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마지막 계열사
장재준 영감이 내민 서류는 그가 직접 만든 배의 설계도였다.
다양한 각도에서 연필로 그린 그림.
몇 번이나 지웠다가 고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장재준 영감의 음성이 정수리로 쏟아졌다.
“여수에 제가 아는 조선소가 있어, 배 만드는 일은 그쪽에 맡겨 보려고 합니다. 빠르면 이번 봄에 진수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벌써 설계도까지. 제 요청을 수락하신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그림에 재주가 없습니다. 자세히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컨셉과 고심의 흔적이 담긴 설계도였다. 제일 먼저 선실의 생김새가 다른 배와 다르다는 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선실에 평상이 아니라 의자를 놓을 계획이시군요. 그렇다면 잠은 어디서 자야 하나요?”
“주무실 분들 용으로 조타실 지하에 침실을 꾸밀 생각합니다. 출항에 세 시간, 다시 귀항에 세 시간이 소요되는 생고생 낚시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좋은 포인트라도 낚시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그럼 중내만권을 중심으로 낚시를 하시겠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장재준 영감이 추구하는 낚시의 방향을 잘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그는 전투 낚시보다 대중적인 낚시로의 포지셔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선실에 있는 테이블은 식탁인가요?”
“그렇습니다. 선실은 철저하게 휴식과 식사의 공간으로 활용할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작은 냉장고와 전기 레인지도 들여놓는군요. 완전히 색다른 느낌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기본적인 요리가 가능한 사무장을 구해야 되겠지요. 선상에서 가스 불을 사용하는 게 영 위험해 보이더군요. 배터리 용량을 약간 키우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어느덧 배의 테두리를 둘러싼 자리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캡틴 님! 자리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열여섯 자리나 되는데요? 5톤급이면 많아 봐야 열네 자리 아닙니까?”
“이제야 보셨군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장재준 영감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설계도는 9.77톤 기준입니다.”
“네에? 저는…….”
“압니다. 5톤급으로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아까 말했지만 저 또한 내 인생을 걸었습니다. 이왕이면 크고 튼튼한 배로 시작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돈은 당장에 조달하기 어려웠다. 나름의 현실을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장재준 영감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저도 절반을 대겠습니다. 아파트를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신도시에 있어, 괜찮은 값을 받을 수 있겠더군요.”
“아파트를요? 집을 내놓으시면 어디서 사시려고 그러십니까?”
“천막이야 치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절반만 내놓겠다는 겁니다. 배를 사는 데 보태고 남은 돈으로 시골에 작은 집을 하나 구할 계획입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입술을 떼려는 순간, 장재준 영감이 선수를 쳤다.
“선장은 항상 배 근처에 있어야 합니다. 멀리서 출퇴근하는 선장이 어디 있습니까? 배를 정박할 항구 근처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배를 정박할 곳까지 정하셨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화성의 전곡항입니다.”
“아아, 지금 캡틴님 보트가 있는 곳 아닙니까?”
“그나마 제가 근처의 포인트에 익숙한 곳이지요.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에 그곳으로 정한 건 아닙니다.”
“그럼…….”
“알고 보니 그 근처에 준서가 보육원에 오기 전 살던 곳이더군요. 보육원 원장님께 확인해 보니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가능하면 준서가 살던 동네에 아담한 집을 하나 구해 보려고 합니다.”
그랬었다.
장재준 영감의 고민이 어디까지 닿아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얘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배의 이름도 생각해 두었습니다. 허허.”
“그것도요? 뭔가요?”
“당연히 우리 어반자의 상호가 들어가야겠지요. 어반자 1호로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1호…… 요?”
“모범적인 낚싯배의 사례가 하나뿐이면 되겠습니까? 다른 멤버들처럼 저도 이 사업을 크게 키워 보려 합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죽기 전에 전국의 주요 항구에 우리 배를 진수시키고 싶군요.”
어렵사리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재준 영감의 포부는 이미 내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흐뭇한 기분에 서류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보신 겁니까?”
“네. 너무 잘 봤습니다. 게다가 저야 캡틴 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을 놓치신 것 같습니다. 뭔가 이상한 점 느끼지 못했습니까?”
무슨 소린가? 제일 중요한 걸 놓쳤다니.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다시 살피던 내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미간을 좁히며 서류에서 눈길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21인승 배에 자리가 열여섯 개뿐이라니.”
“이제야 아셨군요. 사무장을 빼고, 열여섯 명의 손님만 모실 계획입니다.”
“아아, 이제야 알겠군요. 네 자리를 뺀다면 선비를 인상하는 건가요?”
“아니죠. 뱃삯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수익 측면에서도 결국 손해가 나진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손님이 몰리는 주말에는 20%의 손해를 감수하겠지만, 결국 쾌적하고 넓은 배를 차별화 포인트로 삼아, 평일의 회전율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여러 측면에서 장재준 영감의 따스하고, 한편으로 치밀한 전략이 돋보이는 설계도였다.
“그럼 이 계획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되다마다요. 그리고 앞으로는 제게 일일이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구피 님과 도라에몽에게도 그랬듯이 모든 일은 캡틴 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럼 우리도 이제 법인을 만들 차례군요.”
“……법인이라고요?”
“향후 전국구 선단을 이끌 게 될 사업인데 개인 사업자로 등록할 생각이었습니까? 투자의 주체도 명확히 해야겠지요.”
“아, 그렇군요. 그럼 일단 배 계약금 금액만큼 공동 출자하는 게 어떨까요?”
