있어서였다.
감성돔의 비늘로 장식한 스피닝 릴.
언젠가 그가 내게 맡겨 둔 물건을 나는 고이 책상 서랍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낚시 대회에 함께 참가했던 그분이군요?”
“맞아. 아, 사시미 님은 못 봤지?”
“대회 규정 때문에 못 갔잖아요.”
“그랬었지.”
불과 지난 해 10월이 있던 대회였는데, 까마득한 예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사심희와 안양에 도착한 나는 그녀의 집 근처에서 국밥을 한 그릇 해치우고 있었다.
허겁지겁 국밥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나를 향해 사심희가 물었다.
“다음 출조는 결정했어요?”
“아니. 슬슬 생각해 봐야지…… 아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불현듯 김혁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심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우럭이죠?”
“나보다 나를 잘 아네. 혁준 님에게 가져갈 우럭을 구해야겠어.”
“좋은 생각이긴 한데, 우럭 시즌이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하지만 마지막 남은 보루가 있거든.”
“그게 어딘데요?”
“아주 먼 곳이야. 가거초라고 부르지.”
가거초.
가거도에서도 서쪽으로 47Km나 더 가야 하는 천혜의 수중 암벽과 자연 어초가 형성된 곳.
회유성 어종도 물론이지만 특히 붙박이 어종인 우럭들이 겨울을 피해 드글드글 모여 산다는 그곳.
갑작스레 출조지와 대상어를 결정하게 된 것은, 순전히 김혁준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 * *
“여기가 어디죠?”
“아직 멀었어. 더 자도 돼.”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예요?”
“많이 왔어. 이제 세 시간이면 도착할 거야.”
“으으음…….”
사심희가 잠꼬대 비슷한 몇 마디를 묻더니 다시 잠들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막 동이 터 오기 시작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1월 중순의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전날 서울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여 새벽 2시에 진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새벽 3시경 배에 올라 벌써 세 시간째 긴 항해를 하던 중이었다.
서해에서는 벌써 우럭 시즌이 끝난 동절기.
열혈 조사들만이 찾아온다는 꿈의 낚시터까지는 아직도 세 시간이나 더 가야 했다.
이게 뭔 고생이람…….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가거초까지 가 볼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시간과 거리의 압박이 가장 큰 이유였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사용할까 궁리한 적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돌아와서 수일간 좀비처럼 회사 생활을 할 각오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다.
고생길이 너무 빤하게 보여, 처음에는 사심희에게 이번에는 집에서 쉬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쉽게 가 보기 어려운 장소라는 점이 오히려 그녀의 의욕을 부채질했다.
결국 가거초 낚시를 마칠 때까지만 동행하고, 목포역까지 그녀를 바래다주는 것으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그녀는 먼저 올라가 베타를 돌봐 주기로 했고, 나는 따로 진주로 움직여 백정철과 함께 김혁준의 집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여기 아침 식사요. 출출하실 텐데. 허허.”
선장이 실실 웃으며 다가와 도시락 두 개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그는 오밤중에 찾아온 두 명의 남녀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독배 예약에 달랑 한 명만 낚시를 한다니 그럴 만도 했다. 형편없는 조황으로 손님들 홍보에 지장을 초래할 거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혹시 얼마 전에 용감한 어부에 나오신 분 아니세요?’
내 얼굴을 알아본 선장은 분주하게 출항을 준비했고, 유명 낚시 채널 촬영차 왔다는 말에 완전히 태도가 바뀌었다.
“일어나. 아침은 먹어야지.”
“……먼저 먹어요. 멀미 기운이 있어서…….”
“그러게 집에 있으라니까.”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사심희를 흔들어 깨웠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뭐라도 속을 채워야 할 것 같아, 나 홀로 차가운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으려다 곧 그만두고 말았다.
아침 9시경.
꾸르릉 소리를 내며 배가 급격히 속도를 늦췄다. 긴 항해의 끝을 알리는 현상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바다의 상태부터 살폈다.
3물. 중들물 타임.
적당히 물이 흐르고 물색도 괜찮은 상태였다. 우럭 낚시에는 일반적으로 조금물때가 유리하다. 하지만 가거초에서는 오히려 물색이 탁할 때가 많다는 사전 정보가 있었다.
5단 채비.
잘게 잘라 준비해 온 오징어채를 꿰고 있을 때, 사심희가 창백한 얼굴로 선실에서 기어 나왔다.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 낚시는 천천히 시작할 테니까.”
“알았어요. 미안해요.”
아이스박스에 앉아 몇 숟가락 뜨던 그녀는 곧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목표 마릿수만 챙기고 얼른 돌아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선실로 들어가 있어. 촬영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눈에 잔뜩 힘을 주었더니, 사심희는 피식 웃으며 선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카메라를 선수 갑판이 잘 보이는 난간에 고정하고 서둘러 낚싯대를 폈다.
거의 반나절 동안 달려온 곳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 시간 안에 모든 낚시를 끝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치가 적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애초의 계획은 김혁준에게 선물하려는 열 마리 정도만 챙기면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번부터 나눔 대상자 선정을 마음씨 착한 사심희에게 넘긴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분에게도 한두 마리 보내 줘야겠어요.’
‘어쩜, 아내에게 산후조리를 해 주고 싶다잖아요. 여기도…….’
그렇게 늘어난 나눔 목표는 김혁준을 제외하고도 모두 열두 마리였다.
