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줄가자미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선장이 껄껄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손님, 오늘 횡재했네요. 선비는 빼고도 남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시가리를 잡았잖아요. 보면 몰라요?”
이시가리…….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제야 고동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줄가자미를 일본 말로 그렇게 부르지. 내가 알기론 횟감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물고기야.”
장재준 영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도 아직 못 먹어 봤지만, 들어는 봤습니다. 우럭 님 덕분에 오늘 귀한 음식을 먹게 생겼군요. 허허.”
모두들 군침을 흘리는 가운데, 나는 덜컥 걱정부터 앞섰다.
“줄가자미도 가자미니까 이것도 쳐주는 거죠? 다들 인정하시는 겁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오늘따라 웬 승부욕의 화신이 된 거예요? 내가 졌어요. 됐죠?”
사심희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자, 다른 멤버들도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줄가자미를 잡았으니까 이해해 주마.”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렇게 안달복달하는 겁니까? 허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뒤늦은 민망함이 밀려왔다.
후닥닥 낚싯대를 정리하고 선실로 피신하는 동안 멤버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 * *
“이상하다? 다른 손님들은 왜 밥을 안 먹지?”
낚시가 끝나고 항구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출조점에서 제공하는 늦은 점심 식사를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른 손님들이 공짜 점심을 마다하고 떠난 뒤라, 우리 일행들만 뻘쭘하게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길에 오늘의 수확물들은 항구에서 대기하시던 아주머니께 손질을 맡겨 두었다.
이왕이면 깨끗이 손질된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내 주고 싶었다.
물론 줄가자미와 세꼬시용으로 챙긴 자잘한 가자미들은 사심희가 별도로 챙겨 가져왔다.
잠시 후 선장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분이 탁자에 몇 개의 접시를 내려놓은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밥상을 내려다본 고동우가 헛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속닥거렸다.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왜 도망갔는지 알 것 같아요.”
식어 빠진 어묵국에 반찬은 단 세 가지였다.
김치, 깍두기, 그리고 그래도 생선이랍시고 말라 비틀어진 멸치볶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먹을 것에 진심인 보람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먹으러 온 건 아니지만, 좀 심하네요. 따끈한 도치알탕까지 기대한 건 아닌데. 요즘 군대에서도 이렇게는 안 할 거예요.”
즐거운 낚시를 마치고 모두들 배가 고팠지만, 누구 하나 맛있게 먹는 사람은 없었다.
사심희가 얼른 일어나,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잠깐 도마 좀 써도 될까요?”
“무슨 일이래요?”
“가자미 회 좀 썰어 먹으려고요.”
“……깨끗이 씻어 놔요.”
선장도 그랬지만, 아내분도 똑같이 퉁명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심희가 뚝딱뚝딱 썰어 온 가자미 세꼬시와 그 귀하다는 줄가자미 회가 테이블에 놓여지자, 멤버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되돌아왔다.
“맛이 기가 막힌다. 우리 소주 한 잔씩만 할까?”
맛있는 회에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내가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제가 다녀올게요.”
보람이 얼른 근처의 편의점에 달려가 소주 한 병과 종이컵을 사 들고 오자, 그럭저럭 조촐한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새해 첫 낚시에서 뜻밖에 횡재로 얻은 줄가자미를 보니, 오늘 얘기가 잘 풀릴 것 같았다.
반주를 곁들여 오도독오도독 세꼬시를 씹어 삼키던 고동우가 그제야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우럭 님, 그럼 이제 말해 보시지. 무슨 거창한 새해 소원인지 들어나 보게.”
“아아, 그럼 이제 말씀드려 볼까요?”
다들 젓가락질을 멈추고 내 입을 주목하자, 나는 입 안에 있던 횟조각을 꿀꺽 삼켰다.
“오늘 다들 보셨을 겁니다. 선상 낚시에서 선장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조과를 떠나 서비스가 좋지 않으면, 기분만 잡치는 경우가 다반사 아닙니까.”
사설이 길어지는 것 같자, 성미 급한 고동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뭔 얘기가 그렇게 복잡해?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나는 비식 웃으면서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배는 좁아서 줄이 엉키고, 아까 보니까 대여용 구명조끼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더군요. 그리고 무성의한 식사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하다가 고동우의 눈치를 살펴보니, 빨리 결론부터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그래서 선상 낚시 문화 캠페인이라도 벌이겠다는 거야?”
“비슷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아휴. 뭔데 그리 뜸을 들이냐?”
나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어반자만의 낚싯배를 선보이는 겁니다. 모두가 타고 싶어 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선도적인 낚싯배를 말입니다.”
드디어 본론을 꺼내자, 심드렁하던 멤버들의 눈동자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멤버들의 시선들이 일제히 누군가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장재준 영감이 들고 있던 소주잔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어쩐지 오늘 이상하다 했습니다. 새해 소원이니 적임자 운운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일전에 내가 괜한 말을 꺼내서 부담을 드린 모양입니다.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평소의 인자한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진 얼굴이었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그의 지나친 정색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제가 내기 낚시에서 이긴 거 벌써 잊으셨습니까?”
“허어, 없던 얘기로 하겠다니까요.”
“그래도 약속은 약속 아닙니까?”