세상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평행 이론처럼 우연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유선업에 진출하면서 법인까지 설립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보람이의 경우도 그랬고, 고동우의 낚시점을 열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50:50의 법인을 설립하게 되었다.
다음 날, 장재준 영감은 여수까지 달려가 배를 계약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나와 함께 서현역의 법무사를 찾아갔다.
낚시로 연을 맺게 된 피싱 어벤저스의 세 남자.
나와 사심희가 함께하는 모회사, 어반자TV의 하부를 튼튼하게 지탱하게 될 세 번째 다리가 탄생했다.
이번에도 회사명은 작명의 달인으로 떠오르는 보람이가 수고해 주었다.
‘어반자 피싱’, ‘어반자 빅원’.
초반에 거론된 회사명 후보였다. 하지만 낚시 외에도 장차 생겨날지도 모를 다른 해양 사업을 포괄하는 의미로, 나는 마지막 이름을 낙점했다.
마지막 계열사의 이름은 ‘어반자 마린’이었다.
법인 설립 신청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장재준 영감의 얼굴에 다시금 걱정이 서려 보였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죠. 일사천리로 일은 저질렀지만, 그래도 마음에 계속 걸리는 게 남아 있나 보네요.”
“뭔가요?”
“결국 선장의 첫 번째 임무는 손님들이 고기를 잘 잡게 해 주는 것인데 말입니다.”
“또 그 말씀이군요.”
“웬만한 선장들은 자신만의 비밀 포인트다 뭐다 가지고 있다지 않습니까? 그에 비하면 저는 중내만권을 타깃으로 삼았고, 심지어 경험도 없으니 말입니다.”
바다의 상황에 따라 조황이 부진한 날에는, 누구보다도 손님들에게 미안해할 장재준 영감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배가 완성되면 그를 위해 해야 할 새로운 작업을 머리에 떠올렸다.
“배가 나오면 우리 멤버들과 먼저 탐사 출조하실 거죠?”
“그야 당연하죠.”
“미리부터 걱정해서 뭐 하겠습니까? 우리가 직접 비밀 포인트를 개척하지 못하란 법 있습니까?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요. 허허.”
장재준 영감은 고마워하면서도 큰 기대를 거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내 가슴속에는 은근한 자신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1월의 두 번째 주말.
나는 사심희와 함께 준서의 세 번째 ‘왕초보편’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추운 겨울을 맞아 이번 출조지는 강원도 모처의 호수에서 펼친 빙어 낚시였다.
오랜만에 사심희를 만난 준서는 너무 기뻐 길길이 날뛰었다.
이모에게 선물을 주려는 듯, 준서는 촬영 내내 시종일관 발군의 실력을 뽐냈고 촬영은 대성공이었다.
구멍에 넣는 족족 쌍걸이는 기본이요, 어떨 때는 세 마리씩 걸어 올라와, 얼음판 위에는 통통한 빙어들이 쌓여만 갔다.
덕분에 우리는 반나절 만에 촬영을 접을 수 있었고, 일부는 튀김으로, 일부는 도리뱅뱅으로 배까지 든든하게 채웠다.
“방학인데 뭐 하고 지낼 계획이니?”
“공부해야죠. 그리고 가끔씩 캡틴 할아버지네 놀러 갈 계획이에요.”
“그래. 좋다. 안양에 오면 삼촌이랑 이모도 꼭 불러라.”
“그래도 돼요? 두 분 방해하는 거 아닌가요?”
“엥? 그게 무슨…….”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장재준 영감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겠고, 뭔가 두 사람 사이에 달라진 기류를 알아챈 모양이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준서를 평택에 내려 주고, 나는 다시 안양으로 차를 몰았다.
조수석에 앉은 사심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내게 말했다.
“안양에서 저녁 먹고 가요.”
“빙어 먹었잖아? 벌써 배가 고픈 거야?”
“내가 아니고, 우럭 님 말이에요. 거의 안 드셨잖아요.”
“아하…….”
뜨끔했다.
솔직히 나는 빙어튀김 몇 개만 맛보았을 뿐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민물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심희가 장난스럽게 입을 삐죽거렸다.
“구더기 때문에 그런 거죠? 애도 잘 먹는데 어른 남자가 무슨…….”
“아, 알고 있었구나.”
그녀의 말처럼 미끼로 사용한 구더기가 빙어의 배 속에 있을 것 같아 영 찜찜했던 것이다.
머쓱하게 웃어넘기면서 얼른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는 사시미 님이 나를 좀 더 많이 도와주면 좋겠어.”
“일을 더 주겠다는 건가요?”
“그래. 그냥 촬영만 하고 요리만 맡기기에는 아까운 인재잖아. 입사 2년 차가 되었으니, 역할을 범위를 좀 넓혀야겠지.”
“헤헤. 무슨 일을 시키려는지 궁금하다.”
“별건 아냐. 나 대신에 나눔 대상자 선정을 맡아 줘. 아무래도 사시미 님이 나보다 더 세심하게 결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말을 던지고 슬쩍 눈치를 살펴보니,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 중요한 일을 내게 맡기다니, 마치 승진한 기분이네요. 이참에 직급도 좀 올려 주시죠?”
“직급이야 원하는 대로 정해. 달랑 둘인데 뭐가 문제겠어? 아예 파격적으로 임원으로 올려주지. 사심희 상무, 어때?”
“너무 좋아요. 헤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차 안에 때 이른 개나리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근데 이게 무슨 소리죠? 전화 온 거 아녜요?”
내 바지춤에서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반가운 사람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