아무리 가거초라지만 추운 겨울에 도합 스물두 마리의 우럭을 잡아야 한다니, 사심희의 결정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나를 과신하는 건 아닌지 야속하기도 했다.
배는 계속해서 흘러갔지만 나는 선뜻 채비를 던지지 않았다. 조타실에 앉은 선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심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아 바다에 잠긴 산의 거의 정상이었다. 우럭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깊이 굴곡진 계곡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작심하고 채비를 내려놓았다.
후두둑! 후두둑!
기다렸다는 듯이 낚싯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굶주려 왔는지 그야말로 시원한 입질이었다.
두 바퀴를 감고 기다릴 틈도 없이 세 마리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굵은 씨알이라는 것은 굳이 물속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위잉~ 위잉~
전동릴이 돌아가고 곧 수면 위로 올라오는 우럭들.
허공에 매달린 4짜와 5짜가 뒤섞여 탈탈거렸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시작하자마자 오걸이라니. 하핫.”
“선장님이 포인트를 잘 찾으셔서 그런 거죠.”
“무슨 소리! 아무리 고기가 많아도 바닥이 몹시 거칠어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오걸이는 힘들지요.”
이제 5마리는 해결됐고.
개인 물칸에 우럭들을 던져 넣고,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원줄에서 5단 채비를 떼어 내는 나를 발견하고 선장이 깜짝 놀랐다.
“뭐 하시는 겁니까?”
“…….”
한번 채비를 담가 보니,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준비해 온 7단 채비를 연결했다. 그리고 다시 배의 선수 난간으로 올라섰다.
나는 다시 바다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황량한 민둥산이 이어지다가 울창한 어초 숲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풍덩!
7개의 허연 오징어채가 꼬리를 흔들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까보다 씨알은 약간 작았지만 힘은 더 좋은 우럭들이었다. 포악한 입질이 콩 볶듯이 이어지고 나는 전동릴의 레버를 힘껏 위로 올렸다.
7걸이.
선장이 입을 쩍 벌리면서 조타실을 뛰쳐나왔다.
3짜, 4짜, 5짜. 줄줄이 올라오는 우럭들을 헤아리던 그가 조황 사진을 요청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좀 서둘러야 해서요. 다음에 찍으시죠.”
“알겠습니다. 7걸이는 저도 자주 보지 못해서리…….”
아쉬운 눈빛으로 물러서던 선장이 잠시 후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내 행동 때문이었다.
“대체 또 뭘 하시려는 겁니까?”
나는 씩 웃으며 7단 채비를 뜯어 냈다. 그리고 5단 채비 두 개를 꺼내 서로 단단하게 연결하기 시작했다.
“서, 설마 십걸이를 시도하시려는 겁니까?”
“…….”
발음하기도 애매한,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시도였다.
낚싯대보다 길게 늘어져, 해괴한 모습으로 변한 채비를 들고 나는 다시 물속을 바라보았다.
배는 서서히 흘러가고, 수심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여기다!
왕돌초가 설악산이라면 가거초는 수중에 잠긴 지리산.
울퉁불퉁한 평지를 지나 몇 개의 능선을 지나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수중 직벽이 나타났다. 실로 90도에 가까운 낭떠러지였다.
심연과도 같은 새카만 절벽 아래로 나는 무시무시한 10단 채비를 툭 떨궜다.
그리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심연을 향해 평소보다 높은 음계의 휘파람을 발산했다.
“휘익♪ 휙~~♬”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벌써부터 긴장한 우럭 떼의 눈동자들이 번뜩거렸다. 그리고 무리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위를 노려보았다.
할애비 우럭!
최대치까지 성장한 우럭을 일컫는 낚시꾼들의 용어.
최고참 연장자로 보이는 6짜 우럭이 무리를 이끌고 비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5짜 우럭들도 질세라 행렬에 가세했다.
미끼를 발견한 녀석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제는 연장자고 뭐고 앞다투어 우르르 몰려드는 우럭 떼들.
콰콰콰콱! 끼이익!
낚싯대가 부러질 것처럼 90도로 고개를 처박았다. 몸의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이미 여러 번 대물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는데도 뒷목에서 강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불규칙적으로 요동을 치는 손맛은, 한 마리의 대물 참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끼이잉~ 크르륵~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전동릴이 작동을 멈추자, 나는 직접 손으로 릴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별걸 다 보네요. 열 마리를 한꺼번에……. 이번에는 사진 찍는 겁니다.”
4짜와 5짜를 중심으로 6짜 할애비가 두 마리나 섞여 있는 10마리의 우럭들.
양팔을 뻗어도 하나의 화면에 담을 수 없는 긴 채비에 물고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낚시를 시작하고 정확히 5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선장의 카메라 앞에서 엉거주춤 두 팔을 들고 포즈를 취했던 나는 선실로 달려가며 선장에게 외쳤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바로 귀항해 주세요.”
“네에? 이렇게 잘 나오는데 낚시 더 안 하시고요?”
선실 문을 열면서 힐끔 곁눈질로 보니, 선장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선실 안에는 사심희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이마에 손을 얹었더니,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낚시 끝났어요?”
“그럼. 스물두 마리 모두 채웠어.”
“으음. 내가 얼마나 잤죠? 정신없이 잤더니 개운하네.”
“한 시간도 못 되었어. 더 자도 돼.”
깜짝 놀란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욱씬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의 옆자리에 큰 대자로 뻗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