“우럭 님의 고마운 생각은 잘 알겠어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보고 선장을 맡으라는 얘기 아닙니까? 젊은 사람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선장 놀이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장재준 영감의 의지는 사뭇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을 굽힐 내가 아니었다.
“캡틴 님을 도우려는 게 아닙니다. 선상 낚시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실 분으로 캡틴 님을 모시려는 겁니다.”
“왜 저뿐이겠습니까? 세상에 날고 기는 선장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가 남이가, 그런 틀에 박힌 부탁으로는 씨도 먹히지 않을 분위기였다.
나는 염두에 두고 있던 마지막 카드를 꺼내야 했다.
“날고 기는 선장들 중에서 캡틴 님을 원한다는 겁니다. 정말로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낚싯배를 다뤄 본 경험도 없습니다. 친분이 아니고서야 왜 저를 선택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왜 나여야 하는지 하나라도 말해 보세요.”
설전 아닌 설전이 계속되자, 주변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고동우는 애꿎은 세꼬시 접시를 휘적거렸고, 보람이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술잔을 들어 반쯤 남은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조금은 긴 이유를 설명하고 나섰다.
“해군 출신이고, 누구보다도 바다를 사랑하며, 배 운전에도 능하다는 이유는 굳이 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캡틴 님은 수십 년 동안 선상 낚시를 해 오셨습니다. 오로지 손님의 시각에서 어반자의 배를 운영해 주실 적임자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낚싯배 선장의 최고 덕목은 물고기가 있는 포인트로 안내해 주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포인트 데이터는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대하는 캡틴 님의 따스한 마음입니다. 어반자의 배는 반드시 그런 분이 선장을 맡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장재준 영감의 애정 어린 시선.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내가 그를 원하는 이유였다.
끈질긴 내 설득에 장재준 영감은 헛기침을 하며, 식당 밖을 응시했다.
나는 다소 완곡한 어조로 바뀌어 그에게 말했다.
“그냥 돈만 벌려고 유어선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선상 낚시를 선도할 모범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싶은 겁니다. 계속 거절만 하시면 캡틴 님이 그런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그에게는 다소 결례가 될 수 있는, 반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얘기가 이쯤 되니,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멤버들도 가세하고 나섰다.
“왕고집도 그 정도면 중증입니다. 서로 좋은 일 같은데 뭘 망설이세요? 캡틴이 왜 캡틴입니까? 선장이라는 뜻 아니던가요?”
고동우가 포문을 열자, 말수 적은 보람이도 지원군으로 나섰다.
“그렇게 하시죠. 제가 보기에도 캡틴 님이 하셔야 해요.”
장재준 영감의 장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무거운 입술을 들어 올렸다.
“우럭 님의 뜻은 잘 알아들었어요. 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리다.”
“……감사합니다.”
확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감사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의 눈빛에서 이미 반쯤 결정을 내렸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고동우가 궁금한 게 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돈은 있는 거냐? 배 사려면 적잖이 들 텐데. 그동안 우리들한테 투자하느라 네 사정도 만만치 않잖아?”
“시작은 작게 해야죠. 당장 9톤급 21인승은 어렵고, 5톤급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배를 건조하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동안 그럭저럭 맞출 수는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항구는 어디로 할지 알아봤어?”
“그건 선장님이 정하실 문제겠죠.”
나는 장재준 영감을 장난스럽게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11월부터 내게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나만의 낚싯배를 마련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고, 장재준 영감을 선장으로 점찍어 둔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는 반지하 자취집을 탈출해서 번듯한 전세로 옮기고, 9톤급 배를 살 정도로 충분한 돈이 모이면 그때 일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재준 영감의 사정을 듣고, 우선순위와 시기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사심희가 내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멋있었어요. 모든 게 다 계획이 있었군요?”
“그러게 낚시 좀 살살하지 그랬어.”
“미리 알려 줬으면 봐줬죠.”
상경길의 운전은 보람이가 맡았다.
모두들 곯아떨어져 뒤척이는 동안, 나는 가끔씩 장재준 영감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 * *
며칠 후.
나는 집 안에서 베타와 고양이 낚시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어깨가 욱신거릴 정도로 놀아 주었지만, 베타는 끝도 없이 깃털을 쫓아 폴짝거렸다.
나는 녀석이 지칠 때까지 놀아 주기로 했다.
그동안 장기 출조와 사심희의 일이 겹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렇지! 이건 못 잡겠지?”
깃털을 높게 들었더니, 약이 오른 베타는 아예 뒷다리를 짚고 일어서서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이러다가 직립 보행을 하겠다.
죽방 멸치 덕분인지, 베타는 튼실한 뒷다리로 버티면서 한참 동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장재준 영감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베타가 결국 지쳐서 벌러덩 누워 버렸을 즈음이었다.
“캡틴 님!”
“잠깐 만나서 얘기합시다.”
“저번에 그 카페에서 뵈면 될까요?”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잠시 후 서현역의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장재준 영감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맞은편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압니다. 저를 위해 만든 자리라는 거. 하지만 해 보고 싶습니다. 한국 최고의 낚싯배! 저의 여생을 걸고 반드시 만들어 보겠습니다.”
예상하고 있던 답변이었지만, 묘하게도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잠시 후 장재준 영감이 가방을 뒤적거려,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